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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6
  • 비(碑)
  • 가선대부 예조 참판 김공이 의를 베푼 것에 대한 추모불망비(嘉善大夫禮曹參判金公施義追慕不忘碑)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6 / 비(碑)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6.0002.TXT.0001
가선대부 예조 참판 김공이 의를 베푼 것에 대한 추모불망비
옛날 범 문정공(范文正公)이 의전(義田)을 마련하고 봉급을 나눔에 항상 종족에게 균등하게 하였으니,주 186) 그 의를 귀하게 여기고 재물을 가볍게 여기는 유풍은 천년 뒤에서 생각해도 사모하고 탄상하는 정을 감당하지 못한다. 더구나 오늘날에 고인의 위대한 행실이 있음을 보게 됨에야 어떠하겠는가.
고 예조 참판 김재환(金在煥) 공은 바로 삼족당(三足堂) 선생주 187) 휘 대유(大有)의 후손이고 증 호조 참판 휘 우직(宇直)주 188)의 아들이다. 젊어서 매우 가난하여 봉양할 수 없자 드디어 몸을 부지런히 움직여 산림을 주관하여 집안의 재력이 자못 부유하게 되자 산 사람 섬김에 기쁨을 다하였고 죽은 이를 섬김에 예를 다하였고, 집을 지어 책을 쌓아서 독서하고 의를 행하는 것을 궁극의 계획으로 삼았다. 매번 흉년이나 혹 춘궁기를 만나면 구휼하여 공급하는 은혜가 고을의 가난한 이에게 두루 미쳤고, 족척(族戚)의 친한 이에 이르러서는 더욱 은의(恩意)를 다하여 기포(飢飽)와 한난(寒暖), 고락(苦樂)과 영췌(榮悴)에 한 몸처럼 서로 의지하여 애초에 차이를 두지 않았다. 이 때문에 내외의 친소(親疎)에게 모두 마음을 얻었고, 고학(皐鶴)이 하늘에 들리게주 189) 되자 임금님의 포증이 융숭하고 무거워 지위가 참판[亞卿]에 이르렀고 장수하여 기로사(耆老社)에 올랐다. 임종에 미쳐서는 여러 종족들을 불러 이르기를 "나는 지금 죽을 것이니 능히 다시 서로 정을 지극히 할 수 없을까 두렵다."라고 하고는 드디어 전지(田地)를 나누어 하사함에 각각 차등을 두었다. 전지를 받은 사람은 모두 수십 여 집이었다.
공을 이미 장사지내고 나서 여러 종족들이 모여서 도모하여 장차 비석을 세워 그 글을 적으려고 인하여 나에게 물었다.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베풀고 덕을 드러내지 않는 것 이것은 실로 공의 뜻이다. 그러나 남의 은혜를 받고 차마 잊지 못하는 것 또한 효자와 인인(仁人)의 마음이다. 더구나 지금 세교(世敎)가 밝지 못하여 욕망의 물결이 하늘에 넘쳐 쌀알을 헤아려 밥을 짓고 섶을 저울질 하여 불을 때고,주 190) 와각(蝸角)의 만촉(蠻蜀)주 191) 같은 것이 도도하게 모두 이러하니, 공의 지극한 행실과 훌륭한 절도는 어찌 금석에 새겨 사통팔달의 거리에 게시하여 천부(淺夫)와 소인[宵人]으로 하여금 취하여 법으로 삼을 바가 있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옛 사람은 정(鄭)나라의 한씨(罕氏)와 송(宋)나라의 악씨(樂氏)를 뒤에 망할 자로 여겼으니,주 192) 지금 공의 적선(積善)과 여록(餘祿)은 또한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감동하여 우러르던 끝에 삼가 그 대강을 서술할 뿐이다.
