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화콘텐츠
  • 특화콘텐츠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6
  • 제문(祭文)
  • 홍문현에 대한 제문(祭洪文玄文)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6 / 제문(祭文)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6.0001.TXT.0030
홍문현주 136)에 대한 제문
공은 순후(淳厚)하고 성각(誠慤)한 자질과 침정(沈靜)하고 안상(安詳)한 자태로 가정의 학문을 계승하고 사우의 가르침에 종유하여 효우의 행실과 화락할 기풍이 집에 있어서도 반드시 달(達)하고 나라에 있어서도 반드시 달하여 젊어서는 근칙(勤勅)한 선사(善士)가 되고 늙어서는 숙석(宿碩)의 위유(偉儒)가 되었네. 오직 조물주가 좋아하지 않고 운명이 떨쳐지지 못하여 전후의 60년 동안 지내온 사업은 단지 궁벽한 산에 하나의 초당뿐이었으니, 양빈(楊貧)주 137)과 한궁(韓窮),주 138) 교한(郊寒)과 도수(島瘦)주 139)가 처음부터 한 사람의 몸에 모이지 않음이 없었네. 그러나 비색함이 형통한 것주 140)은 무리 짓지 않았기 때문이고 발꿈치가 꾸며짐주 141)은 수레를 타지 않기 때문이니, 백발의 한 서생이 세상에서 능히 형통하지 못할 형통함을 가지고 남들이 능히 꾸미지 못할 꾸밈을 가지고 있을 줄 누가 알았으랴!
의림(義林)은 일찍이 그대 중부 봉남옹(鳳南翁)주 142)과 생사를 함께하는 막역한 교분을 맺었네. 이윽고 옹이 이미 나를 버렸고 그 집안에는 서업을 이어서 전술할 사람은 오직 공이 있었네. 더구나 부조가 대대로 교분을 맺어 어릴 때부터 알아 성기(聲氣)를 함께하여 서로 익숙하고 친밀함은 누가 공보다 앞설 사람이 있겠는가. 풍상에 흔들려 떨어져 어려움 속에 서로 지키던 뜻이 실로 끊임없이 왕래하며 의지할 곳이 있었는데, 어찌 하나의 병이 낫지 않아 마침내 그대가 먼저 감이 이와 같은가. 백아의 거문고 줄이 이미 끊어졌고, 영질(郢質)이 이미 없어지니,주 143) 금오(金鰲)의 수석과 침정(枕亭)주 144)의 풍월에 단지 여생의 다하지 않는 슬픔만 있을 뿐이네. 외롭고 쓸쓸하니, 누가 나의 슬픔을 알리오?
주석 136)홍문현(洪文玄)
홍우석(洪祐錫, 1843∼?)을 말한다. 자는 문현, 호는 우재(愚齋), 본관은 풍산(豐山)이다.
주석 137)양빈(楊貧)
한(漢)나라 때 양웅(揚雄)의 가난을 말한다. 양웅은 가난하게 살았는데, 이러한 내용을 담은 〈축빈부(逐貧賦)〉를 지은 바 있다.
주석 138)한궁(韓窮)
당(唐)나라 한유(韓愈)의 궁함을 말한다. 한유가 궁하여 〈송궁문(送窮文)〉을 지었다.
주석 139)교한(郊寒)과 도수(島瘦)
맹교(孟郊, 751∼814)의 청한과 가도(賈島)779∼843)의 수척함을 말한다. 소식(蘇軾)의 〈제유자옥문(祭柳子玉文)〉에서 "맹교의 시격은 청한하고, 가도의 시격은 수척하다.[郊寒島瘦]"라고 평가하였는데, 이들은 빈한하고 불우한 삶의 풍경을 시에 그대로 담아내었다.
주석 140)비색함이 형통한 것
《주역》 〈비괘(否卦) 육이(六二)〉에 "대인비형(大人否亨)은 소인(小人)의 무리에게 어지럽혀지지 않는 것이다.[大人否亨, 不亂群也.]"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주석 141)발꿈치가 꾸며짐
《주역》 〈비괘(賁卦) 초구(初九)〉에 "발을 꾸밈이니, 수레를 버리고 걸어간다.[賁其趾, 舍車而徒.]"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주석 142)봉남옹(鳳南翁)
홍채주(洪埰周, 1834∼1887)를 말한다. 자는 경좌(卿佐), 호는 봉남, 본관은 풍산이다. 저서로는 《봉남집》이 있다.
주석 143)영질(郢質)이 이미 없어지니
옛적에 영(郢)에 도끼질 잘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의 코끝에다 백토(白土)를 조금 붙여두고 도끼질로 그 백토를 다 깎아내어도 코는 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코를 대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유독 한 사람이 그의 기술을 알기 때문에 안심하고 코를 대주었다. 그 뒤에 그 사람이 죽고 나자 도끼를 던지며, "이제는 나의 바탕이 죽었으니, 어디에 기술을 쓰랴."라고 하였다.《莊子 徐无鬼》
주석 144)침정(枕亭)
침수정(枕漱亭)을 말한다. 전라남도 화순군 춘양면 우보리에 있다. 팔우(八愚) 홍경고(洪景古, 1645∼1699)가 17세기 말에 건립하였고, 그의 6세손인 홍채주가 1885년에 중건하였다.
祭洪文玄文
公以淳厚誠慤之質。沈靜安詳之姿。承襲家庭之學。游從師友之敎。孝友之行。愷悌之風。在家必達。在邦必達。少而爲勤勅之善士。老而爲宿碩之偉儒。惟是造物不媚。命道不揚。前後六十年經歷事業。只是窮山一草堂而已。楊貧韓窮。郊寒島瘦。未始不萃於一人之身。然否之亨。以其不群也。趾之賁。以其不乘也。誰知白髮一書生。有世所不能亨之亨。有人所不能賁之賁耶。義林早與尊仲父鳳南翁。爲死生莫逆之契。旣而翁已棄我。而其門庭之內。紹述緖餘。惟公在焉。況父祖世交。童穉舊知。同聲同氣。相熟相密。孰有先於公者乎。風霜搖落。艱關相守之意。實有源源毗倚之地。何其一疾不退。而竟爾先着若是耶。牙琴已斷矣。郢質已亡矣。金鰲水石。枕亭風月。只有餘生不盡之悲而已。踽踽凉凉。孰知我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