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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6
  • 제문(祭文)
  • 족대부 석당 선생에 대한 제문(祭族大父石塘先生文)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6 / 제문(祭文)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6.0001.TXT.0002
족대부 석당 선생주 11)에 대한 제문
선생은 몇 세대에 한번 나오는 기상과 하늘이 준 빼어난 재주로 멀리로는 수사(洙泗)주 12)의 전함을 거슬러 올랐고 가까이로는 낙민(洛閩)주 13)의 실마리를 궁구하여 안으로는 종애(鍾崖)주 14)와 노학(老學) 같은 어진 선조의 학업을 계승하고, 밖으로는 사계(沙溪)주 15)와 제강(堤江주 16)) 같은 선정의 통서를 접하여 연원이 이미 바르고 문로가 매우 컸습니다. 이(理)와 의(義)가 밝고 정밀하여 하늘과 사람의 깊은 뜻에 묵묵히 계합하였고, 도(道)와 덕(德)이 높고 높아 일찍 공보(公輔)의 명망주 17)을 지고 있었습니다. 둥글고 모난 규구(規矩)로 만고의 모양과 법도를 보존하고, 봄같이 온화하고 가을 같이 엄숙하여 사시의 원기를 갖추며, 봉장(封章)주 18) 항의(抗義)하여 음양의 숙특(淑慝)을 구분하고, 글을 저술하여 어리석음 깨우치니 족히 경전에 우익(羽翼)이 되며, 아름다운 산수에 오매(寤寐)의 즐거움 길이 맹세하고, 서울[洛陽]의 옥백(玉帛)주 19)은 초빙[聘辟]하는 명을 부질없이 수고롭게 하였으며, 동산에 해가 지니 다시 창생의 희망이 없고, 하루 저녁에 기둥을 꿈꾸어주 20) 갑자기 철인(哲人)이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오호라! 사문은 누구를 의지하며, 세도는 어디를 우러르겠습니까? 우리 집안은 백여 년부터 이래로 날로 쇠퇴하였습니다. 선생께서 일찍이 이를 위해 개연해 하여 집안을 위한 계획으로 소자에게 거듭 당부한 것이 간곡할 뿐만이 아니었으니, 어찌 오늘 갑자기 소자를 버리고 소자로 하여금 의귀할 곳이 없게 하는지요. 받은 말씀 마음에 남아 있어 비록 저버리지 않고자 하나 누가 조치하여 인도해 주며, 누가 성취시켜 줄 것입니까? 사문과 세도의 걱정은 실로 이루 말할 수 없고, 집안의 계책은 어찌하며 저를 위한 계획은 어찌하겠습니까? 모습이 영원히 막혔고 전형(典刑)은 살필 곳이 없습니다. 성묘하며 곡하니 호산(湖山)이 처량하고 암담합니다. 슬픈 마음 엮어 제문을 잡고서 감히 제사를 올립니다.
주석 11)석당(石塘) 선생
정의림의 족대부(族大父) 정귀석(鄭龜錫, 1790∼?)을 말한다.
주석 12)수사(洙泗)
수수(洙水)와 사수(泗水)로, 노(魯)나라에 있었던 두 물의 이름인데, 공자가 이곳에 제자들을 모아 놓고 학문을 강론하였으므로, 곧 공자 및 유학(儒學)을 일컫는다. 《禮記 檀弓上》
주석 13)낙민(洛閩)
낙(洛)은 낙양(洛陽)으로 정호(程顥)·정이(程頤)가, 민(閩)은 민중(閩中)으로 주희(朱熹)가 거주하던 곳이다.
주석 14)종애(鍾崖)
정부(鄭敷, 1659~1712)의 호이다. 자는 대재(大哉),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주석 15)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의 호이다. 자는 희원(希元),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이이(李珥)와 송익필(宋翼弼)의 문인이다. 서인 명문의 대학자로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 정진하였고, 인조반정 이후 여러 차례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후진 양성에 힘써 아들인 김집(金集)을 비롯해 송시열(宋時烈), 이유태(李惟泰), 장유(張維) 등 걸출한 서인 학자를 많이 배출하였다. 저서로는 《사계전서(沙溪全書)》, 《가례집람(家禮輯覽)》, 《상례비요(喪禮備要)》,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 《경서변의(經書辨疑)》 등이 있다.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주석 16)제강(堤江)
충청북도 제천(堤川)의 황강(黃江) 가에서 강학한 권상하(權尙夏, 1641~1721)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는 치도(致道), 호는 수암(遂菴)ㆍ한수재(寒水齋),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송시열(宋時烈)의 수제자로 기호학파의 정통 계승자이며, 인물성동이논쟁(人物性同異論爭)인 호락논변(湖洛論辨)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660년(현종1) 진사가 되었고, 스승 송시열이 관작을 삭탈당하고 유배되는 상황 속에서 정계 진출을 포기하고 청풍 산속에 은거하며 학문을 닦았다. 1703년부터 1717년까지 해마다 대사헌, 이조 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에 임명되었고, 1721년(경종1)에는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리고 나아가지 않았다. 저서로는 《한수재집》 이 있다.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주석 17)공보(公輔)의 명망
대신이 될 것이 기대되는 명성과 인망을 이른다. 공보는 삼공(三公)과 사보(四輔)를 아울러 이르는 말로 삼공은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을 이르고, 사보는 전의(前疑)·후승(後丞)·좌보(左輔)·우필(右弼)로 군주의 좌우에서 보필하는 신하들이다.
주석 18)봉장(封章)
밀봉하여서 올리는 건의를 말한다. 고대에 관료들이 임금에게 기밀의 사안을 건의할 때 누설을 방지하기 위하여, 검정 주머니에 담아서 밀봉하여 올렸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다. 봉사(封事)이라고도 한다.
주석 19)옥백(玉帛)
예의를 갖추어 어진 이를 부르는 것을 뜻한다.
주석 20)기둥을 꿈꾸어
사람이 죽는 꿈을 말한다. 공자가 '두 기둥 사이에 앉아 제수를 받는 꿈을 꾸고[夢坐奠於兩楹之間]' 얼마 뒤에 죽은 고사에서 유래한다. 《禮記 檀弓上》
祭族大父石塘先生文
先生以間世之氣。天挺之才。遠溯洙泗之傳。近究洛閩之緖。內而襲鍾崖老學賢祖之業。外而接沙溪堤江先正之統。淵源旣正。門路甚大。理明義精。默契天人之蘊。道尊德高。早負公輔之望。規圓矩方。存萬古之樣轍。春溫秋肅。備四時之元氣。封章抗義。分陰陽之淑慝。著書開蒙。足羽翼於經傳。嘉林山水。永矢寤寐之樂。洛陽玉帛。虛勞聘辟之命。東山落日。無復蒼生之望。夢楹一夕。遽遭哲人之萎。嗚呼。斯文誰賴。世道安仰。吾門自百餘年來。日就衰替。先生嘗爲之慨然。而以門戶之計。申申於小子者。不啻懇惻。豈今日遽棄小子。而使小子俾無所依歸耶。受言在心。雖欲不負。而誰其指引之。誰其成就之。斯文世道之憂。固不可勝言。而門户之策奈何。自身之計奈何。儀容永隔。典刑無稽。展墳號哭。湖山凄黯。綴哀操文。敢奠侑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