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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6
  • 묘갈명(墓碣銘)
  • 증 통훈대부 사복시 정 경헌 홍공 묘갈명(贈通訓大夫司僕寺正敬軒洪公墓碣銘)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6 / 묘갈명(墓碣銘)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6.0003.TXT.0003
증 통훈대부 사복시 정 경헌 홍공 묘갈명
공의 휘는 영환(永桓)이고, 자는 무경(武卿)이며, 경헌(敬軒)은 그의 호이다. 본관은 풍산(豊山)으로, 고려조(高麗朝)의 직학사(直學士) 경(慶)의 후손이다. 중엽에 휘 치(治)란 분이 있었으니, 학행으로 재랑(齋郞)에 제수되었다. 세상에서는 그를 일송(一松) 선생이라고 불렀다. 증조는 경고(景古)로, 덕을 숨긴 채 벼슬하지 않았다. 호는 침수정(枕潄亭)이고, 형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조부는 천규(天奎)이다. 부친은 이수(履洙)로, 효행으로 이름이 드러났다. 모친은 함풍 이씨(咸豊李氏)로, 두평(斗平)의 따님이다. 후비(後妣)는 진주 정씨(晉州鄭氏)로, 통덕랑(通德郞) 정최(鄭最)의 따님인데, 영묘(英廟) 기유년(1729, 영조5) 3월 2일에 우봉리(牛峯里)에서 공을 낳았다.
순후하고 소박하며 신중하였고, 타고난 성품이 매우 순수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 몸소 농사지으면서도 온화한 얼굴빛과 부드러운 용모를 잠시도 어김이 없었다. 어버이의 상을 당해서는 피눈물을 흘리며 지나치게 슬퍼하였으며 3년 동안 죽을 먹었다. 기일(忌日)이 되면 치재(致齋)를 극진히 하였으며 제기를 깨끗이 닦고 제수(祭需)를 장만하는 일은 반드시 직접 하였다. 세 아우와 낮에는 다정하게 마주 보며 밤에는 함께 잠을 잤다. 조용히 화락하게 지내며 일찍이 한마디 말에도 온화함을 잃은 적이 없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노년에 이르도록 한방에서 함께 지내고 먹었으며 분가(分家)하지 못하게 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경(敬)' 한 글자는 배우는 자의 시작이자 끝이니, 잠시도 내 몸에서 떠나게 해선 안 된다."라고 하고, 마침내 재실(齋室)에 편액을 걸어 경계하고 반성하는 바탕으로 삼았다. 《소학(小學)》을 입신하는 터전으로 삼고 사서(四書)를 학문에 나아가는 지름길로 삼았으며,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책까지도 탐구하고 연구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리하여 함양(涵養)하는 공부 가운데에서 체득하고 실천하는 데에서 미루어 확대하였다. 이 때문에 집에서나 고을에서나 일에 응하고 사람을 만날 적에 성대하게 자세하고 화평한 풍모가 있었다. 평생 깊이 스스로 명성을 감추고 남에게 자랑한 적이 없었으며 산림에서 한가하게 노닐다가 애오라지 생을 마감하였으니, 최상의 경지에서 덕을 수립하고 지극한 즐거움의 경지에서 노닌 것의 풍치와 격조를 대략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정종(正宗) 계축년(1793, 정조17) 9월 4일에 생을 마감하였다. 해하봉(海鰕峯)의 선영 오른쪽 언덕 사좌(已坐)에 장사 지냈다. 나중에 증손 홍필주(洪弼周)의 장수와 귀함으로 사복시 정에 추증되었다. 배위는 청주 한씨(淸州韓氏)로 숙인(淑人)에 추증되었으며, 명신(命新)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이 있었다. 공이 별세한 18년 뒤에 생을 마감하였다. 우봉촌(牛峯村) 뒤 남산(南山) 을좌(乙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3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희찬(羲纘), 낙해(樂海), 백우(百禹)이고, 딸은 문혁진(文爀鎭)에게 출가하였다. 증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공의 현손 우방(祐邦)이 장차 제묘(題墓)주 201)하는 일을 하려고 한다며 나에게 그 후면에 기록할 글을 청하였다. 생각건대 미천하고 형편없는 사람이 실로 감당할 수 없지만, 교분이 소중하여 굳게 사양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아, 이 넉 자의 봉분은 吁此四尺
길한 분 묻힌 곳이네. 吉人之藏
해하봉에 영령이 내려오니 鰕山降靈
대대로 번창하리라. 永世厥昌
주석 201)제묘(題墓)
무덤에 죽은 자의 이름 등을 써서 표시하는 것이다.
贈通訓大夫司僕寺正敬軒洪公墓碣銘
公諱永桓。字武卿。敬軒其號也。糸出豊山。麗朝直學士之慶後。中葉有諱治。以學行除齋郞。世稱一松先生。曾祖景古。隱德不仕。號枕潄亭。贈刑曹參判。祖天奎。考履洙。以孝著名。妣咸豊李氏斗平女。後妣晉州鄭氏通德郞最女。英廟已酉三月二日。生公于牛峯里。淳厚簡童。天稟甚粹。家貧養親。躬幹耕稼。怡色惋容。造次無違。及遭艱。泣血過毁。啜粥三年。遇忌日。極其致散。漑濯烹熟之節。必親爲之。與弟三人。晝則對床。夜則聯枕。從容湛樂。未嘗有一言失和。至老白首。一室同爨。不令析箸。嘗曰。敬之一字。是學者之成始成終。不可斯須去身。遂揭題齋顔。以爲警省之資。以小學爲立身田地。以四子爲進學蹊徑。至於程朱諸書。無不沈索硏究。體之於涵養之中。推之於踐履之際。是以其居家處鄕。應事接物。蔚然有慈詳豈弟之風。平生深自鞱晦。未嘗衒鬻於入。而婆娑邱林。聊以卒歲。其所以立於太上之門而遊於至樂之界者。風韻標致。槩可想也。正宗癸丑九月四日終。葬海鰕峯先隴右岡已坐。後以曾孫弼周壽貴。贈司僕寺正。配淸州韓氏贈淑人。命新女。有婦德。後公十八年而終。葬牛峯村後南山負乙之原。有三男一女。男羲纘。樂海。百禹。女文爀鎭。孫曾以下不盡錄。公玄孫祐邦。以將有題墓之役。請余誌其後。顧膚淺藐末。固不可以承當。而事契之重。有難牢讓。銘曰。吁此四尺。吉人之藏。鰕山降靈。永世厥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