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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묘갈명(墓碣銘)
  •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손공 묘갈명(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孫公墓碣銘)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6 / 묘갈명(墓碣銘)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6.0003.TXT.0005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손공 묘갈명
공의 휘는 시웅(始雄), 자는 미경(美卿), 호는 죽음(竹陰)이다. 손씨(孫氏)의 선조는 노(魯)나라 소공(昭公)이 망명길에 오를 때 기린을 타고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와서 구사(仇史)에 이르러 살았다고 한다. 후손 가운데 구례마(俱禮馬)가 있었으니, 신라(新羅) 태조(太祖)를 도와 모량부(牟梁部) 대인(大人)이 되었다. 훌륭한 공적과 높은 작위는 대대로 끊이지 않았다. 고려(高麗) 때 휘 빈(贇)이 있었으니,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져 자손들이 그대로 관향으로 삼았다. 휘 책(策)에 이르러 문과에 급제하고 목사(牧使)를 지냈다. 이분이 휘 계경(季敬)을 낳았다. 조선에 들어와서 그 백씨(伯氏) 휘 검경(儉敬)이 망복(罔僕)의 의리주 202)로 보성군(寶城郡)에 귀양 가는 것을 보고 공도 함께 남하하다가 부안(扶安)의 갈촌(葛村)에 정착하였다. 3대를 전해 내려와 휘 비장(比長)에 이르러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제학이 되었고, 점필재(佔畢齋) 김 선생(金先生)과 더불어 85학사에 선발되었다. 금남(錦南) 최공 부(崔公溥)와 함께 하교를 받들어 《동국통감(東國通鑑)》을 편수하였으며, 연산군(燕山君) 때 벼슬에서 물러나 부안(扶安)에서 지냈다. 대대로 문학과 행실로 이름이 났다. 고조는 휘 근로(謹老)이고, 증조 휘 대남(大南)은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추증되었으며, 조부 휘 우절(遇節)은 호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부친은 휘 일(逸)이니, 공조 참판을 지냈다. 배위는 정부인(貞夫人) 은진 송씨(恩津宋氏)로, 송후일(宋厚日)의 따님이다. 생부(生父)는 휘 이룡(以龍)으로, 가선대부에 추증되었다. 모친은 정부인 남평 반씨(南平潘氏)로, 반명환(潘明煥)의 따님이다. 현종(顯宗) 계축년(1673, 현종14) 10월 22일에 정동(井洞)의 사제(私第)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순후하고 신중하였으며, 어려서부터 지극한 행실이 있었다. 집안이 본디 너무 가난하였으므로 고기 잡고 나무하며 밭 갈고 가축을 길러 온갖 일을 모두 직접 하였으며, 이것으로 어버이에게 맛있는 음식을 봉양하였다. 게다가 한가한 날에는 치웅(致雄)과 필웅(必雄) 두 아우와 함께 글방에 들어가 책상을 마주하고 공부에 매진하였다. 어버이의 병이 위독해지자 낮에는 병석을 떠나지 않고 밤에는 잠자리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의원을 불러오고 약을 조제(調劑)하는 데 정성과 노력을 다하였다. 살아 있는 잉어가 여울에서 나오고 꿩이 뜰에 떨어지는 기이한 일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효성으로 하늘을 감동시켜 그러한 것이라고 하였다.
연달아 소생(所生 친부모)과 소후(所後 양부모)의 상을 당해서는 한결같이 예제(禮制)를 준행하여 상례의 형식과 내용주 203)이 모두 지극하였다. 일찍이 가훈(家訓)을 지어 자손을 거듭 경계하였다. 그 가훈에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고, 집안을 바르게 하고, 종친과 화목하게 지내며, 제사를 받들고, 혼인을 가려서 하고, 학문과 문장에 힘쓰고, 농사를 힘써 짓고, 장기와 바둑을 가까이하지 말고, 미신을 믿지 말라."라는 뜻으로 상세히 입설(立說)한 것이 몹시 정성스럽고 간곡하였으니, 그 좋은 계책과 훌륭한 가르침은 모두 가정을 꾸리는 자의 귀감이 될 만하였다. 죽수(竹樹)의 북쪽에 집을 짓고 죽음(竹陰)이라고 자호하였다. 자호와 연관된 시 한 편이 있는데 아래와 같다.

비봉산 앞 대숲이 우거졌으니 飛鳳山前竹樹陰
맑은 풍취는 백세 지나도록 변치 않네. 淸風百世不移心
보배인 낭간주 204) 옥인 양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看來愛有琅玕寶
아침 해 뜨길 기다려 덕음을 보네. 留待朝陽覽德音

이 시에서 그 뜻을 알 수 있다. 구용(九容)과 구사(九思)를 자리 오른쪽에 써서 늘 스스로 귀감으로 삼았으며, 《소학(小學)》과 《대학(大學)》을 평소 몸을 단속하는 근본으로 삼았다. 향리(鄕里)에서 여러 번 그 효성을 상위 관사에 천거하였다. 장수하였다는 이유로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라 3대가 추증되었다.
