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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형삼에 대한 제문(祭尹亨三文)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6 / 제문(祭文)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6.0001.TXT.0031
윤형삼주 145)에 대한 제문
죽마고우로 백수의 노년까지 상종한 이로는 형 입장에서는 오직 나이고 내 입장에서는 오직 형일 뿐입니다. 전후로 60여 년 동안 한묵(翰墨)의 마당, 문주(文酒)의 자리나 길흉사, 행지(行止)의 의리에 같이 하지 않은 일이 없고 같이 하지 않은 곳이 없었으니, 그 승화(乘化)주 146)하는 한 가지 일에도 마땅히 더불어 함께해야 할 것인데 형이 이에 먼저 가기를 이와 같이 급하게 하시는가! 오호 통재라!
형의 선공 삼형제와 저의 선친 삼형제는 연세가 모두 80, 70세에 창백한 얼굴 흰머리로 밤낮으로 마주하기를 마치 수양(睢陽)의 오로(五老)주 147)와 향산(香山)의 구로(九老)주 148)와 같았으니, 이것은 태평한 시절에 장수 하였던 좋은 기수(氣數)였네. 형과 나는 함께 아롱진 적삼과 색동옷을 입고 달려가 그 곁에서 응대하였네. 이윽고 서쪽으로 기우는 해를 붙잡을 수 없고 남극성이 빛을 잃자 두 집안의 남은 사람은 모두 부모 잃은 외로운 사람이 되어 서로 덮어주기를 가문 밭의 새싹과 같이 하고 서로 구제해 주기를 수레바퀴에 고인 물속의 물고기 같이 하면서 여생의 계획으로 삼았네. 더구나 이렇게 북풍 불고 눈 내리는 것이 질펀하여 끝날 기약이 없는데 사랑하고 좋아하는 이와 손잡고 조만간 함께 돌아가려 하였는데,주 149) 유명(幽明)으로 작별함이 갑자기 목전에 있어 인생 만사가 모두 허무하게 될 줄 어찌 알았겠는가.
나는 올 초에 부모님 산소에 성묘 갔다가 저물녘에 나의 사촌 집에 들어갔는데, 형이 소식을 듣고 찾아와 나를 데리고 가서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었고, 내가 출발하려 할 때 또 만류하여 이틀 밤을 묵었으니, 어쩌면 형이 돌아가실 날이 장차 임박한 줄 알고서 굳이 머물게 하여 얼굴을 보고서 영결할 계획을 하였던 것인가? 만약 이와 같을 줄 알았다면 아우가 어찌 하루의 시일을 아까워하여 평생의 벗과 영원히 끝나는 작별을 하지 않았겠는가. 애통하고 애통하도다!
천 권의 책을 쌓아 두고 천 리에 스승을 따라 몸을 닦고 의를 행한 것이 수십 년 이었으니, 그 빼어난 운치는 남에게 추앙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기러기는 아득한 하늘위로 날아가고 매미는 더럽고 탁한 가운데서 허물을 벗어버리듯 하여 원성(元城)의 좋은 명(命)주 150)과 원우(元祐)의 완인(完人)주 151)이 되는 것이니, 형은 여기에 대해 또한 유감이 없을 것이네. 구봉(九峯)의 수석과 묵계(墨溪)의 풍월은 백대의 뒤에도 정채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니,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은 어찌 눌와(訥窩) 처사의 묘소가 있는 곳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슬픈 마음 적어 제문을 지어 이렇게 영결을 고하니 영령이여 아실런지요?
주석 145)
윤형삼(尹亨三):윤자현(尹滋鉉, 1844∼1909)을 말한다. 자는 형삼, 호는 눌와(訥窩),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의 문인으로, 정의림과 교유하였다. 저서로는 《눌와유집(訥窩遺集)》이 있다.
주석 146)승화(乘化)
자연의 조화에 따라 죽는다는 뜻이다.
