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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4
  • 기(記)
  • 우인당기(愚忍堂記)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4 / 기(記)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4.0001.TXT.0005
우인당기
박 사문(朴斯文) 학중(學中)은 천태산(天台山) 사람이다. 내가 젊었을 때에 여관에서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 풍모와 거동이 단지 순박하고 예스럽게 보일 뿐이었다. 어느덧 서로 만나지 못한 지 20년이 되었는데, 훌륭한 명성이 선비와 벗들 사이에 드러났다. 평상시에 우러러 사모하면서 어떻게 수양했기에 이런 명성을 얻게 되었을까 생각하였다. 정해년(1887) 봄에 비로소 그의 집에 가서 보건대, 뜰과 책상, 창문 등은 말끔하게 먼지 한 점이 없었고, 주인은 날마다 평상복 차림으로 그 사이에서 우두커니 있었으며, 지란(芝蘭)과 옥수(玉樹) 같은 자제들은 향기로운 목소리로 나란히 서서 곁에서 모시고 있었으니, 그 몸가짐이나 행실의 실제가 또한 들었던 것보다 뛰어났다. 내가 옷깃을 여미게 할 만큼 경탄스러운 마음을 금치 못하고 주인에게 근래에 무슨 공부를 하고 있는지 물으니, 주인이 말하기를, "나는 노둔하고 꽉 막힌 재질로, 눈으로는 흑백(黑白)의 색을 알지 못하고, 귀로는 궁상(宮商)의 음률을 구분하지 못하며, 마음으로는 시비(是非)를 이해하지 못하니, 그 어리석음이 어느 누가 나와 같겠습니까. 어리석으면서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을 참을 수 없다면 모든 행위가 아무것도 모른 채 제멋대로 하는 것들이 아닌 것이 없게 되어 날마다 허물을 향해 달려갈 뿐일 것입니다. 이 때문에 10여 년 이래로 통렬하게 스스로를 점검하여 세속의 맛, 예컨대 분노나 욕망, 폄훼, 명예, 재촉, 부탁, 분주함, 다툼 따위를 일체 끊어 버리고 감히 마음에서 싹틔워 입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였으며, 분수를 따르고 역량을 헤아려 서책에 종사하며 허물이 적기를 바랐지만, 심지가 견고하지 못해 다시 풍부(馮婦)가 팔뚝을 걷어붙이는 일주 13)이 있게 될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우인(愚忍)' 두 글자를 문미(門楣)에 걸어 놓고 항상 자신을 경계하는 바탕으로 삼았습니다." 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이와 같은 점이 있었군요. 선생의 어리석음이여!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학문에는 어리석고 자신의 인격 수양을 위한 학문에는 지혜로우며, 오늘날 세상에 대처하는 데는 어리석고 옛것을 배우는 데는 지혜로우며, 명성과 이익에는 어리석고 도의(道義)에는 지혜로우니, 이른바 '그 어리석음은 미칠 수 없다.'주 14)라는 것입니다. 맹자가 말하기를, '하지 않는 것이 있는 뒤에 행함이 있을 수 있다.'라고 하였으니, 어두운 가운데 날로 드러나는 것이 당연합니다. 아, 내가 지금 쇠약해졌지만, 다소의 일을 돌려보내고 선생을 따라 소요하며 이 생애를 마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주석 13)풍부(馮婦)가……일
이전의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되풀이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풍부는 진(晉)나라 사람으로, 맨손으로 범을 잘 잡았으나 이 일이 광포한 행위임을 깨닫고 선비가 되었는데, 어느 날 들판에 나갔다가 사람들이 호랑이를 모퉁이에 몰아넣고 감히 잡지 못하는 것을 보고 다시금 팔뚝을 걷어붙이고 수레에서 내려오니, 사람들은 모두들 기뻐했지만, 선비들은 비웃었다는 고사가 《맹자》 진심 하(盡心下)에 나온다.
주석 14)그……없다
《논어》 〈공야장(公冶長)〉에서 공자가 춘추 시대 위(衛)나라 대부 영무자(寧武子)를 칭송한 말이다. 위나라 성공(成公)이 무도하여 나라를 잃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남들은 다 그 어려운 상황을 회피했으나 영무자는 위험을 무릅쓰고 힘을 다해 이를 구하여 마침내 자신도 온전히 하고 임금도 구제했는데, 공자가 이를 두고 "나라에 도가 있으면 지혜롭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어리석었으니, 그 지혜로움은 미칠 수 있었거니와 그 어리석음은 미칠 수 없다.[邦有道則知, 邦無道則愚, 其知可及也, 其愚不可及也.]"라고 하였다.
愚忍堂記
朴斯文學中。天台山人也。予少時。遇於逆旅。但見其風儀淳古。已而不相見爲二十年。而令聞著於士友之間。尋常向慕。以爲何修而得此。丁亥春。始造其門。見庭除几牑。灑然無一點塵累。而主人日以便服。嗒然其間。蘭玉芳聲。濟濟侍側。其持守操履之實。又有浮於所聞。予不勝斂衽。問主人近來作甚工夫。主人曰。予以鈍滯之質。目不知皀白。耳不分宮商。心不解是非。其爲愚。孰如我者。愚而自用。不有以忍之。則凡百所爲。無非無知妄作。日趨於愆尤而已。是以十餘年來。痛自點檢。一切世味。如忿慾毁譽趨託奔競之類。不敢萌諸心而出諸口。隨分量力。從事簡編。庶幾寡過。而但心地不固。恐復有憑婦揚臂之擧。故以愚忍二字。揭諸楣。以爲常常自警之資也。予曰有是哉。子之愚也.愚於爲人而智於爲己。愚於處今而智於學古。愚於聲利而智於道義。所謂其愚不可及也。孟子曰有所不爲而後。可以有爲。宜其闇然而日章也。嗚乎。予今衰矣。願還多少事。從子逍遙以畢此生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