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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신재집(日新齋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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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하기(竹下記)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4 / 기(記)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4.0001.TXT.0014
죽하기
죽하옹(竹下翁)은 내가 약관(弱冠) 시절에 교분을 맺었던 옛 친구이다. 임술년(1862) 봄에 서울에서 만났고, 이로 인하여 서로 따르며 여러 날 즐겁게 정담을 나누었는데, 이윽고 각기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서 서로 만나지 못한 지 40년이 되었다. 임인년(1902) 가을에 옹이 일 때문에 영귀정(詠歸亭)에 와서 만났는데, 하얗게 센 귀밑머리와 수염이 다시 옛적에 마주했던 모습이 아닌지라 슬픔과 위로의 마음을 가눌 수 없었다. 그가 떠나면서 죽하기(竹下記)를 부탁하였는데, 모르겠지만, 옹의 뜻은 대나무에서 무엇을 취했을까?
예전 모두 묘령(妙齡 스무살 안팎)의 청춘으로 태평무사한 때에 한묵(翰墨)과 문예(文藝)의 장에서 함께 상종했던 것이 어제의 일처럼 역력한데 그 사이 시속이 변한 지난 세월 동안 겪어온 풍상이 몇 번이겠으며, 상전벽해가 몇 번이나 일어났겠는가? 옹은 풍도와 기상이 시종 엄격하여 병들고 쇠약해진 때에 이르러서도 병을 무릅쓰고 도보로 다니면서 무고를 밝히고 도를 지키는 의론을 창도하였으니, 이른바 '세한후조(歲寒後凋)주 34)'라는 말이 이를 이른 것이 아니겠는가. 다만 옹의 뜻은 여기에 있지 않을 것이다. 바로 나이와 정력이 더욱 들어가고 쇠약해질수록 오래전부터 품어왔던 마음이 바뀌기 쉽고, 세상의 변고가 끝이 없을수록 명예와 절개를 지키기 어렵기 때문에 이러한 때에 이러한 마음이 단청처럼 밝게 빛나니, 이 때문에 차군(此君)주 35)에 붙여서 마지막 자정(自靖)의 도주 36)로 여겼을 것이다. 이전에 이미 그러함이 이와 같았다면 이후에도 장차 그러할 것임을 따라서 알 수 있는데, 더욱이 절차탁마하여 날로 대나무와 같은 푸른 기상으로 나아가고, 또 위 무공(衛武公)주 37)처럼 늙어서도 나태하지 않는 자임에랴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나는 가죽나무나 참나무처럼 졸렬한 품질이어서 비록 애석하게 여길 것이 없을지라도 단풍나무에 뻗어 있는 덩굴이나 겨우살이처럼 남아있는 풍교에 의지하여 스스로 뿌리를 내릴 수 있기를 바라는데, 모르겠지만 기꺼이 허락해 줄 수 있겠는가 없겠는가?
주석 34)세한후조(歲寒後凋)
날씨가 추워진 뒤에 시든다는 뜻으로, 군자의 절개는 어려움을 당한 뒤에야 알 수 있음을 비유한다. 《논어》 〈자한(子罕)〉의 "날씨가 추워진 다음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알았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也.]"라는 구절에서 유래하였다.
주석 35)차군(此君)
대나무를 가리키는 말이다. 진(晉)나라 왕휘지(王徽之)가 남의 빈 집에 잠시 거처할 동안에도 사람들에게 대나무를 빨리 심도록 다그쳤는데, 그 이유를 묻자 "하루라도 이 군이 없을 수 있겠는가?[何可一日無此君.]"라고 대답한 데서 유래하였다.
주석 36)자정(自靖)의 도
자신의 분수에 맞게 처신하는 것을 편안하게 여기는 것을 말한다. 《서경》 〈미자(微子)〉에서 은(殷)나라의 태사(太師) 기자(箕子)가 주(紂)의 서형(庶兄) 미자에게 "자신의 분수에 맞게 처신하는 것을 편안하게 여겨 사람마다 선왕에게 그 뜻을 바칠지니, 나는 떠나가 은둔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있다.[自靖, 人自獻于先王, 我不顧行遯.]"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주석 37)위 무공(衛武公)
춘추 시대에 위(衛)나라의 제후로, 무공은 그의 시호이다. 그는 나이 95세 때에 조정에 포고문을 내려 "모든 벼슬하는 사람은 내가 늙었다고 여기지 말고 번갈아 나를 규간(規諫)하라."고 하면서 거처하는 곳마다 나태함을 경계하는 말을 붙였고, 또 〈억(抑)〉 시를 지어 날마다 곁에서 외우게 함으로써 스스로를 경계하였다고 한다. 《詩經 大雅 抑》 《國語 楚語上》
竹下記
竹下翁余弱冠舊契也。壬戌春。邂逅漢師。因以追從。數日款洽。旣而各還其家。不相見爲四十年。壬寅秋。翁以事來會于詠歸亭。皤然鬚髮。非復昔時相對。悲慰有不勝情。其發也。以竹下記託焉。未知翁之意何取乎竹也。曩也。俱以靑春妙齡。在昇平無事之時。與之相從於翰墨文藝之場。歷歷如昨日。而時變世劫之經過於其間者。爲幾番風霜。幾番滄桑也。翁風裁標致。終始彌礪。至於癃疾衰境。力疾徒步。以倡辨誣衛道之論。所謂歲寒後凋。非是之謂歟。但翁之意。則有不在是。正以年力愈邁。宿心易替。世變無窮。名節難保。此日此心。炳炳如丹。所以寓諸此君。視爲究竟自靖之道耳。已然於前者如是。則將然於後者。從可知矣。況切磋琢磨。日臻乎綠猗。又有如衛武公老而不怠者乎。余樗櫟劣品也雖不足惜而願得庇倚餘風以自植之如蔦蘿之施楓。未知以爲肯可否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