주석 147)수양(睢陽)의 오로(五老)
수양(睢陽)은 남경(南京)으로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상구현(商丘縣) 남쪽의 지명이다. 재상에서 물러난 두연(杜衍)이 80세 때인 송 인종(宋仁宗) 가우(嘉祐) 1년인 1056년 가을에 수양에서 왕환(王渙), 필세장(畢世長), 주관(朱貫), 풍평(馮平)과 오로회(五老會)를 결성하여 시와 술로 서로 즐겼다. 《澠水燕談錄 高逸》
주석 148)향산(香山)의 구로(九老)
당(唐)나라 때 백거이(白居易)가 형부 상서(刑部尙書)로 치사한 뒤, 향산에 기거하면서 향산거사(香山居士)라 자칭하고, 호고(胡杲)·길교(吉皎)·정거(鄭據)·유진(劉眞)·노정(盧貞)·장혼(張渾)·이원상(李元爽)·여만(如滿) 등과 함께 모임을 결성하고 향산구로회라고 일컬었다. 《百香山詩集 卷40 香山九老圖幷書》
주석 149)북풍……하였는데
《시경》 〈패풍(邶風) 북풍(北風)〉에 "북풍이 차갑게 부는 데다 함박눈도 펑펑 내리도다. 사랑하여 나를 좋아하는 이와 손잡고 함께 떠나가리라.[北風其涼, 雨雪其雱. 惠而好我, 攜手同行.]" 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주석 150)원성(元城)의 좋은 명(命)
원성은 송(宋)나라 유안세(劉安世)의 봉호이다. 그는 사마광(司馬光)의 제자로서 벼슬이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이르렀는데 논사(論事)에 강직하기로 유명하였다. 정강(靖康) 1년에 금군(金軍)이 쳐들어와 경사(京師)를 함락시키고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이 북으로 잡혀가는 변이 일어났는데, 유안세는 그보다 1년 앞인 선화(宣和 휘종의 연호) 7년에 죽어서 정강의 변을 당하지 않았음을 말한 것이다. 《宋史 卷345 劉安世列傳》
주석 151)원우(元祐)의 완인(完人)
원우는 송(宋)나라 철종(哲宗) 때의 연호이고, 완인은 난세(亂世)에도 실절(失節)하지 않고 횡사(橫死)하지 않아서 신명(身命)과 절의(節義)를 지킨 사람을 말한다. 본래는 송 철종(宋哲宗) 원우 연간에 보문각 대제(寶文閣待制)를 지낸 유안세(劉安世)를 가리킨다. 그가 조정에서 쫓겨나 여러 유배지를 거쳐 매주(梅州)에 이배(移配)되었을 때 장돈(章惇), 채변(蔡卞) 등이 하수인을 시켜 그를 죽이려고 했으나, 다행히 위기를 면하고 뒤에 풀려났다. 그 후 집에 있는 동안 그의 명망이 더욱 높아지자 당시 한창 권력을 행사하던 양사성(梁師成)이 사자(使者)를 시켜 편지를 보내서 크게 등용하겠다는 뜻으로 달래고 또 자손의 장래를 위하는 계책도 세우도록 권하였다. 유안세가 웃으면서 사절하기를 "내가 만일 자손의 계책을 위했다면 이 지경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원우의 완인이 되어 지하에 가서 스승 사마광을 만나고 싶을 뿐이다.[吾若爲子孫計, 不至是矣. 吾欲爲元祐全人, 見司馬光于地下.]"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宋史 劉安世列傳》
祭尹亨三文
以竹馬舊交。而老白首相從。在兄惟我。在我惟兄而已。前後六十餘年。翰墨之場。文酒之席。吉凶之故。行止之義。無事不同。無處不同。則其於乘化一事。亦當與之同之。而兄乃先着若是遽遽耶。嗚呼痛哉。尊先公三昆季。鄙先人三昆季。年皆八十七十。蒼顔白髮。日夕相對。如睢陽之五。香山之九。此是昇平壽域好氣數。兄與我俱以斑衫彩衣。趨走唯喏於其側。旣而西日莫係。南極無光。而兩家餘生。俱俱風樹孤露人。互相芘覆如旱田之苗。互相喣濡如涸轍之鱗。以爲殘生餘日之計。況此北風雨雪。漫無了期。而惠好携手。早晩同歸。豈知幽明去留。遽在目前。而人生萬事。都歸烏有耶。余於歲初。省掃親塋。暮入鄙從家。兄聞之。尋來携去。達夜敍話。其發也。又挽之信宿。豈兄知大限將迫而固留之。爲面訣計耶。若知如此。弟豈悋一日之費。不與平生知舊。爲千古終天之別乎。痛哉痛哉。貯書千卷。從師千里。修身行義數十年。其偉韻逸趣。有以見慕於人者。爲何如耶。鴻飛於冥漠之上。蟬蛻於穢濁之中。而爲元城之好命。元祐之完人者。兄其於此。亦可以無憾矣。九峯水石。墨溪風月。百歲之下。精采可想。人之過之者。豈不曰訥窩處士杖屨之所乎。綴哀緘辭。玆以告訣。靈其知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