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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6
  • 묘갈명(墓碣銘)
  • 충의위 연정 이공 묘지명(忠義衛蓮汀李公墓碣銘)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6 / 묘갈명(墓碣銘)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6.0003.TXT.0001
충의위 연정 이공 묘지명
공의 성은 이씨(李氏), 휘는 상후(相厚)주 193), 자는 성징(聖徵), 호는 연정(蓮汀)이다. 시호 양평공(襄平公) 휘 원계(元桂)인 완풍군(完豊君)의 후손이다. 양평공은 완산군(完山君)을 낳았으니, 시호는 양도공(襄度公), 휘는 천우(天祐)이다. 양도공은 여양군(驪陽君) 휘 굉(宏)을, 여양군은 월성군(月城君) 휘 명인(明仁)을, 월성군은 부사맹(副司猛) 휘 효상(孝常)을, 부사맹은 부사과(副司果) 휘 세원(世元)을, 부사과는 사마(司馬) 휘 학(鶴)을, 사마는 진사 휘 응종(應鍾)을, 진사는 휘 극조(克操)를, 극조는 충의위(忠義衛) 휘 전(腆)주 194)을 낳았다. 이분은 강수은 선생(姜睡隱先生)의 문인으로, 문학과 의로운 행의로 세상에서 추중을 받았으니 바로 공의 증조부이다. 조부는 충의위(忠義衛) 휘 형진(亨震)으로 집안의 가르침을 받아 문학과 행실로 이름이 났다. 부친은 휘 옹(滃)주 195)이니, 충의위이다. 모친은 장택 고씨(長澤高氏)로, 부회(傅誨)의 따님이다. 생부(生父)는 휘 집(濈)이며, 생모는 영광 정씨(靈光丁氏) 도(燾)의 따님으로, 숙묘(肅廟) 을묘년(1675, 숙종1) 1월 11일에 영광(靈光) 묘장리(畝長里)에서 공을 낳았다.
기우(氣宇)가 의젓하며 재능과 성품이 남보다 뛰어났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였기에 따라가려고 해도 미치지 못하는 슬픔을 깊이 가슴에 간직하여 아침저녁으로 사당에 참배하고 삭망(朔望)에는 산소를 참배하였는데 비바람이 치든 춥든 덥든 폐한 적이 없었다. 해마다 기일이 되고 봄가을 우로(雨露)가 내리면 애통하고 서글픈 마음에 마치 부친이 살아계신 듯한 정성을 다하였다. 지극한 효성으로 어머니를 섬겼는데 고기 잡고 나무하고 변변치 않은 음식이나마 정성을 다해 봉양하여 기쁘게 해드렸으며 공경하는 마음으로 삼가고 조심하였다. 평소 의관을 반드시 단정히 하고 용모를 반드시 삼갔는데 엄숙하고 숙연하여 보는 사람들이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켰다. 사람을 대할 적에는 너그럽고 간이(簡易)하여 준엄하거나 기이한 행실이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의리와 시비의 근원에 대해서는 또 주저하거나 사정을 봐주는 일이 있지 않았다. 여러 경서에 통달하고 제자백가에 박식하여 체득하고 실천하며 발휘하고 확충하였다. 세상의 변화와 시상(時象)에 대해서는 그윽하고 깊으며 은미하고 소홀한 곳에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지만 마치 모르는 듯이 항상 침묵을 지켰다. 찾아와 묻는 사람이 있으면 번번이 말하기를 "한쪽으로 치우친 지각은 곤충도 오히려 잘할 수 있으니, 이 어찌 귀할 것이 있겠는가. 성인은 먼저 아는 것을 지혜로 삼지 않고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에 힘쓰는 것을 지혜로 삼았다."라고 하였다. 관직은 충의위(忠義衛)를 지냈으니 이는 선대의 음덕(蔭德)으로 인한 것이다. 어느 해 12월 29일에 졸하였다. 능주(綾州)의 남쪽의 한 방리(坊里) 연화봉(蓮花峯) 부간좌(負艮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이천 서씨(利川徐氏)로, 응상(應祥)의 따님이다. 묘소는 남평(南平) 철천(鐵川) 갑좌(甲坐)에 있다. 계비(繼妣)는 무송 유씨(茂松庾氏)로, 석량(碩良)의 따님이다. 묘소는 건위(乾位) 아래에 합장하였다. 후사가 없어 종부제(從父弟) 상회(相檜)의 아들 일훈(一薰)주 196)을 양자로 삼았고, 딸은 풍산(豊山) 홍찬동(洪贊東)에게 출가하였다.
아, 공은 왕실 계통의 훌륭한 가문으로 문망(門望)과 명성은 세상에 자랑할 만하고 문학과 재능은 당시에 주선(周旋)할 수 있었으니, 전국 시대의 공자 가운데 제(齊)나라의 전문(田文), 조(趙)나라 조승(趙勝)주 197)과 같다고 하더라도 누가 불가하다고 하겠는가. 하지만 도리어 남쪽 변방의 적막한 물가에 광채를 감추고 자취를 거두어, 온포(縕袍)로 패옥(珮玉)을 대신하고 단출한 음식을 진수성찬처럼 여겨 아득히 초야에 은둔하며 한가로이 지내다가 생을 마감하였으니, 그 훌륭한 기품과 뛰어난 흥취는 먼 후대에도 옷깃을 여미게 할 것이다. 그 재주가 이처럼 높지만 덕으로써 거느리고, 그 지혜가 이처럼 밝지만 어리석음으로 지켰다.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힘쓰는 것을 지혜로 삼고 먼저 아는 술수를 귀함으로 여기지 않았으니, 그 바른 학문은 속일 수 없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말단적인 참위(讖緯)나 술수(術數)에 분주하지만 스스로 터득한 자는 경계할 줄을 알 것이다.
