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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6
  • 묘갈명(墓碣銘)
  • 석남 손공 묘갈명(石南孫公墓碣銘)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6 / 묘갈명(墓碣銘)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6.0003.TXT.0006
석남 손공 묘갈명
공의 휘는 처상(處祥), 자는 사은(士隱), 호는 석남(石南)이다. 손씨(孫氏)는 세계(世系)가 밀양(密陽)에서 나왔는데, 다. 신라(新羅)부터 고려(高麗)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이어졌다. 조선에 들어와 휘 책(策)이 있었으니, 문과에 급제하고 목사(牧使)를 지냈다. 현손 휘 비장(比長)에 이르러 문과에 급제하고, 홍문관 제학을 지냈다. 연산군(燕山君) 때 벼슬에서 물러나 부안(扶安)의 갈촌(葛村)에 은거하였는데, 공에게는 10대조가 된다. 고조는 휘 시웅(始雄)으로, 동지중추부사이고, 증조는 휘 흥신(興新)으로, 부호군(副護軍)이다. 조부는 휘 덕효(德孝)로, 진사이고, 부친은 휘 몽두(夢斗)이다. 모친은 남평 문씨(南平文氏)로, 문시규(文始奎)의 따님인데,부덕(婦德)이 지극하였다.
공은 을축년(1805, 순조5) 3월 1일에 태어났다. 타고난 성품이 순후하고 기개가 빼어나고 도량이 넓었다. 서당에 나아가 공부하였는데, 번거롭게 훈장(訓長)이 감독하지 않아도 대여섯 번 이상을 송독(誦讀)하였다. 글을 짓고 글씨를 썼는데 글과 글씨는 보는 자들이 놀라고 기이하게 여길 정도의 수준이었다.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몸소 밭을 갈고 힘써 농사지어 변변치 않은 음식으로나마 어버이를 봉양하였다. 일하고 남은 힘이 있거나 고 한가한 날이면 두 아우와 함께 방을 쓸고 책상을 맞대어 토론하고 송독하였는데 공부하는 데 확실하게 과정이 있었다. 여러 번 향시(鄕試)에 합격하였지만 번번이 예부시(禮部試 대과)에는 합격하지 못했다. 그 대인(大人)이 경계하여 말하기를 "사람들이 과거에 응시하는 것은 대부분 부모를 영화롭게 하려는 계책이다. '나는 네가 나를 잘 봉양하는 것만 말할 뿐이지, 네가 나를 녹봉으로 봉양하는 것은 말하지 않는다.'라고 한 것은, 옛사람이 자식에게 경계한 말이 아니더냐.주 205) 내가 너희에게 바라는 것 또한 그러하니, 너희도 더 이상 서로 경쟁하는 곳에 마음을 허비하지 말라."라고 하니, 공이 마침내 문을 닫고 장막을 드리운 채 전심전력하여 자신의 수신(修身)을 위한 학문을 하고, 존심양성(存心養性)하며 연구하여 체득하고 실천함에 서로 그 힘을 쏟아 날로 깊은 경지에 나아갔다.
