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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신재집 권13
  • 잡저(雜著)
  • 절작변무문(節酌辨誣文)

일신재집(日新齋集) / 일신재집 권13 / 잡저(雜著)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3.0001.TXT.0001
절작변무문
도리(道理)는 무궁하지만, 시세(時世)는 다를 수 있다. 이 때문에 성현의 말은 시세와 인정에 따라 혹 같지 않을 수 있다. 전대의 성인이 밝히지 못했던 것을 후대의 현인이 밝혀 확충하거나 전대의 학설이 미진했던 점을 후대의 유학자가 변론하여 밝히는 것이 어찌 새로운 학설을 처음으로 확립함으로써 전대의 현인보다 뛰어남을 추구하고자 해서이겠는가. 도리어 도리를 밝혀 시대의 폐단을 구제하는 것은 어쩔 수 없어 마지못해 하는 것이다. 장자(張子)가 "좋지 않은 점을 함께 고치는 것이 바로 후학에게 바라는 바이다."라고 말하고, 주자가 "선배를 존경하고 경외하며, 의리를 강구하고 밝히는 일이 함께 행해져 어그러지지 않게 한다."라고 말한 것이 이러한 뜻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학자가 선대 현인들에 대해 선대 현인들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아 의리를 강구하고 밝히는 데에 모든 노력을 다함으로써 혹시라도 선대의 현인들이 우연히 잘못 살핀 것이나 미쳐 자세하게 생각하지 못한 점이 있으면 또한 감히 내버려둔 채 지나쳐버리지 않는 것이 바로 존경하고 경외하는 도리를 십분 다하는 것이다. 이러한 조과입실(操戈入室)주 1)이 옛사람들이 학문에 뛰어날 수 있었던 이유이다.
선사이신 노사(蘆沙) 선생은, 율곡(栗谷) 선생이 원래 가학(家學)이 유래한 연원이 되기에 일생 동안 독실하게 믿으면서 존경하고 사모하였다. 대체로 율곡이 이치를 강론한 말은 그 전체를 총괄하면  "이(理)는 형체가 없어 통하고, 기(氣)는 형체가 있어 국한된다."와 "기가 아니면 발현할 수 없고, 이가 아니면 발현하는 바가 없다." 등의 말이 이것이고, 그 단서를 정확히 가리켜보면 "온갖 정은 모두 이에서 발현된다."와 "사단과 칠정은 별개의 정이 아니다.", "이와 기는 호발함이 없다." 등의 말이 이것이다. 선사께서는 매번 그 말이 정확하고 완전하여 만세토록 바뀌지 않을 정론(定論)이고, 더욱이 오늘날 주기(主氣)의 증상에 맞는 진정한 약제라며 감탄하였다. 다만 "음(陰)이 정(靜)하고 양(陽)이 동(動)하는 것은 그 기제(機制)에 의해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지 그렇게 하도록 시키는 것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에 대해 조금 이치에 맞지 않은 점이 있지만, 매번 융통성 있게 보고자 하면서 이 말은 단지 유행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라고 하였다. 세속의 유학자들이 정론과 종지(宗旨)를 잘못 알고 내버려둔 채 강구(講究)하지 않으면서 오직 '음이 정하고 양이 동한다.'라는 일단의 말에만 집착하여 주기(主氣)의 증안(證案)으로 여김으로써 율곡의 은미한 뜻이 막혀 드러나지 않게 하는 것을 보고 선사께서 마침내 〈사의(私議)〉주 2) 등의 글을 지어 "이는 형체가 없어 통하고 기는 형체가 있어 국한된다."라는 말의 뜻을 밝혔는데, 매우 상세하였다. 또 〈외필(猥筆)〉주 3)을 지어 "음이 정하고 양이 동한다."라는 구절에 대해 조금 타당하지 못한 것이 전전하다가 잘못된 뜻에 이르게 되었음을 논변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전대의 현인이 이것을 밝힌 것이 너무나 명쾌하여 훗날의 폐단이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될 줄 생각하지 못했을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전대 현인의 뜻을 드러내 밝히고, 오늘날의 폐단을 바로잡아 고친 이유이다. 그러나 오히려 감히 스스로 편안하게 여기지 못하고 "외필"이라 하였고, 오히려 감히 스스로 독단하지 않고 "참으로 질정을 드리고 싶다."라고 하였으며, 오히려 감히 스스로 옳다 여기지 않고 "내가 의심한 것이 망령된 것이라면 유문(儒門)의 다행이다."라고 하였으니, 말이 더욱 간절하고 예의가 더욱 공손하여 이른바 "선배를 존경하고 경외하며 의리를 강구하여 밝힌다."라는 것이 함께 행해져 어그러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근래에 영남 사람 최동민(崔東敏)과 권봉희(權鳳熙) 무리들이 〈외필〉 가운데 한두 구절의 말을 지적하며 선사가 율곡을 공격하고 배척한 것이라고 하여 서로 연이어 통지문을 보내며 방자하게 헐뜯었다.
