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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4
  • 기(記)
  • 만오당기(晩悟堂記)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4 / 기(記)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4.0001.TXT.0020
만오당기
상지(上智)는 깨달을 것이 없고, 하우(下愚)는 깨닫지 못한다. 깨닫는 자는 오직 중품(中品)의 자질뿐이다. 대체로 미혹한 바가 있지 않으면 어찌 깨달음이 있을 수 있겠으며, 남다른 자질이 있지 않으면 어찌 깨달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깨달음에는 크고 작음이 있다. 목소리에 드러나고 얼굴빛에 징험되어 한 가지 일에서 깨닫는 경우가 있고, 앞에서 징계되고 뒤에 삼가서 한 때에 깨닫는 경우가 있다. 한 가지 일에서 깨달았다고 해서 다른 일에도 반드시 그렇게 되지는 않고, 한 때에 깨달았다고 해서 다른 때에도 반드시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오직 탈연(脫然)히 깊은 잠에서 깨어나듯 각성할 수 있고, 황연(惶然)히 봉사가 눈을 뜨듯 볼 수 있어야 안정되고 견고하게 지켜 넓게 펼쳐 나아갈 수 있다. 모르겠지만, 주인이 깨달은 바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인가?
듣기에 주인은 54세에 비로소 깨달은 바가 있었다고 하였는데, 반드시 갖은 고생을 두루 맛보고 온갖 풍상을 실컷 겪은 다음에 뜬 생각이 사라지고 참된 마음이 드러나는 것이 마치 거듭 닦은 거울이 번연(幡然)히 묵은 때가 제거된 것과 같을 것이다. 두텁게 축적한 뒤에 드러나는 것은 그 드러남이 반드시 두텁고, 오랜 막힘 뒤에 통창하는 것은 그 통창함이 반드시 오래가며, 큰소리는 반드시 촉박하지 않고, 큰 걸음은 반드시 좁지 않을 것이니, 나는 주인의 깨달음이 앞으로 여생의 결말이 되어 절대로 한 가지 일이나 한 때의 깨달음에 비견될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아, 나는 주인이 깨달음이 있었던 나이보다 한 살이 더 많음에도 오히려 예전과 같이 흐리멍덩하니, 끝내 깨닫지 못할 것임을 알 수 있다. 어찌하면 쇠잔한 힘을 채찍질하고 다스려서 주인의 뒤를 좇아 상유(桑楡)주 49)에 만분의 일이나마 깨달을 수 있을까? 이것이 바라는 바이다.
주석 49)상유(桑楡)
뽕나무와 느릅나무라는 뜻으로, 해가 떨어질 때 빛이 뽕나무와 느릅나무의 가지 끝에 걸린다고 하여 인생의 만년을 비유한다. 《회남자(淮南子)》에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져 그림자가 나무 끝에 있는 것을 상유라 한다." 하였다.
晩悟堂記
上知無悟。下愚不悟。悟之者。其惟中品之資乎。蓋不有所迷。何以有悟。不有所異。何以能悟。然悟有大有小。發於聲。徵於色。而有悟於一事者。懲於前。毖於後。而有悟於一時者。悟於一事者。他事未必然。悟於一時者。他時未必然。惟脫然如熟寐之得惺。怳然如蒙瞽之得視。可以守定得固。展拓將去。未知主人所悟。果何居耶。聞主人以五十有四之歲。而始有所悟。必其備喫辛苦。飽經風霜。而浮念消歇。眞心呈露。如重磨之鑑。幡然而祛塵也。發於厚積之餘者。其發必厚。暢於久鬱之後者。其暢必久。大音必不促迫。闊步必不窄挾。吾知主人之悟。將爲餘日之究竟。切非一事一時之比。嗚乎。余於主人。有悟之年。加有一歲。而尙懵然如故。其終不悟。可知也已。安得策理殘力。追從主人之後。庶幾乎桑楡萬一之悟也耶。是所望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