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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2
  • 잡저(雜著)
  • 영귀정 별동연의 벗들에게(詠歸亭別同硏諸友)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2 / 잡저(雜著)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2.0001.TXT.0036
영귀정 별동연의 벗들에게
조금 나아가다 지리멸렬(支離滅裂)해지고 끝내는 고루해져 머리가 하얗게 된 채 어찌할 줄 모르고 있으니 여전히 당(堂) 아래 문밖을 서성이는 사람일 뿐이다. 보잘것없는 내가 재숙(齋塾 글방)에 발자취를 붙였던 것이 어찌 남의 스승이 되기를 좋아하는 마음 때문이었겠는가. 생각지 않았건만 제군(諸君)이 일부러 찾아와서 나를 따르며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밤낮으로 함께 모였으니 내가 느끼는 감상(感賞)이 참으로 한량이 없었다. 그러나 제군이 나를 본받고 따랐던 이유가 무슨 일이었던가? 부끄럽기 그지없다. 하물며 지금은 한 해가 다 저물어 행장을 꾸려 떠나려 하건만 또 이렇게 한마디 말을 청함에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성사(聖師 공자(孔子))의 격언(格言)이 전적(典籍)에 실려있으니 진실로 나귀를 타고서 나귀를 찾듯이 이렇게 쓸데없는 일을 중복할 필요가 없다. 다만 그 사람의 기질이 치우친 곳, 공력(功力)이 다다른 곳을 가지고 보자면 한두 마디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오늘날 제군의 공력은 그저 어렴풋한 그림자나 메아리만 보았을 뿐 절실하게 담당한 부분이 없고 확실하게 근거한 부분이 없다. 비유하자면 참외 한 개를 구해서 이것이 먹을 만한 음식이라는 것만 알 뿐이지 여전히 쪼개고 씹어서 입안 가득한 자미(滋味)를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정부(定夫), 백연(伯淵), 평중(平仲)은 말수가 적고 태도가 신중한 점은 훌륭하지만 활달한 기상이 모자란다. 자인(子仁), 경백(慶伯), 경순(景純)은 자못 영특하기는 하나 돈독함이 부족하다. 인보(仁夫), 보경(甫卿)은 순박하고 듬직하기는 하나 간혹 유유히 시간을 허비하는 데 가깝고, 경원(景元), 사앙(士仰)은 근실하고 영민하지만 또한 고집스럽고 편협한 면이 없지 않다. 형숙(亨叔), 사옥(士玉), 공실(公實)은 순직(順直)하고 진실하기는 하나 정신과 기백이 부족하다. 내원(乃源), 사온(士蘊)은 즐겁고 화평하기는 하나 자세함이나 치밀함이 없다. 사경(士敬), 양로(陽路), 자온(子蘊)은 모두 꼼꼼하고 신중함이 아낄 만하지만, 또한 경솔하고 늑장을 부리는 병통이 없다고 할 수 없다.
학문이 이른 곳과 병통이 있는 곳을 알아서 바로잡고 성찰하여 허물을 줄이고 부족한 점을 보완할 수 있다면 현철(賢哲)이 되는 것을 누가 불가능하다고 하겠는가. 지금은 제군이 처음으로 학문의 길로 나서는 때이니 만 리 앞길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하물며 지금은 세상이 혼란스러워 사람에게 매우 좋지 못한 때이니 바로 학문을 연마하고 의지를 굳게 다져야 하는 시기이다. 만약 머뭇거리면서 노력하지 않아 몸가짐에 법도가 없고 시비(是非)와 사정(邪正)을 전혀 지키지 않는다면, 이것이 어찌 오늘을 서로 함께 하는 뜻이겠는가.
