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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6
  • 묘갈명(墓碣銘)
  • 증 통훈대부 군자감 정 청계 조공 묘갈명(贈通訓大夫軍資監正淸溪趙公墓碣銘)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6 / 묘갈명(墓碣銘)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6.0003.TXT.0007
증 통훈대부 군자감 정 청계 조공 묘갈명
공의 휘는 옥생(玉生), 자는 국미(國美), 호는 청계(淸溪)이다. 조씨(趙氏)의 관향은 함안(咸安)으로, 고려(高麗) 때 평장사(平章事) 휘 정(鼎)이 그 시조이다. 세계(世系)의 중대(中代)에 이르러 휘 승숙(承肅)이란 분이 계셨으니, 세상에서는 덕곡(德谷) 선생이라고 하였다. 이분이 휘 종례(從禮)를 낳았는데, 종례의 호는 율정(栗亭)으로, 본조에 들어와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을 지냈다. 3대가 전해 내려와 휘 임(琳)에 이르렀는데, 그의 호는 진재(愼齋)로, 대사성(大司成)을 지냈다. 휘 희광(希匡)에 이르러 참봉(參奉)을 지냈으며, 동복(同福)의 예곡(艾谷)에 우거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자손들이 이곳에 거주하게 되었다. 고조는 휘 인(仁)이니, 문학과 행실이 있었다. 증조는 휘 유보(惟寶)이니, 습독관(習讀官)을 지냈고, 조부는 휘 호(豪)이니, 내금위장(內禁衛將)을 지냈다. 부친은 휘 기벽(奇壁)이고, 모친은 삭녕 최씨(朔寧崔氏)로, 참봉 최인수(崔仁壽)의 따님이다.
선묘(宣廟) 무신년(1608, 선조41) 8월 16일에 공은 예곡(艾谷)의 사제에서 태어났다. 일찍 고아가 되어 가난하였지만 어머니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다. 9세에 능성(綾城)의 산음리(山陰里)로 이사하여 살았다. 박공 영춘(朴公永春)과 이웃에 살았는데, 박공은 그가 명문가의 후손이라는 것을 알았고, 또 기골이 준수한 것을 보고 권유하여 학교에 들어가게 하고, 이어서 딸을 시집보냈다.
공은 고생을 무릅쓰고 힘써 노력하여 전심으로 학문에 매진였고, 문학으로 명망이 당대에 떨쳤지만 명리(名利)를 다투는 과거 시험장과 벼슬을 구하는 방법에는 담담하였다. 일찍이 시속을 따라 사람들과 어울려 잇속에 머뭇거리면서 말을 더듬거리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고, 오직 선을 쌓고 의를 행하며 후학들을 권장하여 정진(精進)시키는 것을 궁극적인 계책으로 삼았다. 거처하는 곳은 산이 높고 골짜기가 깊어 운림(雲林)이 창연(蒼然)하니, 사람과 땅이 잘 어울리고 정경(情境)주 206)이 서로 부합하여 한가롭게 소요하며 그윽이 감상하는 흥취를 극진히 하였으니, 실로 고인이 이른바 "영원히 이 즐거움을 잊지 않으려 맹세한다.[永矢不諼]"라는 뜻주 207)이 있었다. 장수하였다는 이유로 군자감 정(軍資監正)에 올랐다.
기묘년(1699, 숙종25) 3월 13일에 졸하였으니, 향년 92세이다. 배위(配位)는 밀양 박씨(密陽朴氏)로, 박영춘(朴永春)의 따님이자, 판서 박사룡(朴駟龍)의 손녀인데, 부덕(婦德)이 있었다. 초장동(草庄洞) 경좌(庚坐)에 쌍분으로 장사 지냈다. 아들 셋을 낳았으니, 원규(元奎), 서규(瑞奎), 창규(昌奎)이다.
연대가 더욱 멀어지고 문헌이 흩어지고 없어져 당시의 숨은 덕과 행실이 이 때문에 드러나지 않았으니, 어찌 자손의 한이 되지 않겠는가. 후손 익제(翼濟)가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비석의 후면에 기록할 글을 청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산음리는 山陰之里
여생을 보낸 곳이요. 杖屨是經
초장동은 草庄之洞
선생의 의복이 묻힌 곳이네. 衣履是藏
지역의 명성 사람에 달렸으니 地逐人好
정채가 은은하게 드러나네. 精采闇章
자손이 잘 계승하였으니 子孫善述
남은 복록 정히 영원하리 餘祿正長
주석 206)정경(情境)
정(情)은 사물을 대하여 인식하는 사람의 주관적인 마음을 가리키고, 경(境)은 인식의 대상이 되는 외부의 객관적인 현상을 가리킨다.
주석 207)영원히……뜻
《시경》〈위풍(衛風) 고반(考槃)〉에 "은사의 집이 시냇가에 있으니, 석인의 마음이 넉넉하도다. 홀로 자고 깨고 말을 하지만, 영원히 이 낙을 잊지 않으려 맹세하도다.[考槃在澗, 碩人之寬. 獨寐寤言, 永矢不諼.]"라고 하였다.
贈通訓大夫軍資監正淸溪趙公墓碣銘
公諱玉生。字國美。號淸溪。趙氏貫咸安。高麗平章事諱鼎。其始祖也。至中系有諱承肅。世稱德谷先生。生諱從禮。號栗亭。入我朝。寶文閣直提學。三傳至諱琳。號愼齋。大司成。至諱希匡。參奉。寓居同福之艾谷。子孫因居焉。高祖諱仁。有文行。曾祖諱惟寶。習讀。祖諱豪。內禁衛將。考諱奇壁。妣朔寧崔氏參奉仁壽女。宣廟戊申八月十六日。公生于艾谷第。早孤貧。事母至孝。九歲流寓綾城之山陰里。與朴公永春接隣。朴公知其爲名家遺裔。而且見其氣骨俊異。勸令就學。因以女妻之。公勤苦刻勵。一意征邁。文學聲望。擅於一時。而於聲利之場。干進之路。澹泊如也。未嘗隨俗混塵。有趑趄囁嚅之態。惟以積善行義。奬進後學。爲究竟計。所居山高谷邃。雲林蒼然。人地相得。境情交孚。婆娑徜徉。以盡其幽賞之趣者。實有古人所謂永矢不諼之意。以壽陞軍資監正。已卯三月十三日卒。得年九十二。配密陽朴氏永春女。判書駟龍孫。有婦德。葬草庄洞庚坐雙兆。生三男。元奎。瑞奎。昌奎。嗚呼。年代彌遠。文獻散逸。當日之隱德幽行。因以不暢。豈不爲子孫之恨。後孫翼濟以家狀。請爲文以識碑陰。銘曰。山陰之里。杖屨是經。草庄之洞。衣履是藏。地逐人好。精采闇章。子孫善述。餘祿正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