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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신재집(日新齋集)
  • 일신재집 권13
  • 서(序)
  • 《산남 김공 진의록》 서문(山南金公振義錄序)

일신재집(日新齋集) / 일신재집 권13 / 서(序)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3.0002.TXT.0009
《산남 김공 진의록》 서문
대장부의 평소 포부는 똑같지만, 그 사적과 공적은 성공과 실패, 드러남과 감추어짐 등의 차이가 있으니, 평소의 포부가 이미 바르다면 비록 조그만 공효가 없다 하더라도 충분히 숭상할 만한 점이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비록 남들보다 뛰어난 불세출의 공적이 있다 하더라도 취하지 않는 바가 있다.
산남(山南) 김공(金公)은 우리 고을의 선배이다. 신장이 9척에 이르고, 근력이 남보다 훨씬 뛰어났으며, 품은 뜻이 강개하고 우뚝하여 천만 명이라도 내가 가서 대적할 수 있다는 기상이 있었다. 그의 학문은 기억하고 암송하는 세속 선비들의 관습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고, 사물의 이치에 해박하고 세상일에 통달하였으며, 산수와 말타기, 활쏘기, 진(陣)을 펴고 수레를 모는 등의 방법에 이르러서도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병인년(1866)에 서양의 추악한 무리들이 변란을 일으켰을 때에, 공이 개연히 스스로 분발(奮發)하여 말하기를, "평소에 배운 것을 여기 말고 어디에 쓰겠는가." 하고 마침내 격문(檄文)을 써서 의병을 일으킬 것을 알렸다. 이에 고을의 자제들 중 풍문을 듣고 모집에 응한 자들이 끊이지 않으며 구름처럼 모여들었고, 활과 창, 갑옷, 양식이 바로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 훈련을 하고 기강과 군율을 세운 뒤에 출군(出軍)할 날을 잡았으나 적들의 변란이 평정되어 미쳐 공적을 이루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아, 당(唐)나라의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주 89)은 한 지역을 지키는 관리였고, 우리나라의 건재(健齋)주 90)와 여러 공들의 경우에는 비록 몸은 초야에 있었지만, 이름은 조정의 반열에 있었다. 그런데 공과 같은 경우에는 한 지역을 지키는 관리도 아니었으며, 조정의 반열에 있는 사람도 아니었고, 단지 산남의 일개 벼슬하지 않은 선비일 뿐이었다. 하지만 정의로운 외침이 한번 나오자 떨쳐 일어나 모집에 응한 자들이 사방에서 이르렀고, 기약한 월일을 알리지 않았음에도 온갖 일을 맡을 사람들이 저절로 모여들었다. 만약 평소 의로운 행실이 진중하여 다른 사람을 감복시킬 수 없었다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었겠는가. 이것으로 보건대 비록 공적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명성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의 평소 바른 포부만큼은 단연코 숨길 수 없는 점이 있었다.
의로움을 지키는 자는 일에 임하여 반드시 이익을 바라보지 않고, 공변됨을 유지하는 자는 난리에 임하여 반드시 사심을 따르지 않으니, 만약 서양의 추악한 무리들이 조금만 항복을 늦추어 산남의 의로운 깃발이 심도(沁都 강화도(江華島))에 도착했다면 수양(睢陽)의 큰 승리와 진양(晉陽 진주(晉州))의 위대한 절개주 91)가 다만 공에게 있지 않았을 줄 어찌 알겠는가. 그렇다면 성공과 실패, 드러남과 감추어짐은 때와 만남에 관계된 것이고, 사람을 논하는 수단이 아닐 것이다.
내가 고을의 후배로 효상(爻象 형적(形跡))을 목격한 것만도 이미 30년간의 일이고, 당시 고을의 장로들이 지금은 모두 죽었지만, 오직 찬란한 풍도와 의리만큼은 역력하게 사람들에게 남아 있는지라 우러러 감복하는 나머지 삼가 약간의 말을 서술하여 외사씨(外史氏)주 92)가 취하기를 기다린다.
주석 89)장순(張巡)과 허원(許遠)
당(唐)나라 현종(玄宗) 때의 관리이다.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켜 일거에 장안(長安)과 낙양(洛陽)을 함락하자, 진원 현령(眞源縣令)인 장순과 수양 태수(睢陽太守)인 허원(許遠)이 함께 수양성(睢陽城)을 굳게 지키며 반란군을 수차례 격파하였으나, 구원병이 오지 않고 양식도 떨어져 마침내 성이 함락되면서 모두 사로잡혔으나 끝까지 적에게 굴복하지 않고 죽었다. 《新唐書 忠義列傳 張巡, 許遠》
주석 90)건재(健齋)
김천일(金千鎰, 1537~1593)의 호로,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경기ㆍ경상ㆍ전라ㆍ충청 4도에서 활약하였다. 진주성에서 성이 함락되자 아들 상건(象乾)과 함께 남강(南江)에 투신 자결하였다.
주석 91)수양(睢陽)의……절개
수양(睢陽)의 큰 승리는 안녹산(安祿山)의 난 때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이 소수의 부하들과 함께 수양성(睢陽城)에서 안녹산의 장수 윤자기(尹子奇)가 이끄는 대군을 막아 크게 격파한 일을 말한다. 진양(晉陽 진주(晉州))의 위대한 절개는 임진왜란 때 진주성(晉州城)에서 김천일(金千鎰)과 최경회(崔慶會), 황진(黃進) 등이 의병을 이끌고 왜병에 맞서 항거하다 성이 함락되자 남강(南江)에 투신 자결한 일을 말한다.
주석 92)외사씨(外史氏)
외방에 거주하면서 조정 이외의 외부에 관계된 사항을 기록하던 사관(史官)을 이른다.
山南金公振義錄序
大丈夫素抱一也。而其事功則有成敗隱顯之不同。素抱旣正。雖靡尺寸之效。有足可尙。不然。雖有絶人不世之功。有所不取。山南金公吾鄕先進也。身長九尺。膂力過人。懷慨磊落。有千萬人吾往之氣。其學不屑屑於俗儒記誦之習。而博於物理通於世故。至於算數騎射布陣行車之法。無不精通。丙寅洋醜之變。公慨然自奮曰。平生所學。捨此焉用。遂草檄文。喩以擧義。於是鄕子弟。聞風應募者。陸續雲集。弓弩戈戟。甲冑芻粮。無不立辦。錬習紀律。啓行有日。而賊變告平。未及有爲而止。嗚呼。唐之張許。守土者也。我朝之健齋諸公。雖身在草野。而名在朝班。至若公非守土非朝班。而只是山南一布衣耳。然而義聲一出。奮募四至。不喩期月。衆務自集。如非平日行義之重。有以素服於人。安能如此。此雖功未就名未著。而其素抱之正。斷然有不可掩者矣。守義者。臨事必不見利。持公者。臨亂必不徇私。若使洋醜少緩授首。而山南義旗。達於沁都。則安知睢陽大捷。晉陽偉節。獨不在於公乎。然則成敗隱顯。時也遇也。非所以論人也。余以鄕里後生。目擊爻象。已是三十年間事。當日鄕老。今皆殞沒。而惟有風義煒燁。歷歷在人。感仰之餘。謹述略干語。以待外史氏取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