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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4
  • 기(記)
  • 우헌기(愚軒記)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4 / 기(記)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4.0001.TXT.0006
우헌기
윤생 상린(尹生相麟)이 나를 따라 공부한 지 몇 해 되었는데, 하루는 천태산(天台山)의 내 거처를 방문하여 나에게 말하기를, "가친(家親)께서는 일찍이 별호(別號)를 자처하신 적이 없으셨는데, 이처럼 노년에 이르러 문을 닫고 매우 적막하게 지내시는 때에 도리어 헌(軒)에 '우(愚)'를 표제(標題)하시고 친구들의 시를 얻을 때마다 아침저녁으로 읊조리며 마음을 달래는 바탕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친구 중에 가친의 마음을 아시는 분은 오직 어르신만이 계실 뿐이니, 바라건대 어르신께서 알고 계신 것을 따라 표제하신 뜻에 대해 약간의 말을 서술하여 옛사람이 그림을 가져다드린 것주 15)처럼 돌아가 가친께 바친다면 안색을 풀어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니, 내가 말하였다. "군의 가친께서는 젊고 장성했을 때에는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으셨으며, 노년이 되어서는 도의를 좋아하셨기에 아름다운 명성이 고을에 드러나 어진 사람으로 추대하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 어찌 굳이 어리석음을 자처하여 표방할 필요가 있겠는가. 사람들이 이미 어질게 여기는데 스스로 어질게 여기지 않고, 사람들이 어리석게 여기지 않는데 도리어 스스로 어리석다고 하는 것이 비록 겸손하고자 한 것일지라도 어느 누가 믿겠는가. 다만 평소에 실속이 없이 겉만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고, 밖으로 드러내는 것을 일삼지 않으셨으며, 명성이나 권세를 쫓는 길에서 내달리지 않으셨고, 시비를 다투는 장소에서 오르내리지 않으시면서 분수에 따라 졸렬함을 지킨 채 한결같은 모습으로 노년에 이르셨으니, 헌(軒)의 호를 취한 뜻이 혹 여기에 있을 것이네. 비록 이러한 것을 어리석게 여길지라도 사람들이 어질게 여기는 것이 또한 어찌 일찍이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반드시 나이가 더욱 많아질수록 지식과 생각이 더욱 정밀해지면서 몸을 드러내고 감추는 것과 말을 위험스럽게 하고 겸손하게 하는 것에 이르러 때에 따라 더욱 삼가지 않을 수 없어 그 끝맺음을 도모하는 계책으로 삼은 것이 진실로 여기에 있을 것이네. 그렇다면 이 어리석음이 어찌 옛적에 이른바 '미칠 수 없다.'주 16)는 것이 아니겠는가. 부친의 가르침을 받들 때에 시험 삼아 이러한 뜻으로 받들어 질정한다면 반드시 나의 뜻이 아니라고는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되네."라고 하였다.
주석 15)옛사람이……것
북송 때의 문인 소순(蘇洵, 1009~1066)의 〈사보살각기(四菩薩閣記)〉에 "본디 나의 선친께서는 물건에 있어서 좋아하는 것이 없었고, 평소의 생활도 재계하듯 하시고, 말씀하시고 웃으시는 것도 꼭 필요할 때에 맞게 하셨는데, 다만 일찍부터 그림을 좋아하셨다. 자제와 문인들이 기쁘게 해드릴 만한 것이 없는지라 그 좋아하시는 그림을 서로 가져와 한 번이라도 선친의 얼굴을 펴시기를 바라였다. 그래서 비록 평민의 신분이었으나 모아진 그림이 공경들처럼 많았다.[始吾先君, 於物無所好, 燕居如齋, 言笑有時, 顧嘗嗜畫. 弟子門人, 無以悦之, 則爭致其所嗜, 庶幾一解其顔. 故雖為布衣, 而致畫與公卿等.]"라는 구절에서 인용한 말이다. 《古文眞寶後》
주석 16)미칠……없다
《논어》 〈공야장(公冶長)〉에서 공자가 춘추 시대 위(衛)나라 대부 영무자(寧武子)를 칭송한 말이다. 위나라 성공(成公)이 무도하여 나라를 잃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남들은 다 그 어려운 상황을 회피했으나 영무자는 위험을 무릅쓰고 힘을 다해 이를 구하여 마침내 자신도 온전히 하고 임금도 구제했는데, 공자가 이를 두고 "나라에 도가 있으면 지혜롭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어리석었으니, 그 지혜로움은 미칠 수 있었거니와 그 어리석음은 미칠 수 없다.[邦有道則知, 邦無道則愚, 其知可及也, 其愚不可及也.]"라고 하였다.
愚軒記
尹生相麟。從余遊有年。一日過天台寓舍。告余曰。家親未嘗以別號自居。及此衰暮。閉門苦寂。乃題軒以愚。隨得知舊詩和。爲日夕諷詠遣懷之資。然在知舊。知家親心者。惟丈人在。願從丈人所。得序述所題之意若干語。歸以供親。如古人致畵。而庶幾解顔也。余曰。君之家嚴。少壯孝悌。老而好義。令聞著於鄕坊。未有不以賢人推之。則何必以愚自處而至此標爲也。人旣賢之。而不自賢焉。人不愚之。而乃自愚焉。雖欲謙謙。其孰信之。但其平日。不喜浮華。不事表襮。不馳逐於聲勢之途。不上下於是非之場。任分守拙。一昧到老。軒之取號。其或在是歟。雖欲以此爲愚。而人之賢之。又何嘗不在於此耶。必其年齡益邵。知慮益精。至於身之顯晦。言之危遜。不能不隨時加謹而爲圖維厥終之計者。亶在於是。然則是愚也。豈非古所謂不可及者耶。趨庭之日。試以此意奉質焉。想必不以爲非我意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