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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헌기(瑞軒記)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4 / 기(記)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4.0001.TXT.0042
서헌기
남쪽 지방의 산 가운데 혹 서석산(瑞石山)주 119)보다 큰 것이 있겠지만 그 모습의 단엄(端嚴)함과 기상의 명수(明秀)함은 마치 대인 장자(大人長者)가 높이 공수하여 우두커니 서 있음에 사람으로 하여금 우러러 공경하여 감히 태만하지 못하게 하는 것 같은 것은 서석산이 실로 제일이다. 옛날 우리 노사 선생(蘆沙先生)주 120)께서 이 산을 가장 사랑하여 소싯적에 유람해 보았고 만년에 마주보이는 곳에 집을 지어 조석으로 바라보았으니, 대개 천지의 정대한 기상은 사람과 산이 차이가 없다.
오호라! 하늘이 돌보지 않아 태산이 이미 무너졌으니, 뒤에 태어나 늦게 배운 사람이 갈팡질팡하여 귀의할 곳이 없는데, 당시 첨앙하던 마음을 깃들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서석산만 존재하네. 돌아보건대 이 비천한 목숨이 유랑하다 궁벽한 곳에 머물러 노쇠함과 병이 침범하여 문을 닫고 세상을 사절하다보니, 드디어 이 산과 아울러 모두 잃게 되었다.
안군(安君) 공삼(公三)주 121)은 상서로운 사람이다. 이 산의 끝에 살면서 이 산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어 그 전 면목을 안석과 뜰 사이에 드러내지 않음이 없게 하였고, 심지어 기거하며 출입하고 주선하며 돌아보는 사이에도 단엄 명수한 기상이 아님이 없으니, 이 헌(軒)이 서(瑞)가 되는 이유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숭악(崧岳)의 준천(峻天)은 길보(吉甫)를 찬미하기 위한 것주 122)이고, 태산(泰山)의 암암(巖巖)함은 자여(子輿)를 찬미하기 위한 것주 123)이네. 군은 비록 선생의 문하에서 배우지 못하였지만 또한 선생의 문도라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 산을 보고 뒤미처 상상함에 광감(曠感)주 124)한 마음이 없겠는가. 선생께서 사랑하시던 것을 사랑하고 선생께서 마주하시던 것을 마주하면 그 기상과 체덕(體德)이 말씀으로 가르치던 것 보다 친절한 것이 어찌 문하에서 직접 배운 사람들의 뒤에 있겠는가. 군은 그칠 곳을 알았다고 이를 만하네. 내 비록 병들었지만 장차 한번 행차를 준비하여 그대를 따라 서헌에 올라 늦게 태어나 사모하면서도 우러르지 못한 무궁한 회포를 위안 받으려 하네.
주석 119)서석산(瑞石山)
무등산(無等山)을 말한다. 호남정맥의 중심 산줄기이자, 광주광역시와 전라남도의 진산이다. 소백산맥에 솟아 있으며, 산세가 웅대해 성산으로 알려져 있다. 백제 때는 무진악, 신라 때는 무악, 고려 때는 서석산, 그밖에 무정산·무당산·무덕산 등으로도 불렸다.
주석 120)우리 노사 선생(蘆沙先生)
정의림의 스승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을 말한다. 초명은 금사(金賜), 자는 대중(大中), 호는 노사(蘆沙),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서경덕, 이황, 이이, 임성주, 이진상과 함께 성리학의 6대가(六大家)로 꼽힌다. 저서로는 《노사집》이 있다.
주석 121)안군(安君) 공삼(公三)
안규용(安圭容, 1860~1910)을 말한다. 자는 공삼, 호는 서헌(瑞軒), 본관은 죽산(竹山)이다.
주석 122)숭악(崧岳)의……것
《시경》 〈대아(大雅) 숭고(崧高)〉에 "높고 높은 산악이 치솟아 하늘에 이르도다. 산악이 신을 내려 보와 신을 낳았도다.[崧高維嶽, 駿極于天. 維嶽降神, 生甫及申.]"라고 한 것을 말한다. 이 시는 선왕(宣王)의 외숙인 신백(申伯)이 나가 사읍(謝邑)에 봉해지자 윤길보(尹吉甫)가 시(詩)를 지어 그를 전송한 것이다. 길보를 찬미한 것이라는 것은 오류로 보인다.
주석 123)태산(泰山)의……것
《근사록》 권14 〈관성현(觀聖賢)〉에서 정자(程子)가 "공자는 천지와 같고, 안자는 온화한 바람, 상서로운 구름과 같으며, 맹자는 태산에 바위가 중첩하듯 우뚝한 기상이다.[仲尼天地也, 顔子和風慶雲也, 孟子泰山巖巖之氣象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자여(子輿)는 맹자의 자이다.
주석 124)광감(曠感)
광세지감(曠世之感)의 준말로, 같은 시대에 태어나지 못해 서로 만나지 못한 것에 대한 감회이다.
瑞軒記
南方之山。或有大於瑞石者。而若其體容端嚴。氣象明秀。如大人長者。高拱凝立。使人仰止而不敢慢焉。則瑞石固第一也。昔我蘆沙先生。最愛此山。少時杖屨及焉。晚年築室相對之地。朝夕贍望。盖天地正大之氣。人與山不異也。鳴乎。昊天不弔。泰山已頹。後生晚進。倀倀靡歸。而可以寓當日瞻仰之餘者。惟是瑞石獨存。顧此賤命。流泊僻左。衰病侵尋。杜門謝世。遂幷與此山而失之。安君公三瑞人也。居山之趾。而對山之面。使其全幅無不呈露於几席庭。石之間。以至起居出入。周旋顧眄。無非是端嚴明秀之象。此軒之所以爲瑞者歟。然崧岳峻天。所以美吉甫也。泰山巖巖。所以贊子輿也。君雖不及先生之門。亦不可謂非先生之徒。則見此山而豈無追想曠感者乎。愛先生之所愛。對先生之所對。其氣象體德。所以親切於言語之外者。豈惟不在於及門者之後而已哉。君可謂知所止矣。吾雖病。將一理巾屐。從子登軒。以慰晚慕靡仰無窮之懷云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