아, 선사께서 율곡을 공격하고 배척했다는 것이 과연 어떤 일인가? 본령이 둘이다라고 말한 것과 천명이 멈추었다고 말한 것, 헛된 명칭이 있다고 말한 것들은 "이는 장수이고, 기는 역졸이다[理氣帥役]"라는 말의 뜻을 설명한 것인데, 저들은 율곡을 공격하고 배척한 것이라고 하였으며, 피음사둔(詖淫邪遁)주 4)이라 말한 것과 전도되어 창피스럽다고 말한 것은 주기(主氣)에 대한 후세 사람의 폐단을 말한 것인데, 저들은 율곡을 공격하고 배척한 것이라고 하였다. 단지 이것만으로 뭇사람을 선동할 수 없을까 염려하여 퇴계와 우암을 조롱한 것이라고 하였고, 단지 이것만으로 그 죄를 무겁게 할 수 없을까 염려하여 주자(朱子)를 침범하고 배척한 것이라고 하였다. 예로부터 소인이 군자를 무함하고 헐뜯을 때면 성현을 앞세우고 경전의 뜻을 빙자함으로써 간악함과 속임수, 시기와 거짓의 계책을 팔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대개가 본디 이와 같다.
무릇 의리는 천하 사람이 함께하는 것이니, 아들이 아버지를 사사롭게 옹호할 수 없고, 동생이 형을 사사롭게 옹호할 수 없으며, 제자가 스승을 사사롭게 옹호할 수 없고, 후대의 현인이 전대의 현인을 사사롭게 옹호할 수 없다. 온공(溫公)이 《의맹(疑孟)》편을 지었지만주 5) 그의 아들 강(康)은 맹자를 가장 순수하게 여겨 경연에서 진강(進講)하였고, 명도(明道)가 《대학(大學)》의 편차(編次)를 정했지만 이천(伊川)이 그것을 개정하였으며주 6), 오봉(五峰)의 잘못된 논의를 남헌(南軒)이 논변한 것이 많았고주 7), 고정(考亭)이 정립한 학설을 면재(勉齋)가 간혹 어기기도 하였다주 8). 주자는 주자(周子 주돈이(周敦頤))에 대해 직접적으로 "그의 말이 장자(莊子)나 노자(老子)와 같다."라고 하였고, 정자(程子)에 대해 직접적으로 "그의 말은 황노(黃老)의 유풍이 있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라고 하였으며, 장자(張子 장재(張載))에 대해 직접적으로 "석씨(釋氏)에 가깝다."라고 하였고, 또 "《정몽(正蒙)》에 잘못된 부분이 많다."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회재(晦齋)가 주자의 《대학장구(大學章句)》를 개정하였고주 9), 율곡이 퇴계(退溪)의 사칠의론(四七議論)을 변별하였으며주 10), 퇴계의 차의(箚疑)를 우암(尤庵)이 개정한 것이 많았고, 우암의 차의를 농암(農巖)이 간혹 논변하기도 하였다주 11). 그러나 어느 한 사람도 이것을 가지고서 아버지를 무함하고 헐뜯은 것이고, 형을 무함하고 헐뜯은 것이며, 스승을 무함하고 헐뜯은 것이고, 전대의 현인을 무함하고 헐뜯은 것이라고 말하는 자가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아, 선사는 율곡을 정신으로 융회(融會)하고 마음으로 전수받아 깊이 좋아하고 독실하게 믿었으니, 지극하다고 이를 만하다. 