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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2
  • 잡저(雜著)
  • 호상기우록(湖上奇遇錄)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2 / 잡저(雜著)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2.0001.TXT.0002
호상기우록
갑술년(1874, 고종11) 가을에 친족인 사문(斯文) 백언(伯彦)주 4)이 사상(沙上)주 5)에서 나를 찾아와 말하기를, "노선생(老先生)께서 계방(季方 정의림(鄭義林)의 자(字))의 안부를 매우 자세히 물으셨다. 인하여 서찰 봉투 하나를 가리키면서 말씀하기를, '이것은 삼가(三嘉)에 사는 정재규(鄭載圭)주 6)의 편지이다. 이 사람은 의림(義林)과 성씨도 서로 같고 나이도 서로 비슷하며 재능과 성격도 서로 닮았으며 사는 곳의 지명 또한 다르지 않으니 참으로 우연이 아니다. 그래서 이것을 보관했다가 의림에게 보이고자 한다.' 하셨습니다."라고 하였다.
삼가(三嘉)에 정 사문(鄭斯文)이라는 현자가 있다는 말은 이보다 앞서 이미 익히 들었다. 하지만 이 보잘것없는 몸으로 그와 함께 하는 것이 있고 나란히 사문(師門)의 칭찬을 받으리라는 것을 어찌 알았겠는가. 사정(私情)이 두려워 감히 사문의 뜻을 받들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지만 정 사문을 우러러 흠모하는 나의 마음은 이때부터 더해갔다. 이에 전편(轉便)을 통해서 삼가 통성명은 하였으나, 직접 뵙는 일까지는 아득하여 기약이 없었다.
다음 해인 을해년(1875) 겨울 10월에 내가 사상(沙上)으로 가서 선생을 찾아뵈었는데 후윤(厚允 정재규(鄭載圭)의 자)이 3일 전에 당도해 있었다. 그다음 해 여름 4월에 내가 진구(珍邱)의 우사(寓舍)로 가서 선생을 찾아뵈었더니 후윤이 또 3일 먼저 당도해 있었다. 이것이 어찌 사람이 꾀한다해서 되는 일이겠는가. 얼굴을 마주하고 약속을 하며 손을 맞잡고 언약을 하면서 매우 간절하게 둘이서 응낙하더라도 끝내는 서로 형편이 어긋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열에 여덟, 아홉이다. 하물며 아득히 먼 500리 땅에서 애초에 한마디의 약속도 없던 사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그러나 앞서지도 않고 뒤서지도 않으며 메아리처럼 합치된 것이 귀신과 같아 한 번, 두 번 기약이라도 한 듯이 만나게 되었다. 이것은 예사로운 입장에서도 신기하고 절묘한 일이건만 도리어 함께 하는 것이 있고 스승에게 칭찬을 들었으니 참으로 진귀하고 소중한 일이다.
선생께서 두 제자를 돌아보고 이르시기를, "이것은 세상에 드문 신기하고 절묘한 일이다. 어찌 각자 기록을 남겨서 잊지 않겠다는 뜻을 보이지 않는가."라고 하셨다. 이에 삼가 전말(顚末)을 서술하고 이로 인하여 후윤의 학문과 지절(志節)을 돌이켜 기억하자니 실로 나처럼 어리석은 자가 미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앞뒤로 이어진 기이한 우연이 이처럼 여러 차례 반복되었으니 후윤은 자기만 못한 자를 벗으로 삼지 말라는 공자의 교훈주 7)을 고집스럽게 지키지 않아야 할 것이다. 나처럼 무능한 사람을 불쌍히 여겨 은혜롭게 대하고 멀리하지 않으며 이끌고 일깨워주어 자기와 함께 돌아가도록 한다면 이처럼 세상에 드문 우연에 부응할 뿐만이 아니며, 또한 우리 선생께서 끊임없이 칭찬하신 뜻이 아니겠는가. 이에 다음과 같은 시를 짓는다.

네 가지가 같다는 말씀은 부끄럽지만 堪愧四同說
두 번씩이나 만난 우연이 더욱 기이하구나 最奇再遇緣
선생께서 기록으로 남기라 명하시니 先生命以記
이 뜻이 참으로 깊고도 깊도다 此意正淵淵
주석 4)백언(伯彦)
정시림(鄭時林, 1833~1912)의 자이다. 본관은 광산(光山), 호는 월파(月坡)이다. 기정진의 문인으로, 보성(寶城)에 거주하였다.
주석 5)사상(沙上)
기정진이 거처하던 노산(蘆山) 아래 하사(下沙)를 이른다.
주석 6)정재규(鄭載圭)
1843~1911.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영오(英五)ㆍ후윤(厚允), 호는 노백헌(老柏軒)ㆍ애산(艾山)이다. 청계(淸溪)는 초계의 이칭(異稱)이다. 김홍집(金弘集) 등 개화파에 의한 개화운동이 시기상조임을 밝히고 위정척사(衛正斥邪)를 주장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 때에는 유림에게 통문을 돌려 의병을 일으키자고 호소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맺어진 후 최익현(崔益鉉) 등과 의병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으나 성사시키지 못하였다. 저서로 《노백헌집(老柏軒集)》이 있다.
주석 7)자기만……교훈
《논어(論語)》 〈학이(學而)〉에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군자가 후중하지 않으면 위엄이 없으니, 배우는 것 또한 견고하지 못하다. 충(忠)과 신(信)을 주로 하며, 자기만 못한 자를 벗으로 삼지 말며, 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리지 마라."라는 내용이 보인다.
湖上奇遇錄
歲甲戌秋。鄙族伯彦斯文。自沙上過余而言。老先生問季方安否甚悉。因指一幅封題曰。此是三嘉鄭載圭書也。此人與義林。姓氏相同。年紀相近。才性相似。至於所居地名亦不異。甚非偶然。故留此欲爲義林示之也。三嘉有鄭斯文之賢。前此蓋已稔聞。豈知醜差之身。與有所同。而倂見稱道於師門哉。私情悚惕。固知不敢承膺。而區區嚮仰之心。自此而有加矣。玆因轉遞。謹以姓名自通。而至於一番承接。則闊然無期。越明年乙亥冬十月。余往拜先生於沙上。厚允先三日至。明年夏四月。余往拜先生於珍邱寓舍。厚允又先三日至。是豈人謀所及哉。面以證期。手以置契。兩諾俱應。極其丁寧。而終至汗渙緯繣不如吾意者。十居八九。況漫漫半千里。初無一言之約哉。然不先不後。嚮合如神。至一至再。奉接如期。此在尋常之地。猶爲奇絶。乃有所同而見道於師門。曾是珍重者耶。先生顧謂二子曰。此是曠世奇絶事。盍各記諸以示不忘也。於是謹序述顚末。而因念厚允學問操守。實非如愚所可及者。然前後奇遇。若是種種。則厚允於母友不如之訓。似不當膠守矣。矜此不能。惠爾不遐。提挈警覺。俾與之同歸。則不惟爲副此曠絶之遇。而亦豈非我先生眷眷稱道之意耶。仍有詩曰。堪愧四同說。最奇再遇緣。先生命以記。此意正淵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