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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신재집(日新齋集)
  • 일신재집 권13
  • 서(序)
  • 《양건당집》 서문(兩蹇堂集序)

일신재집(日新齋集) / 일신재집 권13 / 서(序)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3.0002.TXT.0006
《양건당집》 서문
삼가 생각건대 우리나라가 개국한 이래로 왜구의 변란으로 인한 재앙이 임진년보다 참혹한 적이 없었고, 충의로운 선비 또한 임진년보다 성대한 적이 없었다. 대체로 하늘이 기수(氣數)에 쫓겨 한 때 어지러운 운수가 없을 수 없지만, 어지러운 때에는 또 반드시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아 다스릴 인재를 배출하여 부지하게 하였다. 예컨대 방책을 정하고 임금을 호종한 백사(白沙) 이문충(李文忠)주 79)과, 구원병을 요청하고 화급한 일에 부응한 서천(西川) 정충익(鄭忠翼)주 80), 왜적을 토벌하고 전쟁에서 승리한 덕풍(德豊) 이충무(李忠武)주 81), 관리로서 지역을 지키다 순절한 천곡(泉谷) 송충렬(宋忠烈)주 82), 의병을 일으켜 충절을 세운 중봉(重峰) 조문렬(趙文烈)주 83) 등과 같은 분들이 모두 우뚝하여 좀처럼 세상에 나오지 않을 분들이었다.
지위는 낮지만 맡은 일이 많고, 녹봉은 적지만 일이 번다하게 많았던 분들의 경우에도 위아래로 오르내리며 일을 주선하고, 힘이 다하여 쓰러질 때까지 여기저기 출입하다 끝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절개를 다하였다. 양건당(兩蹇堂) 황공(黃公) 역시 그러한 사람이었으니, 어찌 선양(宣揚)되지 않은 명성과 지위나 공에게 걸맞지 않은 추증(追贈)과 포창(褒彰)으로 논할 수 있겠는가.
유묵(遺墨)이 흩어지고 없어져서 열에 하나도 남아 있지 않지만, 계사년(1893) 봄에 9세손 간(柬)이 그것을 가지고 천태산(天台山)의 집으로 나를 찾아와 교감의 일을 부탁하였다. 아, 나는 공에게 미생(彌甥 자매나 남매의 손자)이 된다. 이 때문에 어려서부터 선인(先人)을 모시는 곁에서 그분에 대한 실제 이야기를 들은 것이 자못 흥미진진하였는데, 어찌 어버이를 여의고 외로이 지낸 지 50년 만에 비로소 그분의 유고(遺稿)를 볼 수 있게 될 줄 알았겠는가. 또 간은 죽마고우로 총각 때에 헤어졌다가 머리가 하얗게 세서 서로 만나게 되었으니, 그 슬픔과 위로되는 마음이 또 어떠하겠는가?
평소 보고 들은 지식이 적어 생각이 좁고, 질병까지 더해져 정신과 근력을 수습해 끌어 올릴 수 없으니, 어찌 한 집안에서 후세에 길이 전할 일의 부탁을 담당할 수 있겠는가. 다만 정감이 지극한 바인지라 차마 고집스럽게 완전히 물리치지 못하였다. 이에 우선 문류(門類)를 나누어 한 책으로 정하여 돌려보내니, 원본과 대조하여 정밀하게 교정하고 극진하게 윤색하는 일은 담당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을 뿐이다.
주석 79)백사(白沙) 이문충(李文忠)
이항복(李恒福, 1556~1618)으로, 백사는 그의 호이고, 문충은 그의 시호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덕형(李德馨)과 함께 명나라에 구원병 요청을 건의하였고, 선조를 수행하여 의주(義州)까지 피난을 다녀와 호성 공신(扈聖功臣) 1등으로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주석 80)서천(西川) 정충익(鄭忠翼)
서천부원군(西川府院君) 정곤수(鄭崑壽, 1538~1602)로, 충익은 시호이다. 임진왜란 때 우승지에 올라 선조를 의주(義州)에 호종하고 진주사(陳奏使)로 명나라에 가서 구원병을 파견토록 했으며, 명나라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이 오자 영위사(迎慰使)로 그를 영접하는 한편, 평양에 머물러 있던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에게 서울의 수복을 재촉하는 등 국가의 최대 수난기에 탁월한 외교 수완을 발휘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항복(李恒福)과 함께 호성 공신(扈聖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주석 81)덕풍(德豊) 이충무(李忠武)
德豐府院君(德豐府院君) 이순신(李舜臣, 1545~1598)으로, 충무는 그의 시호이다. 임진왜란 때 삼도수군통제사로 수군을 이끌고 전투마다 승리를 거둬 왜군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주석 82)천곡(泉谷) 송충렬(宋忠烈)
송상현(宋象賢, 1551~1592)으로 천곡은 그의 호이고, 충렬(忠烈)은 그의 시호이다. 임진왜란 때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왜적에 맞서다 순절하였다.
주석 83)중봉 조문렬(重峰趙文烈)
조헌(趙憲, 1544~1592)으로, 중봉은 그의 호이고, 문렬은 그의 시호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沃川)에서 의병 1700여 명을 모아 영규(靈圭) 등 승병과 합세하여 청주를 탈환했으며, 700명의 의병으로 금산(錦山) 전투에서 분전하다 전사했다.
兩蹇堂集序
恭惟我朝開國以來。寇亂之禍。莫慘於壬辰。忠義之士。亦莫盛於壬辰。蓋天迫於氣數。不能無一亂之運。而其亂也。又必生撥亂之材以扶持之也。若白沙李文忠之定策扈聖。西川鄭忠翼之乞師副急。德豊李忠武之討賊制勝。泉谷宋忠烈之守土死節。重峰趙文烈之倡義立慬。皆卓犖不世之出也。至於位卑而任多。祿薄而事煩。上下周章。出入竭蹶。終致殺身殉國之節者。兩蹇堂黃公。亦其人也。烏可以名位之不揚。贈褒之不稱論之哉。遺墨散逸。所存未爲十之一。癸巳春。九世孫柬。持以過余於天台寓舍。屬以校勘之役。嗚呼。余於公爲彌甥也。是以自幼侍先人側。得聞其事實。頗津津焉。豈知風樹孤露五十歲。乃始得見其遺稿耶。且柬是竹馬舊交也。丱角相分。白首相逢。其悲慰之情。又何如哉。素以寡陋。兼滯病痼。精神筋力。收拾不上。安有可以擔當人家不朽之託者哉。但情感攸至。不忍全然牢却。於是姑分門類。定爲一冊而還之。若其讐校精訂。極其潤色。則在乎其人焉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