배위(配位)는 고흥 유씨(高興柳氏)로, 유광인(柳光仁)의 따님인데, 규문의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어느 날 공이 병환으로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유씨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노친을 잘 봉양하며 어린아이들을 잘 키우고, 내가 죽는 것을 한스러워하지 말라."라고 하였는데, 말을 마치자 기절하였다. 유씨가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어서 공의 입에 흘려 넣어 소생하게 하였는데, 얼마 있다가 졸하였다. 유씨는 뒤따라 죽기로 맹세하고 전혀 마시지도 먹지도 않았다. 집안사람들이 극구 만류하면서 말하기를 "노친(老親)이 살아 계시고 아이들이 품 안에 있는데 다만 부군(父君)께서 임종 때 한 말을 생각하지 않으십니까."라고 하니, 유씨가 멍하니 한숨을 쉬고 말하기를 "나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차라리 부군의 뜻을 따르는 것이 낫다."라고 하고 마침내 일어났다. 장례를 치른 뒤에 부지런히 집안 살림을 꾸리며 정성을 다해 시어른을 봉양하니, 향리에서 칭찬하여 효열부(孝烈婦)라고 일컬었다. 향리에서 추천하는 보고가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공의 묘소는 호암면(虎巖面) 우비등(牛鼻嶝) 계좌(癸坐) 언덕에 있다.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부군을 따라 죽으려 한 뜻에 따라 합장하였다. 인용(麟鏞)이라는 아들 하나가 있는데 군수를 지냈다. 손자는 참의관(參議官) 영렬(永烈), 진사인 영하(永夏), 그리고 영길(永吉), 영진(永鎭), 영실(永實)이다. 증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영렬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갈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나는 천하고 용렬한 데다 병으로 문장 짓는 것을 폐하여 감히 청에 응하지 못한 지 오래 되었지만 예전부터 서로 두터운 우의가 있었기에 차마 끝내 사양하지 못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선 쌓고 의로움 행하였지만 積善行義
오히려 덕을 감추었네. 尙絅晦根
그 보답 누리지 않고 不食厥報
후손에게 복을 남겼네. 垂裕後昆
효자의 덕행 잘 전해주니 錫類式穀
후손의 복 창성하리라 後祿以昌
문암에 있는 무덤에 門巖斧堂
해마다 늘 제향 올리네 歲事有常
주석 205)나는……아니더냐
정이(程頤)가 문인인 윤돈(尹焞)에게 "그대는 노모가 계시니, 과거를 보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윤돈이 이 사실을 어머니에게 말씀드리자 그의 어머니는 "나는 네가 잘 봉양하는 것만 알지 녹봉으로 봉양하는 것은 알지 못한다.[吾知汝以善養, 不知汝以祿養.]" 하였다. 이후 윤돈은 종신토록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宋史 道學列傳 尹焞》
石南孫公墓碣銘
公諱處祥。字士隱。號石南。孫氏系出密陽。自羅至麗。奕葉相承。入我朝。有諱策。文科。官牧使。至玄孫諱比長。文科官弘文提學。燕山朝。退休于扶安葛村。於公爲十世祖也。高祖諱始雄。同中樞。曾祖諱興新。副護軍。祖諱德孝。進士。考諱夢斗。妣南平文氏始奎女。壺儀備至。公以乙丑三月一日生。天稟醇厚。氣宇秀爽。就塾上學。不煩提督。而誦數甚勤。綴文揮毫。文與筆。見者驚異之。家貧甚。躬耕力穡以供菽水。以餘力暇日。與其二弟。掃室連榻。講討誦習。的有程曆。累中鄕解。輒屈禮部。其大人戒之曰。人之赴擧。多爲榮親計也。吾謂汝以善養。不謂汝以祿養。此非古人戒子語耶。吾之所望於汝者亦然。汝亦勿復費心於紛竸之間也。公遂杜門下帷。專心爲己。存養硏究。體認踐履。交致其力。日就邃密。配高興柳氏光仁女。閫範無闕。一日公屬疾幾危。顧柳氏曰。善養老親。善育稚孩。我死無恨。言訖而絶。柳氏血指注口。得甦數頃而卒。柳氏誓以下從。絶不飮食。家衆防之甚力。且曰。老親在堂。稚孩在懷。獨不念夫君臨沒之言乎。柳氏曠然太息曰。與其遂吾之志。不若遂夫之志也。遂起焉。視奠之餘。勤理家務。備盡忠養之節。隣里歎賞。稱以孝烈婦。鄕道剡報。續續不絶。公墓在虎巖面牛鼻嶝癸坐原。夫人之沒。從下從之意。爲之合封焉。有一男曰麟鏞。官郡守。孫男曰永烈。議官。曰永夏。進士。曰永吉。曰永鎭。曰永實。曾孫以下不盡錄。永烈抱家狀。請爲碣銘之文。余以淺劣。病廢鉛槧。其不敢承膺久矣。而在平昔相厚之義。有不忍終辭。銘曰。積善行義。尙絅晦根。不食厥報。垂裕後昆。錫類式穀。後祿以昌。門巖斧堂。歲事有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