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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5
  • 발(跋)
  • 〈만회옹전〉 뒤에 쓰다(書晩悔翁傳後)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5 / 발(跋)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5.0001.TXT.0011
〈만회옹전〉 뒤에 쓰다
지난 계유년(1873, 고종10)에 호부 시랑(戶部侍郞) 면암 선생(勉庵先生) 최공(崔公)이 언사(言事)로 죄를 얻어 장차 제주도[耽羅]로 귀양 가게 되었다. 사림들은 길에 나와 전송하고 부녀자와 어린 아이들은 거리에서 모여 구경하였으며 심지어 주막이나 시장 점포의 백정이나 술파는 아낙도 이마에 손을 얹고 바라보지 않음이 없어 노참(路站)은 시장처럼 북적였고 술상은 비가 내리는 듯 침울하여, 물리쳐도 떠나지 않고 금지해도 중지하지 않았으니, 지나가는 천리 길에 이어져 끊어지지 않았다. 나루터에 도착하자 전송하는 사람들은 돌아가고 모였던 사람들은 흩어져 감히 함께 배를 타는 사람이 없었고, 가시울타리 속에 갇혀 있어 또 달려가 안부를 묻는 사람도 없었다. 대개 제주도는 푸른 바다 만 리 가운데 있어 악어 같은 물결과 고래 같은 파도가 거세고 험하여 조금이라도 역풍이 불면 목숨을 보존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배를 저어 왕래한 것은 예로부터 매우 드물었다.
오직 고 만회 처사(晩悔處士) 최승현(崔勝鉉) 공은 선생과 일면식의 친분도 없는데 힘을 팔아 양식을 모아 위험을 무릅쓰고 나아갔다. 선생이 제주도에서 풀려나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또 흑산도(黑山島)로 귀양 갔는데, 흑산도는 제주도에 비하여 더욱 험하고 멀었지만 공이 또 갔다. 옛날 채명원(蔡明遠)은 안 노공(顔魯公)이 조정에 있었던 날에 안부를 물은 적이 없었지만 강회(江淮)에서 굶주릴 때 쌀을 운반하여 대접하였고,주 45) 장의보(張毅甫)는 문문산(文文山)이 재상이 되었을 때 나아가지 않았으나 연옥(燕獄)에 구금되었을 때 몸을 맡겨 따랐으니,주 46) 지금 공의 일은 이것과 유사하지 않은가. 이것은 모두 고금의 영렬한 대장부이니, 풍치를 상상함에 나도 모르게 감탄이 일어난다. 탁계순(卓契順)이 해남(海南)으로 한 번의 행차를 한 것주 47)도 오히려 족히 백세토록 불후하였으니, 더구나 공이 힘썼던 것은 한 번에 그치지 않았고 그 마음을 먹고 의에 나아간 것은 또 탁계순이 견줄 것이 아닐 것이다.
공은 우리 고을 사람이다. 이 때 나는 묵계(墨溪)의 집에서 어버이 병을 시중들고 있어 선생이 도내를 지난다고 들었으나 문을 나가 전송하지 못하였고, 같은 고을에 있으면서 또 선생을 본 사람을 만나려고 하였으나 능히 보지 못하였으니, 푸른 바다를 건넜던 사람과 비교하면 어찌 다만 황곡(黃鵠)과 양충(壤虫)주 48)의 차이일 뿐이겠는가. 그 뒤에 공이 나를 한 번 방문하였고 내가 공을 한 번 방문하였지만 모두 만나지 못하였는데 공은 이미 돌아가셨다. 풍의(風義)를 뒤미처 생각하니 단지 슬픔과 후회만 간절하네.
신묘년(1891, 고종28) 봄에 공의 아들 영호(永皓) 씨가 천태 우사(天台寓舍)로 나를 방문하여 집안에 보관하던 글을 소매에서 꺼내어 보여주고 인하여 한마디 말을 청하였다. 나는 매몰된 천한 자취로 실로 감히 받들어 응할 수 없지만 다만 평소 향하여 우러르던 처지에 이미 얼굴을 보지 못하였으니, 혹 이것으로 인하여 어둡고 어두운 가운데에서 유향(遺響)을 의탁할 수 있을 것인가.