내가 비록 내세울 만한 것이 없어 제군의 스승이 되기에 모자라지만 제군의 뒤에서 장래에 어떠한 성취를 이루는지 보기를 바랄 뿐이다. 학문은 뜻을 세우는 것[立志]이 우선이다. 그러나 경중(輕重)과 취사(取捨)의 분별을 전혀 알지 못한다면 무슨 뜻을 세우겠는가. 학문은 주경(主敬)을 근본으로 삼는다. 그러나 조사존망(操舍存亡)주 136)의 기미를 전혀 알지 못한다면 무슨 경(敬)을 지키겠는가. 학문은 역행(力行)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나 사정(邪正)과 선악(善惡)의 분별을 전혀 알지 못한다면 무엇을 힘써 행하겠는가. 이것이 격물(格物), 치지(致知)가 《대학》의 시조리(始條理)가 되는 까닭이다.
이제 돌아가서 《여씨동몽훈(呂氏童蒙訓)》주 137)에 의거하여 오늘 하나의 이치를 궁구하고 내일 하나의 이치를 궁구하여 궁구한 것이 점점 많아지면 자연스럽게 마음이 보존되고 이치가 분명해져 모든 행동이 장차 거침이 없고 여유로울 것이다. 제군은 모두 몸가짐을 삼가고 조심하는 것이 넉넉하다. 다만 사색(思索)에 대해서는 아직 방향을 모르기 때문에 부질없이 말이 여기에 미쳤다. 혹시 자기의 결점은 헤아리지 못하면서 하는 말이라는 이유로 소홀히 하지 않는다면 다행이겠다.
주석 136)조사존망(操舍存亡)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인용된 "붙잡으면 있다가도 놓아 버리면 없어지고, 출입이 일정한 때가 없이 어디로 가는지 종잡을 수가 없는 것, 이것이 바로 마음이라는 것이다."라는 공자의 말에서 비롯되었다.
주석 137)여씨동몽훈(呂氏童蒙訓)
송나라 여본중(呂本中)이 편찬한 책으로 정론(正論)과 격언(格言)이 실려있다.
詠歸亭別同硏諸友
走少而滅裂終於固陋。白首倀倀。猶是堂下門外人耳。區區所以寄跡於齋塾之間者。豈好爲人師之意哉。不意諸君專來相從。喫苦耐辛。昕宵聚對。其爲感賞。固無涯量。而但諸君所以傚則於我者何事。愧愧萬萬。況此歲聿載暮。治裝將行。而又有此一言之請乎。聖師格言。載在方策。固不必騎驢覓驢。爲此疊床。而但隨其人氣質之所偏。功力之所至而觀之。則亦不無一二之可言。夫諸君今日之功。只是見得箇依俙影響。而無親切擔當處。無的實依據處。比如得一箇甘瓜。但識得此爲可食之物。而尙未能劈破來咀嚼來。以識其津津滋味也。定夫伯淵平仲。多簡黙而少開爽。子仁慶伯景純。頗穎悟而欠敦篤。仁夫甫卿。朴茂而或近於悠放。景元士仰。勤敏而亦不無固滯。亨叔士玉公實。醇實而少精神氣魄。乃源士蘊。樂易而無開詳縝密。士敬陽路子蘊。皆端詳可愛。而其粗率其怠緩。亦不可謂無是病矣。苟能知其學之所至。病之所在。而矯捄之省察之。損其過而補不足。則爲賢爲哲。誰曰不可。此是諸君最初發軔之日。前程萬里。曷可量哉。況今歲寒風色。甚不宜人。正是琢磨淬礪硬着脊樑之日也。若因循不力。持身無章。是非邪正。謾無所守。則豈今日相與之意哉。吾雖無狀。不足爲諸君之師。而願從諸君之後。第觀其將來成就之何如也。學問以立志爲先。然全不識輕重取舍之分。則立箇甚志。學問以主敬爲本。然全不識操舍存亡之幾。則主箇甚敬。學問以力行爲重。然全不識邪正善惡之別。則力行箇甚。此格物致知所以爲大學之始條理也。今歸且依呂氏童蒙訓。今日格一理。明日格一理。格得漸多。自然心存理明。凡所踐履。皆將沛然有餘矣。諸君皆謹勅有餘。而但於思索一路。尙未知方。故謾及之。儻勿以不恕之言而忽之。則幸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