묘소에 오래도록 묘표가 없었는데, 6대손 이기백(李琪白)이 종친들과 도모하여 돌을 깎아 비석을 세우려 하면서 후면에 새길 글을 청하였다. 내가 감히 합당한 사람이 아니라고 사양하지 못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하늘이 밝은 운수를 열어 天啓煕運
천명이 이어지네. 寶籙綿綿
공의 아들과 손자 公子公孫
후손이 많고 많네. 冑支兟兟
묘장리에 은거하여 畝長菟裘
세상 위한 도모 빛났네. 世猷赫然
고상하게 멀리 떠났으니 高尙遐擧
밝은 시대 일민이었네. 昭代逸民
연화산이 어디인가 蓮花何山
해마다 봄풀이 자라네. 春草年年
아, 너희 초동, 목동들아 嗟爾樵牧
베지도 자르지도 말라. 勿蒸勿薪
주석 193)상후(相厚)
《송사집(松沙集)》 권39 〈연정이공묘지명(蓮汀李公墓誌銘)〉에는 '厚'가 '垕'로 되어 있다.
주석 194)전(腆)
《송사집(松沙集)》 권39 〈연정이공묘지명(蓮汀李公墓誌銘)〉에는 '㙉'으로 되어 있다.
주석 195)옹(滃)
《송사집(松沙集)》 권39 〈연정이공묘지명(蓮汀李公墓誌銘)〉에는 '潝'으로 되어 있다.
주석 196)일훈(一薰)
《송사집(松沙集)》 권39 〈연정이공묘지명(蓮汀李公墓誌銘)〉에는 '一'이 '日'로 되어 있다.
주석 197)제(齊)나라의……조승(趙勝)
전국 시대 제(齊)나라의 맹상군(孟嘗君) 전문(田文), 위(魏)나라의 신릉군(信陵君) 위무기(魏無忌), 조(趙)나라의 평원군(平原君) 조승(趙勝), 초(楚)나라의 춘신군(春申君) 황헐(黃歇)이 모두 재상 지위에 있으면서 선비들을 좋아하여 문하에 식객 3천을 두었다. 《史記 孟嘗君列傳, 平原君虞卿列傳, 魏公子列傳, 春申君列傳》
忠義衛蓮汀李公墓碣銘
公姓李。諱相垕。字聖徵。號蓮汀。完豊君諡襄平公諱元桂之後也。襄平生完山君諡襄度公諱天祐。襄度生驪陽君諱宏。驪陽生月城君諱明仁。月城生副司猛諱孝常。司猛生副司果諱世元。司果生司馬諱鶴。司馬生進士諱應鍾。進士生諱克操。克操生忠義衛諱㙉。以姜睡隱先生門人。文學行義。爲世推重。卽公之曾祖也。祖諱亨震忠義衛。服襲庭訓。文行著聞。考諱滃忠義衛。妣長澤高氏傅誨女。生考諱濈。妣靈光丁氏燾女。以肅廟乙卯正月十一日生公于靈光畝長里。氣宇疑重。才性過人。早喪所怙。深懷靡逮之痛。晨夕謁廟。朔望展墳。風雨寒暑。未嘗廢弛。歲序諱日之臨。春秋雨露之濡。哀傷感惻以盡如在之誠。事母至孝。漁樵菽水。怡愉洞屬。平居冠服必勅。容色必謹。儼然肅然。瞻者起敬。及至接人。寬弘簡易。不見有峻絶阻異之行。然於義利是非之原。又未有依違假借也。淹貫群經。博洽諸子。體認踐履。發揮展拓。至於世變時象。幽深微忽。無不通曉。而恒居沈默。若無所知也。人有來問者。輒曰。一偏知覺。昆蟲猶有能之。此奚足貴乎。聖人不以先知爲知。而以務民之義爲知也。官忠義衛。蓋其世蔭也。以某年十二月九日卒。葬綾州南一坊蓮花峯負艮之原。配利川徐氏應祥女。墓南平鐵川甲坐。系配茂松庾氏碩良女。墓祔乾位下。無嗣。取從父弟相檜子一薰爲後。一女適豊山洪贊東。嗚呼。公以璿派華冑。門望聲猷。足以誇張於世。文學才華。足以周旋於時。如列國公子齊之文趙之勝。誰謂不可。而乃能潛光斂迹於南荒寂寞之濱。以縕袍代珮玉。箪瓢視列鼎。邈然遐擧。優遊卒歲。其偉韻逸趣。百世之下。可以斂衽。其才若是高矣。而將之以德。其知若是明矣。而守之以愚。以務民之義爲知。不以先知之術爲貴。其學問之正。不可誣矣。世之營營於讖緯術數之末。而自以爲得者。可以知戒矣。墓久無表。六代孫琪白謀諸宗。伐石樹隧。請其所以刻諸陰面者。余不敢以非其人辭。銘曰。天啓煕運。寶籙綿綿。公子公孫。冑支兟兟。畝長菟裘。世猷赫然。高尙遐擧。昭代逸民。蓮花何山。春草年年。嗟爾樵牧。勿蒸勿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