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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6
  • 묘갈명(墓碣銘)
  • 증 호조 참판 경신암 오공 묘갈명(贈戶曹參判敬愼庵吳公墓碣銘)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6 / 묘갈명(墓碣銘)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6.0003.TXT.0002
증 호조 참판 경신암 오공 묘갈명
정(鄭)나라에 기근이 들자 자피(子皮)는 한 가구당 1종(鍾)의 곡식으로 구휼하였고,주 198) 송(宋)나라에 기근이 들자 자한(子罕)이 시행하였지만 이를 기록하지 않았으니,주 199) 군자가 말하기를 "정(鄭)나라의 한씨(罕氏)와 송(宋)나라의 악씨(樂氏)는 가장 마지막에 망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아, 옛날 선민(先民)이 의리를 귀하게 여기고 재물을 가볍게 여겼던 기풍이 먼 후대에 늠연히 사람으로 하여금 탄식을 자아내게 하네.
우리 고장에 근고(近古)에 살았던 경신암(敬愼庵) 오공(吳公), 휘 만상(萬祥), 자 회일(會一)은 바로 또한 한씨(罕氏)와 악씨(樂氏)에 버금갈 것이다. 큰 흉년을 만나 곳간의 곡식을 모두 내놓아 구휼하였으니, 이 덕분에 살아난 사람이 매우 많다. 지금까지도 향리 사이에서 미담으로 자자하게 전해진다. 자손이 번성하고 문학이 뛰어났으니, 이른바 마지막에 망한다는 말이 어찌 오직 고인에게만 해당하겠는가.
공은 성품이 효성스러워 평소 부모를 시봉(侍奉)함에 지물(志物)의 봉양주 200)에 빠뜨림이 없었다. 하루는 밖에서 취하여 돌아오자 그 부친이 매우 꾸짖었는데, 이후로는 한 모금의 술도 입에 대지 않았다. 부유한 집안에 생장하였지만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아 의관이 한사(寒士)와 같이 수수하였다.
병자년(1876, 고종13) 9월 13일에 졸하니, 탄생한 해인 병신년(1836, 헌종2)으로부터 41년이 된다. 묘는 고을의 품평(品坪) 앞 몰니등(沒泥嶝) 병좌(丙坐)의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오씨(吳氏)는 관향이 보성(寶城)이니, 고려(高麗) 평장사(平章事) 연총(延寵)이 그 시조이다. 위대한 공훈과 높은 관작은 대대로 이어졌다. 중엽에 이르러 휘 방한(邦翰)이 있었으니, 임진년(1592, 선조25)에 순절(殉節)하여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증조 휘 세관(世觀)은 호조 참판에, 조부 휘 태유(泰有)는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고, 부친 휘 석규(錫圭)는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모친은 공주 이씨(公州李氏)로, 정후(政厚)의 따님이다. 공은 창녕 조씨(昌寧曺氏) 광엽(光葉)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유순하고 얌전하여 규문의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모두 두 아들을 두었으니, 수남(壽南)과 수극(壽極)이다. 장자의 아들은 응조(應祚)이고, 차자의 아들은 경조(庚祚), 병조(秉祚)이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증손 재홍(在鴻)은 나와 죽마고우로, 어느 날 그 조카 창호(昌鎬)를 시켜 지은 가장(家狀)을 지어 가지고 와서 묘갈명을 청하였다. 어찌 차마 사양하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검소함으로 자신의 몸가짐으로 삼았고 儉以持己
은혜를 베풀어 남에게 미쳤네. 惠以及人
남은 명성 많은 사람에게 전해지니 遺芳萬口
남은 경사 천추에 영원하리라. 餘慶千春
주석 198)정(鄭)나라에……구휼하였고
정(鄭)나라 자전(子展)이 죽고 아들 자피(子皮)가 부친을 이어 상경의 지위를 계승하였다. 당시 정나라에 기근이 들었는데 아직 보리가 익기 전이라 백성들이 고통을 받고 있었다. 자피는 자전의 명으로 백성들에게 가구당 1종(鐘)의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의 마음을 얻은 한씨(罕氏)는 국정을 장악하여 늘 상경으로 있었다. 《春秋左氏傳 壤公29年》
주석 199)송(宋)나라에……않았으니
송(宋)나라 사성(司城) 자한(子罕)이 자피(子皮)의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 "선한 사람을 가까이하는 것이 백성이 바라는 바이다."라고 하였다. 송나라에도 기근이 들자 자한은 평공에게 공실의 곡식을 백성들에게 빌려줄 것을 요청하고, 모든 대부에게 곡식을 빌려주게 하였다. 사성씨는 곡식을 빌려준 뒤에 기록하지 않았는데, 이는 백성들에게 돌려받을 뜻이 없었다는 말이다. 진(晉)나라의 숙향(叔向)이 이 말을 듣고 "정나라의 한씨와 송나라의 악씨는 아마도 가장 나중에 망할 것이다." 하였다.《春秋左氏傳 壤公 29年》
주석 200)지물(志物)의 봉양
지(志)는 양지(養志)로 어버이의 뜻을 받들어 어버이를 즐겁게 하는 것을 말하고, 물(物)은 의복ㆍ음식 등으로 어버이를 봉양하는 것을 말하는데, 둘 다에 소홀함이 없었다는 뜻이다.
贈戶曹參判敬愼庵吳公墓碣銘
鄭饑而子皮賙粟戶一鍾。宋饑而子罕施而不書。君子曰鄭之罕。宋之樂。其後亡者乎。噫。古昔先民。貴義輕財之風。百世之下。凜凜然令人興歎。吾鄕近古敬愼庵具公。諱萬祥。字會一。卽亦罕氏樂氏之流亞也。遭歲大無。傾囷恤匱。賴活甚衆。至今藉藉爲鄕里間美談。後嗣蕃衍。文學蔚然。所謂後亡者。豈惟古人爲然。公性孝。平居侍奉。志物無闕。一日自外醉歸。其大人切責之。自後勺飮不入口。生長富饒。不喜華靡。冠服蕭然如寒士。丙子九月十三日卒。距丙申懸弧爲四十一。墓移窆州之品坪前沒泥嶝丙坐原。吳氏貫寶城。麗朝平章事延寵。其鼻祖也。偉勳嵬爵。奕世相望。至中葉。有諱邦翰。壬辰立憧。贈兵曹參判。曾祖世觀。贈戶曹參判。祖泰有。贈司僕寺正。考錫圭。贈左承旨。妣公州李氏政垕女。公娶昌寧曺氏。光葉其考也。柔婉靜嘉。閫範無闕。擧二男曰壽南壽極。長房男應祚。次房男庚祚秉祚。曾玄以下不盡錄。曾孫在鴻。余竹馬舊交世。一日伻其從子昌鎬。以所著家狀。來請碣銘之文。嗚呼。豈忍辭哉。銘曰。儉以持已。惠以及人。遺芳萬口。餘慶千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