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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4
  • 기(記)
  • 만취헌기(晚翠軒訣)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4 / 기(記)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4.0001.TXT.0030
만취헌기
천하의 식물들은 똑같지만, 그 종류에 따라 품평하여 등급을 나눈다면 하루 이틀의 봄기운을 받은 것도 있고, 한두 달의 봄기운을 받은 것도 있어 그 등급이 혹 서로 두 배나 다섯 배가 되기도 하고 혹 서로 열 배나 백 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욕수(蓐收)주 71)가 절기를 살피고 매서운 서리가 한껏 맹위를 떨치는 때에 이르게 되면 저 빽빽하게 숲을 이루었던 식물들은 시름시름 빛을 잃어가고, 꺾이듯 생기를 잃어간다. 이러한 시기에 한 때의 위세에 뜻을 빼앗기지 않고, 큰 동요에 절개를 바꾸지 않은 채 울울창창하여 우뚝하게 자신을 지키는 것은 과연 어떤 식물인가? 아, 세한(歲寒)에 대한 우리 부자의 탄식주 72)이 사람으로 하여금 천년이 지나도록 다 사라지지 않는 뜻을 갖게 한다.
대저 절개는 혹 만년에 변하기도 하고, 행실은 혹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폐해지기도 하며, 일은 혹 마지막에 실패하기도 하니, 이것은 사람들이 똑같이 근심하는 것이다. 더욱이 위급하거나 급박한 때에 헤아릴 수 없는 재앙으로 겁박한다면 의기소침하여 굴복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주 선생(朱先生)이 말하기를, "만약 진실로 깨달음이 있어 참되게 공부한 것이 있다면 쇠로 만든 바퀴가 머리 위에서 빙글빙글 돌더라도 또한 어찌 다른 곳으로 움직일 수 있겠는가."
하였고, 또 말하기를, "평소 한가한 때에 절차탁마하여 담금질하고 단련하더라도 위급한 때에 힘쓰기 어려운데, 하물며 한가로이 담소나 나누고 무리지어 논쟁이나 하면서 무르고 연약한 생활에 길들여진 사람임에랴."
하였으니, 이 말은 부자의 탄식을 드러내 밝혀서 한 해의 정경이 추워지기 전에 미리 수양하게 한 것이다.
나의 벗 만취자(晚翠子)는 어렸을 때나 장성했을 때나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깊었으며, 늙어서도 학문을 좋아하여 그 고상한 뜻과 법도 있는 풍모가 충분히 믿을 만한데도 오히려 부족하게 여기며 미치지 못할까 염려하여 '만취(晚翠)' 두 글자를 문미에 표시해 두고 늘 바라보았다. 이는 선성(先聖)과 선사(先師)가 드러내 탄미했던 은미하고 깊은 뜻을 알고서 오늘날 궁구해야 할 결말에 적합한 뜻을 얻었다고 이를 만하니, 세상을 살아가는 길에서 만나는 것이 비록 지극히 덧없다 하더라도 나의 법을 행하고 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어찌 여유롭지 않겠는가.
나는 갯버들처럼 잔약한 자질로 항상 가을 기운만 바라봐도 시들어 버리는 것에 대한 경계가 절실하였으니, 만취자에게 버림을 당하지 않아서 겨우살이나 덩굴 식물이 소나무와 잣나무에 의지하는 것처럼 풍상의 만분의 일이나마 비호를 받기를 바랄 뿐이다.
주석 71)욕수(蓐收)
고대 전설 속에 나오는 서방(西方)의 신(神)으로, 가을의 숙살지기(肅殺之氣)를 주관한다. 소호(少皥) 혹은 금신(金神)이라고도 한다. 《禮記 卷5 月令》
주석 72)세한(歲寒)에……탄식
《논어》 〈자한(子罕)〉에서 공자가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늦게 시듦을 알 수 있다.[歲寒, 然後知松柏之後凋也.]"라고 말하여 혼란한 세상이나 곤궁한 때를 당하여야 군자의 변치 않는 절개를 볼 수 있다고 탄식한 것을 말한다.
晚翠軒訣
天下之植物一也。然以其彙類而品第之。則有得一日二日之春者。有得一月二月之春者。或相倍蓰。或相什佰。而至於蓐收按節。嚴霜肆威。則彼林林叢叢。無不苶然而失色。摧然而喪氣矣。于斯時也。不爲時威所奪。不爲衆撓所移。而欝欝蒼蒼。挻然自守者果。何物也。噫。吾夫子歲寒之歎。令人有千載不盡之意。夫節或移於晚。行或廢於久。事或失於終。此人之所同患也。況在顚沛急遽之際。而劫之以不測之禍。其有不銷屈者乎。朱先生曰。若使眞有所見。實有下功夫處。則便有鈇輪。頂上轉旋。如何動得他。又曰。平居暇日。琢磨淬礪。緩急之際。未易爲力。況游談聚議習爲軟熟者乎。此語是發明夫子之嘆。使之豫養於歲色未寒之前也。余友晚翠子。幼壯孝悌。老而好學。其志尚風儀。有足可恃。而猶且歉斂然。恐其不及。以晚翠二字。標諸楣而常目。可謂知先聖先師發歎微奥之旨。而得今日着題究竟之義也。世路遭遇雖極無常。而所以行吾法遂吾志者。豈不綽綽然耶。佘以蒲柳殘質。常切望秋之戒。企見不棄於晚翠子。如蔦蘿之依松柏而得庇風霜之萬一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