그러한 마음이 일상적인 글 사이에 드러나서 낱낱이 들어올릴 수 없을 정도인데, 우선 한 편에서 논한 것을 말해 보겠다. 선사께서는 일찍이 하환성재(河喚惺齋)가 율곡을 신구(伸救)한 상소주 12)를 논하면서 "천지에 참여하고 성쇠에 관계 된다."주 13)라고 하였고, 또 "이 상소에는 천지 뒤의 떳떳한 법이 있다."주 14)라고 하였으며, 또 "하늘이 이 옹(翁)을 낸 것은 바로 만세에 비태(否泰)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이다."주 15)라고 하였다. 이 말의 뜻을 자세히 음미해 보면 율곡을 아는 자가 선사만한 사람이 없고, 율곡을 존경하는 자 또한 선사만한 사람이 없으니, 일찍이 한 구절의 말을 해석한 것으로 공격하고 배척했다고 이르는 것이 사리에 옳겠는가? 옳지 않겠는가? 이는 삼척동자도 속일 수 없는 것인데, 온 세상 사람을 현혹시키고 만인의 눈을 가려 속이고자 하니, 매우 생각이 없는 것이다. 사람의 터무니없는 말이 이 정도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우리나라가 분당(分黨)한 지 수백 년 동안 선정(先正)을 무함하고 헐뜯었던 여러 선생의 말이 문자에 드러난 것이 많을 뿐만이 아니었지만, 어느 한 마디도 공격하고 배척했다고 말한 경우는 없었다. 그런데 유독 노사 선생께서 이치를 밝히고 폐단을 구제하기 위해 했던 지극히 공정한 말에 대해서만은 사납게 성내고 심하게 배척하여 서로 용납하지 못하게 하니, 도대체 무슨 곡절이란 말인가? 비유하자면 이는 한 우매한 사람에 대해 그와 길을 함께 걷는 치욕은 달게 받으면서도 그와 방을 함께 하는 것은 차마 하지 못하겠다는 경계와 같은 것이니, 아, 서글프구나.
중암(重庵) 김 선생(김평묵(金平默)이 일찍이 〈외필〉을 구하여 읽고 감탄하며 말하기를, "이는 우리 화서(華西) 선생(이항로(李恒老))의 말과 약속하지도 않았음에도 합치된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율곡을 존경하는 사람으로 기정진과 이항로 두 선생만한 사람이 없다." 하였으니, 선사를 안 사람이라고 이를 만하다. 아, 도(道)는 굽혀지기도 하고 펼쳐지기고 하며, 때는 소멸하기도 하고 성장하기도 하니, 예로부터 성현들은 한때 굽혀졌지만 마침내 만세토록 펼쳐졌다. 오늘날 시끄럽게 떠드는 저들도 또한 이규(李槼)ㆍ유직(柳稷)주 16)과 같은 부류일 뿐이니, 어찌 그들과 잡다한 말로 논변할 수 있겠는가. 다만 집집마다 그 글을 보관하고 그 말을 욀 수 없으니, 열 번 치는 나무와 세 번 전해지는 호랑이주 17)가 어찌 말을 교묘하게 하고 입을 잘 놀리는 사람들에 의해 먹혀들지 않을 바가 될 줄 보장하겠는가. 이에 감히 대략적인 내용을 간략히 서술하여 우리 유가의 학문하는 선비들에게 고한다.