아! 인간에게 도리가 있는데 어진 이를 좋아하는 것이 그 본령이 되니, 진실로 이 마음이 없다면 백 가지 행실 만 가지 선을 어디에 붙이겠는가. 공을 알려고 하는 사람은 단지 바다를 건넜던 한 가지 절개에서 다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가 평생 의를 행하였던 상세함 같은 것은 면암 선생이 이미 기록하였으니,주 49) 족히 천고에 불후할 공안(公案)이 될 것이다.
주석 45)채명원(蔡明遠)은……대접하였고
채명원은 파양(鄱陽)의 교위(校尉)고, 안 노공(顔魯公)은 노군공(魯郡公)에 봉(封)해진 당(唐)나라 안진경(顔眞卿, 709~784)을 말한다. 이 사실은 안진경이 51세 때에 채명원에게 보답의 의미로 써 준 글씨 〈채명원파양첩(蔡明遠鄱陽帖)〉에 보인다. 《顔魯公集 年譜》
주석 46)장의보(張毅甫)는……따랐으니
문문산(文文山)은 남송(南宋)의 문천상(文天祥, 1236~1282)을 말한다. 장의보가 문천상의 해골을 업고 길주(吉州)로 돌아가서 장례를 치렀던 것을 말한다.
주석 47)탁계순(卓契順)이……것
소식(蘇軾)이 유배를 당했을 때 찾아 주었던 일을 말한다. 《동파전집(東坡全集)》 권23 〈차운정혜흠장로견기(次韻定慧欽長老見寄)〉의 서(序)에 "소주(蘇州) 정혜사 장로 수흠이 그 문도 탁계순을 혜주(惠州)로 보내 나의 안부를 물었다."라고 하였다.
주석 48)황곡(黃鵠)과 양충(壤蟲)
남만 못한 데 대한 탄식을 말한다. 전국(戰國) 시대의 연(燕)나라 사람 노오(魯敖)가 유람하기를 좋아하여, 천하에 자기보다 많은 곳을 유람한 자가 없다고 자부하였는데, 북쪽의 몽궐산(蒙闕山)에 올라 한 도사(道士)를 만나서 천상천하(天上天下)를 다 돌아다녔다는 말을 듣고는 "이 도사는 한 번의 날갯짓에 천 리를 나는 황곡(黃鵠)과 같고, 나는 땅을 기어가는 작은 벌레[壤蟲]와 같다."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淮南子 道應訓》
주석 49)면암 선생이 이미 기록하였으니
《면암집(勉菴集)》권40〈최만회옹전(崔晩悔翁傳)〉을 말한다.
書晩悔翁傳後
往在癸酉。戶部侍郞勉庵先生崔公。言事得罪。將貶謫于耽羅也。士林出送於道。婦孺聚觀於巷。以至店幕市肆屠夫沽媼。無不加額瞻望。路站如市。酒盤如雨。揮之而不去。禁之而不止。所經千里。接屬無間。及到津頭。送者返。聚者散。無敢與之同舟者。在棘中。又寂然奔訊之人。蓋耽羅在滄溟萬里之中。鰐浪鯨波。瀰漫洶涌。少有逆風。性命難保。是以舟楫往來。自古絶罕。惟故晩悔處士崔公勝鉉。與先生無一面之分。而賣力聚粮。冒危凌險而赴之。先生自耽羅解歸。未幾。又謫于黑山。黑山視耽羅。尤爲險遠。而公又往焉。昔蔡明遠無問於顔魯公立朝之日。而在淮飢餓。運米而餉之。張毅甫不就於文文山作相之時。而被燕獄拘幽。委身而隨之。今公之事。不其類此乎。此皆古今烈烈大丈夫。想像風致。不覺興歎。卓契順辦海南一番之行。而猶足不朽於百世。況公之所辦。非止一番。而其設心就義。又非契順比耶。公吾鄕人也。是時余侍親疾于墨溪村舍。聞先生過省內。而未得出門相送。在同鄕。又欲見見先生之人而不能得。視諸越涉滄溟者。奚但黃鵠壤虫之分耶。其後公一過余。余一過公。皆未遇而公已千古矣。追念風義。只切悲悔。歲辛卯春。公胤子永皓甫。訪余於天台寓舍。袖示家藏文字。因請一言。余以埋沒賤迹。固不敢承膺。但平日向仰之地。旣違顔範。則或可因此而托遺響於冥冥耶。噫。人之有道。好賢爲其本領。苟無此心。百行萬善。何所附着也。欲知公者。只於涉海一節。可以槪矣。若其平生行義之詳。勉庵先生已記之。足可爲千古不朽之公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