주석 186)범 문정공(范文正公)이……하였으니
범 문정공은 송(宋)나라 때 이름난 재상 범중엄(范仲淹, 989~1052)을 말한다. 자는 희문(希文)이고, 문정(文正)은 시호이다. 오현(吳縣) 출신이다. 벼슬이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러 귀하게 되었을 때, 여러 자제들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우리 오현의 종족이 매우 많아서 나에게 실로 친소가 있으나 조종께서 보신다면 모두 한 자손이니 실로 친소가 없다.……조종 이래로 덕을 쌓기를 백 년 남짓하여 비로소 나에게서 발복하여 높은 관직에 이르렀으니 만약 홀로 부귀를 누리고 종족의 기한(饑寒)을 보살피지 않는다면, 후일 어떻게 지하에서 조종을 볼 것이며, 지금 무슨 낯으로 가묘에 들어갈 것인가.[吾吳中宗族甚衆, 於吾固有親疎, 然吾祖宗視之, 則均是子孫, 固無親疎也.……自祖宗來, 積德百餘年, 而始發於吾, 得至大官, 若獨享富貴, 而不恤宗族, 異日何以見祖宗於地下, 今何顔入家廟乎?]"라고 하고, 오현의 일족을 위하여 자신의 봉급을 덜어 의전택(義田宅)을 설치하고 대소사에 그 경비를 충당하게 했던 일이 있는데, 이것을 의장(義庄)이라고 한다. 《小學 善行》
주석 187)삼족당(三足堂) 선생
김대유(金大有, 1479~1551)를 말한다. 자는 천우(天祐), 호는 삼족당, 본관은 김해(金海)이고,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의 조카이다. 현량과(賢良科)로 나아가 호조 좌랑·정언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청도(淸道)의 자계서원(紫溪書院)과 선암서원(仙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주석 188)우직(宇直)
김우직(金宇直, 1797~1854)을 말한다. 자는 영윤(永允), 호는 지헌(止軒)이다. 자세한 내용은 기우만(奇宇萬)의 《송사집(松沙集)》 권32 〈지헌 김공 묘갈명(止軒金公墓碣銘)〉에 보인다.
주석 189)고학(皐鶴)이 하늘에 들리게
은거하는 군자의 덕이 멀리까지 알려지는 것을 비유한다. 《시경》 〈소아(小雅) 학명(鶴鳴)〉에 "학이 구고의 늪에서 우니, 그 소리가 하늘에 들린다.[鶴鳴于九皐, 聲聞于天.]"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주석 190)쌀알을……때고
각박하여 까다롭게 따진다는 의미이다.
주석 191)와각(蝸角)의 만촉(蠻蜀)
작은 것을 놓고 서로 아옹다옹하는 것을 말한다. 달팽이의 왼쪽 뿔에 있는 촉(觸)나라와 오른쪽 뿔에 있는 만(蠻)이라는 나라가 영토를 다투느라 전쟁을 벌여 죽은 시체가 백만이나 되었다는 우화로, 《장자(莊子)》 〈칙양(則陽)〉에 실려 있다.
주석 192)정(鄭)나라의……여겼으니
《춘추좌씨전》 노양공6(魯襄公六) 26년 조에 "진(晉)나라 숙향(叔向)이 말하기를 '정(鄭)나라의 한씨(罕氏)와 송(宋)나라의 악씨(樂氏)는 최후에 망할 것이니, 두 집안 모두 국정을 장악하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민심이 모두 저들에게 돌아갔기 때문이다. 은혜를 베풀고도 스스로 덕으로 여기지 않은 것은 악씨가 한씨보다 더 훌륭하다. 악씨는 아마도 송나라와 성쇠를 함께할 것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嘉善大夫禮曹參判金公施義追慕不忘碑
昔范文正公。置義田分俸祿。常均於宗族。其貴義輕財之風。追惟千載。不勝愛慕嗟賞之情。況在今日而見有古人之偉行乎。故禮曹參判金公在煥。卽三足堂先生諱大有後。贈戶曹參判諱字直子也。少貧甚。無以爲養。遂勤身幹家。以至家力頗溫。而生事盡歡。死事盡禮。築室儲書。以讀書行義爲究竟家計。每遇饑歲或窮春。賑給之惠。遍於鄕坊之貧者。至族戚之親。尤盡恩意。飢飽寒暖。苦樂榮悴。相須一體。未始有間。是以內外親疎。咸得其心。以至皐鶴聞天。天褒隆重。位至亞卿。壽隮耆老社。及其臨終也。招諸宗族謂曰。我今死矣。恐不能復相致情。遂分田地。賜各有差。其受田者。凡數十餘家。公旣葬。諸族聚而謀之。將伐石以識其書。因問於余。余曰。施而不德。此固公之意。然受人恩而不忍忘。亦孝子仁人之心也。況今世敎不明。慾浪漲天。數米秤薪。蠻蜀蝸角。滔滔皆是。若公之至行偉節。豈不可以刻之金石。揭之通衢。使淺夫宵人得有所取法乎。古人以鄭之罕宋之樂爲後亡者。今公之積善餘祿。亦豈有艾乎。感仰之餘。謹述其梗槩云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