주석 1)조과입실(操戈入室)
자기의 창으로 자기 집을 공격하여 쳐들어온다는 말로, 배운 학문으로 가르쳐 준 사람을 공격하는 것을 이른다. 청출어람(靑出於藍)과 같은 말이다. 후한(後漢)의 하휴(何休)가 《춘추(春秋)》 삼전(三傳)에 대해 저술하였는데, 정현(鄭玄)이 그 내용을 반박하며 수정을 가하자, 하휴가 "강성(康成)이 나의 방에 들어와서는 나의 창을 쥐고서 나를 공격하는구나."라고 탄식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後漢書 鄭玄列傳》
주석 2)사의(私議)
〈납량사의(納凉私議)〉를 말한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이 46세 때에 남암(南庵)으로 피서(避暑)를 가서 처음 초고를 짓고 죽기 직전까지 교정한 것으로, 저자의 사상이 가장 잘 드러나 있다. 기정진은 이 글에서, "근세에 성(性)을 논하는 자들이 이일(理一)과 분수(分殊)에 대하여 모르는 까닭에 이일을 형기(形氣)에서 떨어진 것으로 한정하고, 분수를 형기의 뒤를 따르는 것으로 한정시켰으며, 그 결과 이일과 분수가 별개의 것이 되고 성과 명(命)이 제멋대로 결정되어 성에 대한 논의가 분열되었다."라고 전제한 뒤에 이일원적(理一元的) 관점에서 주리론(主理論)을 전개하고 있다.
주석 3)외필(猥筆)
81세 때에 지어 김석귀, 정재규, 정의림 등 세 제자에게 보여준 뒤 세상에 내놓았던 글로, 율곡이 일찍이 언급한 "음양(陰陽)의 동정(動靜)은 기(氣)의 기제(機制)로 스스로 그렇게 되는 것이지 그렇게 하도록 시키는 것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명제에 대하여, 동정하는 자체는 기이지만 동정하게 만드는 것은 이라고 단정함으로써 기의 자발성(自發性)을 비판하고 근원적인 이의 주재성(主宰性)을 강조하였다. 이 글이 나온 뒤에 간재(艮齋) 전우(田愚) 등이 논박하며 당시 많은 논쟁을 일으켰다.
주석 4)피음사둔(詖淫邪遁)
말의 네 가지 병폐를 가리키는 것으로, 피사(詖辭), 음사(淫辭), 사사(邪辭), 둔사(遁辭)의 준말이다. 《맹자(孟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한쪽으로 치우친 말에서 그의 마음이 가려 있음을 알며, 방탕한 말에서 그 마음이 빠져 있음을 알며, 사특한 말에서 그 마음이 도와 멀리 떨어져 있음을 알며, 회피하는 말에서 논리가 궁함을 알 수 있다.[詖辭知其所蔽, 淫辭知其所陷, 邪辭知其所離, 遁辭知其所窮.]" 라고 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주석 5)온공(溫公)이……지었지만
온공(溫公)은 송(宋)나라 때의 학자이자 정치가인 사마광(1019~1086)을 말하고, 《의맹(疑孟)》은 사마광이 《맹자(孟子)》의 의심스러운 것을 평론하여 맹자를 비판한 저술로 모두 11편이며 《온국문정사마공문집(溫國文正司馬公文集)》 권73에 실려 있다.
주석 6)명도(明道)가……개정하였으며
명도(明道)는 북송 때의 학자인 정호(程顥)의 호이고, 이천(伊川)는 정이(程頤)의 호이다. 이들은 형제 사이로 이정(二程)이라 일컬어졌다.
주석 7)오봉(五峰)의……많았고
오봉(五峯)은 송(宋)나라 때의 학자인 호굉(胡宏, 1105~1161)의 호이고, 남헌(南軒)은 장식(張栻, 1133~1180)의 호이다. 이들은 사제관계로, 장식이 호굉에게 사사하였다.
주석 8)고정(考亭)이……하였다
고정(考亭)은 남송(南宋) 시대의 학자인 주희(朱熹, 1130~1200)의 별칭이다. 면재(勉齋)는 남송(南宋) 시대의 학자인 황간(黃榦, 1152~1221)의 호로, 주희의 제자이자 셋째 사위이다.
주석 9)회재(晦齋)가……개정하였고
회재(晦齋)는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의 호이다. 그는 주희의 《대학장구(大學章句)》에 대해 의심을 품고 일부 구절의 차례를 옮기거나 바꾸어서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를 편집하였다.