경신년(1740, 영조16) 1월 6일에 세상을 떠났다. 한천(寒泉)의 모산(牟山) 뒤 갑좌(甲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배위는 정부인(貞夫人) 순창 조씨(淳昌趙氏)로, 조사룡(趙士龍)의 따님이다. 규문의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4남을 낳았으니, 첫째는 명신(命新), 둘째는 흥신(興新), 셋째는 항신(恒新), 넷째는 극신(克新)으로 중부(仲父)의 양자로 갔다. 손자 원효(元孝)는 장자의 소생이다. 생원 덕효(德孝), 찬효(贊孝)는 둘째의 소생이다. 순효(淳孝)는 셋째의 소생이다. 광효(光孝), 필효(必孝), 욱효(郁孝)는 넷째의 소생이다. 증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6세손 영렬(永烈)과 영모(永謨)가 가장(家狀)을 가지고 비석의 뒷면에 새길 글을 지어 달라고 청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충강 가 忠江之上
주산의 남쪽. 珠山之陽
우뚝한 넉 자의 봉분 있으니 有崇四尺
효자가 묻힌 곳일세. 孝子攸藏
가훈 적은 책 한 권 家訓一書
후손에게 남긴 계책 매우 창성하네. 貽謨孔彰
후손이 번성하니 螽斯椒聊
남은 복록 정히 영원하리라. 餘祿正長
주석 202)망복(罔僕)의 의리
망국의 신하로서 의리를 지켜 새 왕조의 신복(臣僕)이 되지 않으려는 절조를 말한다. 은(殷)나라가 망할 무렵 기자(箕子)가 "은나라가 망하더라도 나는 남의 신복이 되지 않으리라.[商其淪喪, 我罔爲臣僕.]"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書經 微子》
주석 203)상례의 형식과 내용
원문은 '易戚인데, 상례가 형식과 내용의 측면에서 모두 훌륭하게 치러졌다는 의미이다. 《논어(論語)》 팔일(八佾)에 "상례는 형식적으로 잘하기보다는 차라리 슬퍼하는 마음이 가득해야 한다.[喪與其易也寧戚]"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주석 204)낭간(琅玕)
중국에서 나는 경옥(硬玉)의 한 가지로, 어두운 녹색이나 청백색이 나는 반투명의 옥인데, 옛부터 장식에 많이 쓰였다고 한다.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孫公墓碣銘
公諱始雄。宇美卿。號竹陰。孫氏之先。在魯昭公出奔時。有曰承麟。浮海而東。至仇史居焉。後孫有曰俱禮馬。佐新羅太祖。爲牟梁剖大人。崇勳嵬爵。奕世不絶。至麗朝。有諱贇。封密城君。子孫乃貫焉。至諱策。文牧使。生諱季敬。入我朝。見其伯氏諱儉敬。以罔僕之義。謫寶城郡。公亦與之南下。止千扶安之葛村。三傳至諱比長。生員文科弘文提學。與佔畢齋金先生。選八十五學士。與錦南崔公溥奉敎修東國通鑑。燕山朝退休扶安。世著文行。高祖諱謹老。曾祖諱大南。贈掌樂院正。祖諱遇節。贈戶曹參議。考諱逸。工曹參判。配貞夫人恩津宋氏厚日女。生考諱以龍。贈嘉善大夫。妣貞夫人南平潘氏明煥女。顯宗癸丑十月二十二日。生公于井洞第。公天稟醇謹。幼有至行。家素貧甚。漁樵耕牧。凡百事役。無不躬親爲之。以供甘旨之養。更於暇日。與二弟致雄必雄。入塾對案。不廢課程。親有劇疾。晝不就席。夜不就枕。迎醫合藥。誠力俱至。有生鯉出灘。投雉墮庭之異。人謂孝感致然。連漕所生所後喪。一遵禮制。易戚備至。嘗著家訓。申戒子孫。其訓以孝於父母。友於兄弟。正閨閫。睦宗族。奉祭祀。擇婚姻。務學文。力農業。勿近博奕。勿用巫覡之意。縷縷立說。極其懇惻。其嘉謨良規。皆可以爲有家者之柯則。築室竹樹之陰。自號竹陰。因有詩曰。飛鳳山前竹樹陰。淸風百世不移心。看來愛有琅玕寶。留待朝陽覽德音。此可以見其志矣。書九容九思於座右。常自鏡考。以小學大學爲平生律身之本。鄕道累薦其孝於上司。以壽陞嘉義。追榮三世。庚辰正月六日考終。葬寒泉之牟山後甲坐原。配貞夫人淳昌趙氏士龍女。閫儀無闕。生四男。長命新。次興新。次恒新。次克新。出系仲父后。孫元孝長房出。德孝生員。贊孝二房出。淳孝三房出。光孝。必孝。郁孝。四房出。曾孫以下不盡錄。六世孫永烈永謨奉家狀。請爲文以識碑陰。銘曰。忠江之上。珠山之陽。有崇四尺。孝子攸藏。家訓一書。貽謨孔彰。螽斯椒聊。餘祿正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