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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2
  • 잡저(雜著)
  • 김자성에게 써 주다(書贈金子惺)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2 / 잡저(雜著)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2.0001.TXT.0022
김자성에게 써 주다
주부자(朱夫子)가 말하기를, "학자에게는 인순(因循)주 111)이 가장 두려운 일이다."주 112)라고 하였다. 이것은 참으로 학자가 띠에 적어놓고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할 사항이다. 좋은 일이 지나가고 궂은일이 다가와도 여전히 뜻이 없는 자는 진실로 말할 가치가 없다. 간혹 뜻을 지녔지만 더불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은 모두 인순(因循)이 빌미가 되기 때문이다.
아, 내가 약관(弱冠)이었던 시절에 향리의 노 선생들로부터 옛사람의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대해 듣고 일찍이 조금이라도 스스로 힘을 다하여 노력하려는 뜻을 지니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그러나 책을 읽었지만 거칠고 서툴며 번거로움을 싫어하여 경전(經典) 한 권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이치를 궁구하였지만 진지하게 힘을 쏟지 않아 한 가지도 쇄락(灑落)한 경지에 이르지 못하였다. 그리고 경(敬)을 위주로 하였지만 조장(助長)과 망각(忘却)주 113)이 서로 번갈아 일어나고 세상을 살아가는 몸가짐은 허물이 날로 쌓여갔다. 기대하며 기다리기도 하고 골몰했건만 모두 가버리기도 하여 어제 후회한 일은 오늘 고치기 어려웠고 지난해에 의심스럽던 사항은 올해에도 명백히 밝히지 못하였다. 이윽고 세월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아 귀밑의 검은 머리는 이미 희끗희끗해졌다.
아, 이것이 어찌 애초의 생각이었겠는가. 천지 간에 형체를 부여받아 사람이 되었건만 끝내 물고기나 금수(禽獸)로 돌아가고 말았으니 천 번을 후회해도 미치지 못하고 만 번을 후회한들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이럴 줄 알았다면 태어나지 않느니만 못하였다."주 114)라는 말을 되새길 때마다 저절로 삶이 애처로울 뿐이다.
기축년(1889, 고종26) 겨울에 김군 자성(金君子惺)이 벽산 서사(碧山書舍)에서 나와 종유(從遊)하였는데 서로를 대한 지 두세 달이 지나자 나에게 일상생활을 하면서 항상 살펴야 하는 말 한마디를 청하였다. 이에 내가 이르기를, "배고프고 목마른 자에게 먹고 마실 것을 구하고 귀머거리나 장님에게 눈과 귀를 빌리는 이치가 있겠는가. 내 마음을 되돌아보면 그대를 성장하게 할 수 있는 약간의 지식도 없고 오직 일찍이 인순(因循)으로 스스로 잘못되었던 경험만 있을 뿐이다. 사양하지 못하여 이것으로 거울과 전철의 경계로 삼으니 괜찮겠는가?"라고 하였다.
주석 111)인순(因循)
낡은 인습을 버리지 못하고 따르는 것을 이른다.
주석 112)학자에게는……일이다
《주자어류》 권113 〈훈문인(訓門人)〉에 보인다.
주석 113)조장(助長)과 망각(忘却)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반드시 호연지기를 기르는 데 힘쓰되 효과를 미리 기대하지 말아서, 마음에 잊지도 말고 억지로 조장하지도 말아야 한다.[必有事焉而勿正 心勿忘 勿助長也]"라고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주석 114)이럴……못하였다
《시경》 소아(小雅) 〈소지화(苕之華)〉에 나오는 말이다.
書贈金子惺
朱夫子曰。學者最怕因循。此誠學者書紳而服膺處也。熙往穰來。悠悠無志者。固不足道。其或有志而同歸泯然者。此皆因循爲崇也。嗚呼。余在弱冠時。從鄕里諸老先生。聞知古人爲己之學。而未嘗無一分自效之意。讀書而鹵莽厭苦。未有一經記熟。窮理而含糊不力。未有一事脫落。主敬而助忘相禪。行己而愆尤日積。或期擬而等待。或汨沒而俱往。昨日所悔。今日難改。前年所疑今年未瑩。旣而靈曜纖阿。不我延待。而鬢畔黎黑。已屬星星矣。嗚呼。此豈初料哉。上穹下際。賦形爲人。而竟未免鱗介飛走之歸。千悔無及。萬悔何益。每誦知我如此不如無生之語。而自哀其生而已也。己丑冬。金君子惺從余於碧山書舍。相對兩三月。請余一言爲日用顧諟之方。余曰。求飮食於飢渴。借視聽於聾盲。有是理哉。回視胸中。無一如半解可以相長者。而惟有曾經已試底因循自誤的而已。旣不得辭。則以此爲鑑車之戒。可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