주석 10)율곡이……변별하였으며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주희(朱熹)의 '사단은 이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라는 학설에 근거하여 '사단은 이(理)가 발하여 기(氣)가 이에 따르는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하여 이가 여기에 타는 것이다.'라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주장하였는데,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칠정은 사단을 내포한 것이며, 사단도 기(氣)가 발하면 이(理)가 타는 것이다.[氣發而理乘之]'라는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주장하여 퇴계의 이발설(理發說)을 부정하였다.
주석 11)퇴계의……하였다
이황은 《주자대전(朱子大全)》의 이해를 위해 《주자서절요기의(朱子書節要記疑)》를 저술하였고, 송시열이 《주자서절요기의》를 재정리ㆍ보완하여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라 하고서 권상하(權尙夏)에게 주며 김창협(金昌協)과 함께 마무리를 지을 것을 당부하였다. 이에 김창협은 노론 학인들과 토론하며 《주자대전차의》를 교정하였다.
주석 12)하환성재(河喚惺齋)가……상소
하환성재(河喚惺齋)는 하락(河洛, 1530~1592)으로, 환성재는 그의 호이다. 본관은 진주(晋州)이며, 자는 도원(道源)이다. 진주(晉州) 출신으로 남명(南溟)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568년(선조 1) 진사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후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어 임해군과 광해군을 가르쳤다. 계미년(1583, 선조16)에 상소를 올려 이이(李珥)와 성혼(成渾) 등의 무고를 구제하였다.
주석 13)천지에……된다
《노사선생문집(蘆沙先生文集)》 20권 〈환성재유고서(喚醒齋遺稿序)〉에 보인다.
주석 14)이……있다
《노사선생문집(蘆沙先生文集)》 20권 〈환성재유고서(喚醒齋遺稿序)〉에 보인다.
주석 15)하늘이……위해서이다
비태(否泰)는 《주역》의 〈비괘(否卦)〉와 〈태괘(泰卦)〉를 말하는데, 〈비괘〉는 건괘(乾卦 ☰)가 위에 있고 곤괘(坤卦 ☷)가 아래에 있어 하늘과 땅의 기운이 서로 교류하지 않아 막히는 상이고, 〈태괘〉는 이와 반대로 건괘가 아래에 있고 곤괘가 위에 있어서 하늘과 땅의 기운이 서로 교류하여 통하는 상으로, 세도의 비색(否塞)함과 태평(泰平)함을 뜻한다. 이 말은 《노사선생문집(蘆沙先生文集)》 20권 〈환성재유고서(喚醒齋遺稿序)〉에 보인다.
주석 16)이규(李槼)ㆍ유직(柳稷)
1650년(효종1)에 성균관 유생들이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다시 주장하자, 이이에 대해서는 "천륜을 끊고 불가로 도망하여 숨었다."라고 비난하고, 성혼에 대해서는 "나라의 후한 은혜를 입고도 임금이 파천(播遷)하던 날 달려오지 않았다."라고 비난하며 반대 상소를 올린 900여 명 중 대표 인물들이다. 《孝宗實錄 1年 2月 22日》
