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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신재집 권13
  • 서(序)
  • 《교채와유고》 서문(咬菜窩遺稿序)

일신재집(日新齋集) / 일신재집 권13 / 서(序)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3.0002.TXT.0001
《교채와유고》주 65) 서문
내가 젊었을 때에 무사재(無邪齋) 박(朴) 어른주 66)을 따라 공부를 하면서 교채와(咬菜窩) 선생의 경학(經學)과 행의(行義)가 우뚝하여 남쪽 지방에서 신망을 받은 지 오래되었다는 말을 들었었다. 그런데 나중에 선생이 편찬한 《심경(心經)》주 67)과 붉은 점으로 선별한 주해(註解)를 얻어 읽고 그 박식함과 정밀함이 사문(斯文)을 도울 수 있었음에 감탄하였다. 그 뒤로 또 중화(中和)와 비은(費隱) 등의 설(說)을 얻어 읽어 보니, 그 변석(辨析)과 발휘(發揮)가 공정하고 합당하여 당시 유가(儒家)의 주기(主氣)에 대한 비난을 배척할 수 있었고,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당시 뜻과 진실로 부합하였다.
일찍이 근세(近世) 이후로 정자와 주자의 강토(疆土)를 지켜 구물(舊物)을 잃지 않은 사람은 오직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와 벽계(蘗溪 이항로(李恒老)) 두 사람뿐이라고 하였으니, 선생의 언론과 견해가 나와 약속하지도 않았음에도 합치되는 것이 이와 같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아, 선생에 대한 말을 들은 것이 이르지 않다고 이를 수 없고, 선생을 안 것도 늦지 않다고 이를 수 없으니, 산두(山斗)주 68)를 추억함에 어찌 미칠 수 없는 한탄을 금할 수 있겠는가.
선생의 손자 학주 69)이 머리가 하얗게 세도록 함께 늙어가면서 끊임없이 서로 따르며 친하게 지냈는데, 하루는 유고(遺稿)를 받들고 와서 외람되게도 현안(玄晏)주 70)을 부탁하였다. 내가 하찮은 식견으로 감히 그 부탁을 받들어 부응하지 못한다는 것을 본디 알고 있었지만, 삼가 전후로 내가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 지극한 이유를 서술하여 옛사람이 책심(責沈)한 뜻주 71)에 견주어본다.
주석 65)교채와유고(咬菜窩遺稿)
조선 후기의 학자 민백우(閔百우(火+右), 1779∼1851)의 시ㆍ서(書)ㆍ제문ㆍ잡저 등을 수록한 시문집이다. 권두에 정의림(鄭義林)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증손 민영래(閔泳來)의 발문이 있다. 불분권 1책이고, 목활자본이다.
주석 66)무사재(無邪齋) 박(朴) 어른
박영주(朴永柱, ?~?)로, 무사재는 그의 호이다. 정의림((鄭義林)이 어렸을 때 그에게서 사서를 배웠다고 한다.
주석 67)심경(心經)
민백우가 《심경》에 대한 제가의 해설을 모은 《심경집해(心經集解)》를 말하는 것으로, 1888년에 민백우의 손자 민영래(閔泳來)에 의해 간행된 주석서이다. 권두에 기정진(奇正鎭)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안수록(安壽祿)ㆍ김문옥(金文鈺)의 발문이 있다. 4권 3책. 목판본이다.
주석 68)산두(山斗)
태산북두(泰山北斗)의 준말로, 세상 사람들이 흠앙(欽仰)하는 훌륭한 사람을 비유한다. 《신당서(新唐書)》 권176 〈한유열전(韓愈列傳)〉에서 그에 대한 찬(贊)에 "한유가 작고한 뒤 그의 말이 크게 행해져, 학자들이 그를 태산북두처럼 우러러 받들었다.[自愈沒, 其言大行, 學者仰之如泰山北斗云.]"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석 69)
한자 표기는 土+學이다.
주석 70)현안(玄晏)
진(晉)나라 황보밀(皇甫謐)의 호(號)로, 당시 좌사(左思)가 10년 동안의 구상을 거쳐 〈삼도부(三都賦)〉를 짓고, 황보밀이 서문을 써서 이를 크게 칭찬하자 부자와 귀족들이 서로 다투어 베끼는 바람에 낙양의 종이 값이 일시에 폭등하였다는 고사로 인해 후대에 훌륭한 글의 서문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되었다.《晋書 卷92 文苑列傳 左思》
주석 71)책심(責沈)한 뜻
당시의 현자(賢者)를 알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자책하는 것을 뜻한다. 송(宋)나라 때 학자인 진관(陳瓘)이 당시의 명현(名賢)이었던 정호(程顥)를 알아보지 못하고 범조우(范祖禹)에게 물은 것을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고서 춘추 시대 섭공(葉公) 심저량(沈諸梁)이 공자가 어떤 분임을 모르고 자로(子路)에게 묻자 자로가 대꾸하지 않았던 《논어(論語)》 〈술이(述而)〉의 고사에 의거하여 심저량을 책망하는 뜻으로 책심문(責沈文)을 지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書言故事》
咬菜窩遺稿序
余少從無邪齋朴丈遊。聞咬菜窩先生經學行義。偉然爲南服之望者久矣。最後得先生所撰心經及朱選註解。讀之歎其博洽精詳。足以羽翼斯文。最後又得中和費隱等說。讀之其辨析發揮。稱停的當。有以斥時儒主氣之非。而允合乎程朱當日之旨。嘗以爲近世以來。守程朱疆土而不失舊物者。惟蘆沙蘗溪兩先生而已。誰知先生言論見解。不約而合。有如是耶。嗚呼。聞先生不可謂不早。而知先生亦不可謂不晩矣。追想山斗。易勝靡逮之恨。先生孫壆。白首同衰。源源相從。一日奉遺稿。猥有玄晏之託。余以淺末。固知不敢承膺。而謹述前後鄙懷之所以慕仰愈至者。以擬古人責沈之意云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