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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16
  • 제문(祭文)
  • 죽포 양공에 대한 제문(祭竹圃梁公文)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6 / 제문(祭文)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6.0001.TXT.0014
죽포 양공에 대한 제문
생각건대, 우리 조선은 5백 년 동안 거듭 빛나고 은택이 흡족하여 거실세족(巨室世族)과 저명한 성씨와 집안이 능히 선대의 법을 지켜 오래도록 잃지 않은 이는 위로 경기지역으로부터 아래로 시골에 이르기까지 곳곳마다 서로 바라보입니다. 이것은 지난 역사책에서도 그 비견할 이들이 드물게 보이니, 부터 유래한 것이 깊음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오호라! 공은 호남의 저명한 성씨이고 능주(綾州) 지역의 명가로, 학포(學圃),주 75) 송천(松川)주 76) 두 선생으로부터 이후로 위유(偉儒)와 석덕(碩德)이 대대로 그 아름다움을 이었고, 공에 이르러 문학과 행의가 또 능히 전대의 업을 이어 전술하여 아름다운 소문과 명망이 이른 나이에 자자하였습니다. 그러나 발걸음은 성시(城市)에 이르지 않았고 몸은 요직에 있는 사람을 만나지 않고 바위 언덕과 시내 골짝의 사이에 깊이 감추고 멀리 떠나 한가로이 배회하며 여생을 마쳤으니, 그 무너진 풍속을 진정시키고 이 세상에 보탬이 있었던 것은 어찌 이른바 줄어들지 않는 유익함과 보답하지 못하는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오호라! 의림(義林)의 선대 항렬의 세 분 형제가 여러 대 동안 유리하던 끝에 또 장차 이 땅에 와서 의지하려 하였는데, 그대 선공(先公) 운곡(雲谷) 어른이 실로 주인이 되어 주었습니다. 벗을 떠나 쓸쓸히 지내는 정경은 형용하기 어려웠는데 부축하고 도와주고 구휼하고 보살펴주어 끝내 편안한 집을 얻는데주 77) 이르게 하고 내가 들로 다니는주 78) 탄식이 없게 하였으니, 이것은 누구의 은혜입니까? 세시(歲時) 때마다 안부를 묻고 살펴서 행차가 서로 이어졌고, 한가한 날에는 심회를 펼쳐 술잔과 소반이 교차하였습니다. 당시 소자는 이를 갈 나이의 어린아이로 한두 번 곁에서 모실 수 있었는데, 그 기뻐하는 기색과 정연한 위의를 기억함에 지금도 여전히 어제의 일과 같았습니다.
오호라! 두 집안의 선대 어른은 모두 이미 천고의 사람이 되었고, 오늘에 이르러 공이 또 갑자기 이 세상을 버렸습니다. 어두운 거리의 어리석은 사람들이 갈팡질팡 갈 곳이 없는데 한 분의 연세 높고 덕이 많은 분을 잃었으니, 이것은 이 세상의 애통함입니다. 부모 잃은 여생에 외로워 의지할 곳이 없는데 한 분 선대 항렬의 우아한 교분을 잃었으니, 이것은 나의 개인적인 애통함입니다. 그러나 의림 또한 늙어, 저승에 선군자를 따를 날이 장차 멀지 않았으니, 두 집안의 2,3세가 어찌 끝내 저승 누대 위에서 함께 모여 옛날처럼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이 세상의 애통함은 이 세상 사람에게 맡기고 내 개인적인 애통함은 또한 거의 스스로 위로할 수 있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의림은 병이 들어 문을 닫고 문밖을 나가지 않은지 오래되었는데, 지금 영원히 돌아가게 되는 때에 의리상 가만히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병을 무릅쓰고 포복하여 가서 하늘이 다하도록 무궁한 슬픔을 곡하며 고합니다.
주석 75)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 1488∼1545)의 호이다. 자는 대춘(大春), 본관은 제주(濟州)이다. 중종조에 수찬, 교리 등의 직을 역임하였다. 1519년(중종14)에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 등을 위하여 소두(疏頭)로서 항소하였다가 삭직되어 고향인 능주(綾州)로 돌아와 학포당(學圃堂)을 짓고는 독서로 소일하였다. 1630년(인조8) 능주 죽수서원(竹樹書院)에 배향되었으며, 1818년(순조18) 순천 용강서원(龍岡書院)에 추향되었다. 저서로는 《학포유집(學圃遺集)》이 있다.
주석 76)송천(松川)
양응정(梁應鼎, 1519∼1581)의 호이다. 자는 공섭(公燮)이다. 시문에 능하여 선조 때 8문장의 한 사람으로 뽑혔으며 효행으로 정문이 세워졌다. 공조 좌랑, 진주 목사, 공조 참판, 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송천집》, 《용성창수록(龍城唱酬錄)》 등이 있다.
주석 77)끝내……얻는데
《시경》 〈소아(小雅) 홍안(鴻雁)〉에 "비록 고생은 하더라도, 끝내 편안한 집을 얻으리라.[雖則劬勞, 其究安宅.]"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주석 78)내가 들로 다니는
《시경》 소아(小雅)의 편명 〈아행기야(我行其野)〉에서 취한 말이다.
祭竹圃梁公文
惟我朝重熙。累洽五百年。而巨室世族。著姓名家。能守先法。久而不失者。上自畿甸。下至鄕曲。在任相望焉。此在往牒。鮮見其比。而可以見其有所自者深矣。嗚呼。公湖省著姓。綾鄕名家。自學圃松川兩先生以來。偉儒碩德。世濟其美。至于公。文學行義。又能紹述前業。令聞令望。早年藉藉。然足不到城市。身不見要人。而深藏遠引於巖。阿澗谷之間。婆娑徜徉。聊以卒歲。其所以鎭定頹俗。有補斯世者。豈非所謂不損之益不報之恩耶。嗚乎。義林先行三昆季。在累世流離之餘。而又將來依此土也。尊先公雲谷丈。實爲之主焉。離索踽凉。情景難狀。而扶之翼之。恤之存之。使至於其究安宅。而無我行其野之歎。是誰之賜歟。歲時存省。杖屢相尋。暇日敍暢。盃盤交錯。伊時小子。以毁齒之年。得一再侍惻矣。記其怡怡之色。秩秩之儀。至今依依然如昨日事。嗚呼。兩家先公。皆已千古矣。至於今日。公又遽棄斯世耶。昏衢群蒙倀倀莫往。而失一耆舊宿碩。此爲斯世之慟也。風樹餘生。煢煢靡賴。而失一先行雅契。此爲私情之慟也。然義林亦老矣。從先君子於九原。行將不遠。則兩家二三世。豈不終當會聚於泉臺之上。歡然如平昔耶。然則斯世之慟。付諸斯世之人。而私情之慟。亦庶有可以自慰者矣。義林病廢。杜門不出戶庭久矣。而今於永歸之辰。理不可以但已。故力疾匍匐。哭告終天無窮之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