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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5
  • 발(跋)
  • 〈회와 박공 가장〉 뒤에 적다(題悔窩朴公家狀後)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5 / 발(跋)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5.0001.TXT.0010
〈회와 박공 가장〉 뒤에 적다
고인의 말에 이르기를 "안으로 어진 부형이 없고 밖으로 엄한 사우가 없으면서 능히 성취함이 있는 자는 적다."라고 하였는데,주 42) 지금 회와(悔窩) 박공(朴公)의 유장(遺狀)을 읽고 가만히 부합하는 점이 있음을 알았다. 공의 조카 인진(麟鎭)이 일찍 고아가 되어 집안일을 맡게 되자, 공이 집안일 때문에 학문에 방해가 있을까 염려하여 경계하기를 "사람이 배우지 않으면 금수에 가까운데, 더구나 부모의 바람과 가문의 책임이 너의 몸에 있으니, 그 중요함이 어찌 다만 집안일과 견주겠느냐?"라고 하고, 이에 대소가의 일을 몸소 스스로 주관하여 관리하고 그로 하여금 안심하고 오로지 힘써 어진 사우들과 종유하게 하였다. 여러 해가 쌓여 그 학업을 성취하여 마침내 사문(斯文)의 순유(醇儒)와 오당(吾黨)의 위인(偉人)이 되었다. 그러나 회와공의 훈도한 힘이 아니었다면 그 수립한 것이 어찌 능히 이럴 수 있었겠는가. 이 한 가지 일에서 공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
나는 그의 조카와 더불어 종유하며 강마한 지 10여 년 동안에 책상 아래에서 공에게 인사 드릴 수 있었던 것이 또한 자못 자주 있었다. 가만히 보건대 공의 형체와 모습이 풍후(豊厚)하고 의용(儀容)이 장중(莊重)하여 남과 더불어 말하거나 웃는 것이 적었고, 일에 임하여 표시 나게 드러내는 것이 적었으니, 아름답게 옛 선진의 기풍이 있었다.
오호라! 공과 조카가 차례로 돌아가신 지 장차 지금 20년이 되어가니, 모시고 따르던 나는 외롭고 쓸쓸하여 누구를 의지하겠는가. 다만 그 아들 규진(奎鎭)주 43)과 종손(從孫) 준기(準基)주 44)가 경전에 힘쓰고 몸을 신칙하여 바야흐로 진보가 끝이 없을 것이라, 또한 공께서 가르친 방법이 돌아가신 뒤에도 실추되지 않음을 볼 수 있으니, 아, 공경할 만하다. 삼가 가장 뒤에 기록하여 내가 뒤미처 생각하는 만분의 일의 정을 깃들인다.
주석 42)고인의……하였는데
《소학》 〈선행(善行)〉에 나오는 여희철(呂希哲, 1039~1116)의 말이다.
주석 43)
아들 규진(奎鎭):박규진(朴奎鎭, 1858~1934)을 말한다. 자는 대규(大圭),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주석 44)종손(從孫) 준기(準基)
박준기(朴準基, 1864~1940)를 말한다. 자는 경립景立), 호는 겸산(謙山),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저서로는 《겸산유고(謙山遺稿)》가 있다.
題悔窩朴公家狀後
古人有言曰。內無賢父兄。外無嚴師友。而能有成者少矣。今讀悔窩朴公遺狀。竊有槪焉。公從子麟鎭。早孤當室。公慮其以家務而妨於學問。戒之曰。人而不學。近於禽獸。況父母之望。門戶之責。在於汝躬者。其重豈特家務之比哉。於是大少家務。躬自幹理。使之安心專力。遊從賢士友。積歲積年。以就其業。卒爲斯文之醇儒。吾黨之偉人。然非悔窩公訓迪之力。其所樹立。安能乃爾。於此一事而可以見公之爲公也。余與其從子。遊從講磨十餘年。得以拜公於床下者。亦頗頻頻矣。竊見公體相豊厚。儀容莊重。與人寡言笑。臨事少表襮。偉然有古先進之風。嗚乎。公與從子次第就幽。將二十稔于玆。陪從餘生。踽凉奚依。但其遺胤奎鎭從孫準基。劬經勅躬。方進未已。亦可以見公之敎法。不墜於身後。吁可敬也。謹識狀後。以寓區區追想萬一之情云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