주석 17)세……호랑이
세 사람이 저자에서 호랑이를 보았다고 하면 사람들이 사실로 믿게 된다는 '삼인성시호(三人成市虎)'로, 터무니없는 거짓말도 여러 사람이 자꾸 말하면 진실로 믿게 된다는 것이다.《淮南子 說山訓》
節酌辨誣文
道理無窮。而時世有異。是以聖賢之言。因時世人情而容有不同焉。前聖所未發。後賢發而擴之。前說所未盡。後儒辨而明之。是豈欲創立新說。求多於前人哉。乃所以明道理而捄時弊者。不得已也。張子曰。其未善者。共改之。正所望於後學。朱子曰。尊畏先輩。講明義理。竝行而不悖者。其非此意耶。然則學者之於先賢。當以先賢之心爲心。講明義理。十分盡底。而或有偶失照管者。未及細思者。則亦不敢放過。是乃十分尊畏之道。此操戈入室。古人之所以善學也。先師蘆沙先生於栗谷先生。原來是家學淵源之所自也。一生篤信而尊慕之。蓋栗谷論理之說。其總括全體。則曰理通氣局。及非氣不能發。非理無所發等語是也。其的指端緖。則曰萬般之情。皆發於理。及四七非兩情。理氣無互發等語是也。先師每歎其的確渾全。爲萬世不易之定論。而尤爲今日主氣之對證眞劑也。但於陰靜陽動。其機自爾。非有使之之語。有少未契。而每欲活看以通之。以爲此特流行邊說話矣。及見世儒之錯認。定論宗旨。遺而不講而專執陰靜陽動一段語。以爲主氣之證案。使栗谷微旨。鬱而不彰。先師遂著私議等說。以明理通之義。極其詳悉。又著猥筆。以辨陰靜云云之句。有些下語之未妥。以至輾轉差謬之意。因曰。前賢於此發之太快。而後弊之至此。容有未之思也。此所以發明前賢之意。而矯捄今日之弊者也。然猶不敢自安而曰。猥筆。猶不敢自專而曰。實有奉質之願。猶不敢自是而曰吾之所疑者妄。則儒門之幸也。言愈切而禮愈恭。所謂尊畏講明者。可以倂行而不悖矣。不意邇者。有嶺人崔東敏。權鳳熙輩。指摘猥筆中一二句語。謂先師攻斥栗谷。相繼投通。肆其詆毁。噫。先師之攻斥栗谷。果何事耶。曰雙本嶺。曰天命息。曰有虛名等語。是說理氣帥役之義。而彼曰攻斥栗谷。曰詖淫邪遁。曰顚倒倡披。是說後人主氣之弊。而彼曰攻斥栗谷。只此恐不足以動其衆。則曰譏切退尤。只此恐不足以重其罪。則曰犯斥朱子。自古小人誣陷君子者。未嘗不頭戴聖賢憑藉經訓以售其奸譎猜險之計者類固如此。夫義理天下之公物也。子不得以私其父。弟不得以私其兄。弟子不得以私其師。後賢不得以私其前賢。溫公作疑孟篇。而其子康以爲孟子最醇而進講於經筵。明道定大學編次。而伊川改定之。五峯差處。南軒多辨之。考亭定說。勉齋或違焉。朱子於周子直曰。其言似莊老。於程子直曰。其言不免有黃老之風。於張子直曰。近釋氏。又曰。正蒙多差處。至於我東。則晦齋改定朱子大學章句。栗谷辨別退溪四七議論。退溪之箚疑。尤庵多改之。尤庵之箚疑。農巖或辨焉。然未聞有一人以此誣毁其父。誣毁其兄。誣毁其師。誣毁其前賢者也。噫。先師之於栗谷。所以神會心授。而悅之深信之篤者。可謂至矣。其發於尋常文字之間者。不可枚擧。而姑以一篇所論言之。先師嘗論河喚惺齋伸捄栗谷疏有曰。參天地關盛衰。又曰。此疏有天地後經法。又曰。天生此翁。乃爲萬世傳否泰消息。詳味此意。知栗谷者。莫如先師。尊栗谷者。亦莫如先師。曾以一句語解而謂攻斥者。於事理可乎不可乎。此不足以瞞三尺之童。而乃欲以熒惑一世。欺蔽萬目。其不思甚矣。人之無據。一至於此乎。我東分黨數百年。詆毁先正諸先生之言。著於文字者。不啻多矣。而無一言攻斥。獨於蘆沙先生明理捄敝至公至正之言。怒之暴。斥之甚。而使不相容。抑何曲折歟。比如一昏愚之人。甘受行路之辱。而不忍同室之戒者也。吁可哀也。重庵金先生嘗得猥筆。讀之歎曰。此與我華西先生之言。不約而合。又曰。尊栗谷者。莫如奇李二先生。此可謂知先師矣。嗚呼。道有屈伸。時有消長。自古聖賢。未嘗無一時之屈。而竟伸於萬世。今日彼輩之嘵嘵。亦一李槼柳稷之流耳。何足與之多辨。但不能家蓄其書。戶誦其說。而十伐之木。三傳之虎。安保其不爲巧言利口之所入乎。玆敢略述梗槪。以告于吾黨遊從之士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