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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跋)
  • 《돈재집》 발문(遯齋集跋)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5 / 발(跋)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5.0001.TXT.0002
《돈재집》주 7) 발문
호남은 문헌의 고장으로 스승으로 사모할 만한 선진(先進)과 장덕(長德)이 성대하게 이어져 서로 바라보이니, 우리 고을 고 지평(持平) 돈재(遯齋) 정 선생(鄭先生) 같은 분이 또한 그런 사람이다. 선생은 일찍 김점필재(金佔畢齋)주 8)를 스승으로 모셔 한훤당(寒暄堂),주 9) 일두(一蠹),주 10) 탁영(濯纓),주 11) 추강(秋江)주 12)등 제현들과 도의(道義)로 교유하였으니, 이것은 동방연원의 한 가닥 정맥이다. 그 말과 마음으로 전수한 진전(眞詮)과 요결(要訣)은 반드시 고향 마을[鄕井] 서당[庠塾]의 선비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것이 있을 것인데, 희희양양(熙熙穰穰)주 13) 왕래하여 성운(聲韻)이 더욱 아득해지고 오직 지석강(支石江)주 14)의 청풍과 해망산(海望山)주 15)의 명월만이 거니시던 곳에 의연하여 나로 하여금 모습을 상상함에 끝없는 감회가 있게 한다.
옛날 계해년에 후손 제공들이 시와 부, 기문 약간 편을 옛 상자와 흩어진 종이 가운데서 수습하여 목판으로 새겨 세상에 간행하였다. 이윽고 후손 재홍(在洪), 재우(在禹). 우현(禹鉉) 등이 당일 간행할 때 혹 고증과 교감이 정밀하지 못하다는 탄식이 없을 수 없다고 하여 이에 더욱더 증정(證訂)하고 윤색(潤色)하여 거듭 간행하여 멀리 전할 계획으로 삼았다.
오호라! 이것은 그 책을 만든 것이 엉성하고 적료(寂寥)하여 선생께서 평소 온축한 것을 발명하기에 부족한 것이 있다. 그러나 한 갈고리만 들어보아도 좋은 쇠는 와력(瓦礫)주 16)이 아님을 알 수 있고 한 가지만 꺾어보아도 단계(丹桂)는 저력(樗櫟)주 17)이 아님을 알 수 있으니, 이것이 고을 인사들이 추모하고 상상하는 조금의 뜻이나마 위로할 수 있을 것이다.
주석 7)돈재집(遯齋集)
정여해(鄭汝諧, 1450~1520)의 문집이다. 1917년 1책의 목활자로 간행되었다. 정여해는 조선 성종(成宗) 때의 문신으로, 자는 중화(仲和), 호는 돈재, 본관은 하동(河東)이다. 일두(一蠹) 정여창(丁汝昌)의 4종제이고,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삭주 교수(朔州敎授), 지평(持平) 등을 지냈다.
주석 8)김점필재(金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을 말한다. 자는 계온(季昷)ㆍ효관(孝盥), 호는 점필재,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1459년(세조5)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형조 판서에 이르렀다. 영남학파의 종조이다. 생전에 지은 〈조의제문〉은 무오사가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저서로는 《점필재집》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주석 9)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의 호이다. 자는 대유(大猷), 본관은 서흥(瑞興)이다. 점필재 김종직의 문하에서 《소학》을 읽고 스스로 '소학동자'라고 일컬었다. 1480년(성종11) 사마시에 합격, 1494년(성종25) 행의(行誼)로 천거되어 남부 참봉이 된 후 군자감 주부, 감찰 등을 역임했다.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로 인하여 희천(熙川)과 순천(順天)으로 유배되고 1504년(연산군10) 갑자사화에 사사(賜死)되었다. 관련 자료로는 《경현록(景賢錄)》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주석 10)일두(一蠹)
정여창(1450~1504)의 호이다. 자는 백욱(伯勗), 본관은 하동(河東)이다. 김종직의 문인이다.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가 일어나 파직되어 종성(鍾城)에 유배되었고, 1504년에 사망한 뒤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저서로는 《일두유집(一蠹遺集)》이 있다.
주석 11)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의 호이다. 자는 계운(季雲), 다른 호는 소미산인(少微山人),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1486년(성종17)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주로 언관에 재직하면서 훈구파를 공격하고 사림파의 중앙 정계 진출을 적극 도왔다. 1498년 무오사화에서 조의제문(弔義帝文)의 사초화(史草化) 및 소릉 복위 상소 등 일련의 일 때문에 능지처참을 당했다. 저서로는 《탁영집》이 있다.
주석 12)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1454~1492)의 호이다.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자는 백공(伯恭), 다른 호는 행우(杏雨),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어려서 사육신의 충성을 보고, 벼슬할 생각을 버리고 각지를 유랑하다가 병사하였다. 소릉(昭陵 문종의 비 권씨의 능) 복위를 상소한 일이 있다 하여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 당했으나, 중종이 좌승지에 추증하고, 숙종 때에는 함안(咸安)의 서산서원(西山書院)에 다른 생육신과 함께 배향되었으며, 정종(正宗) 때에는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추강집》이 있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주석 13)희희양양(熙熙穰穰)
이익 추구를 위해 시끄럽고 번잡하게 오가는 모습을 형용한 말인데, 여기서는 세월이 지나간다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사기》 권129 〈화식열전(貨殖列傳)〉에 "천하가 희희함은 모두 이익을 위해 오는 것이요, 천하가 양양함은 모두 이익을 위해 가는 것이다.[天下熙熙, 皆爲利來, 天下壤壤, 皆爲利往.]"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양(穰)과 양(壤)은 통용이다.
주석 14)지석강(支石江)
전라남도 화순군에 있는 강이다.
주석 15)해망산(海望山)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에 있는 산이다.
주석 16)와력(瓦礫)
부서진 기와나 벽돌 조각으로, 쓸모없거나 하찮은 것을 비유한다.
주석 17)저력(樗櫟)
가죽나무와 상수리나무를 말하는데, 이 나무들은 재목이 될 수 없는 쓸모없는 나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遯齋集跋
湖南文獻之地。先進長德可師慕者。磊落相望。若吾鄕故持平遯齋鄭先生。亦其人也。先生早師金佔畢齋寒暄一蠹濯纓秋江諸賢。爲道義交。此是東方淵源一條正脈也。其口傳心授。眞詮要訣。必有流傳於鄕井庠塾襟紳章掖之間。而熙往穰來。聲韻愈邈。惟支石淸風。海望明月。依然於杖屨之所。而令人有想像不盡之感。昔在癸亥之年。後孫諸公。收拾詩賦記文若干篇於舊篋散紙中。刻之棗梨。行之于世。旣而後孫在洪在禹禹鉉。以當日之役。或不無考校未精之歎。於是更加證訂而潤色之。重行釐刊。以爲傳遠之計。嗚乎。此其爲書。零星寂寥。有不足以發明先生平日之蘊。然擧一鉤而知良金之非瓦礫。折一枝而知丹桂之非樗櫟。此可以慰鄕人士追想萬一之意云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