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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1
  • 잡저(雜著)
  • 전우가 지은 노사선생 〈납량사의기의〉를 변석함(辨田愚所著。蘆沙先生納凉私議記疑。)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1 / 잡저(雜著)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1.0001.TXT.0001
전우가 지은 노사선생 〈납량사의기의〉를 변석함
○〈납량사의(納凉私議)〉주 1)
"분(分)이라는 것은 이일(理一) 안에 있는 세세한 조리(條理)이니 이(理)와 분(分)은 층절(層節)이 있을 수 없다. 분(分)이 이(理)의 대(對)가 아니라 '분수(分殊)'가 곧 일(一)의 대이다."

○〈납량사의기의(納凉私議記疑)〉
"이 말은 얼핏 보아서는 의심할 만한 점이 없다. 다만 노사(蘆沙)의 〈기경도(奇景道)에게 답하는 편지〉에 이르기를, '하늘에 이 분(分)이 원래 없었다면 사람과 사물이 어디에서 얻어 편전(偏全)주 2)을 지니게 되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여기서 분(分)이 세세한 조리라고 한 것은 훗날 사람과 사물이 얻게 되는 편본연(偏本然)과 전본연(全本然)의 근원이 될 것이다.
내가 생각건대, 편(偏)과 분(分)은 원래 일관(一串)된 것이 아니다. 분(分)은 일신(一身)의 귀나 눈, 손이나 발과 같고 편(偏)은 한쪽 귀만으로 듣고 몸이 한쪽만 기능하는 것과 같다. 분(分)은 일(一) 안에 본래 있는 이(理)이고 편(偏)은 기(氣)의 측면에서 전(全)의 대가 되는 성(性)이니, 똑같이 얘기하기 어려울 듯하다."

○〈변(辨)〉
이(理)에 분(分)이 있으므로 물(物)에 편전(偏全)이 있다. 이(理)에 분(分)이 없다면 물(物)이 어디에서 편전(偏全)을 얻겠는가. 지금 "분(分)은 일신(一身)의 귀나 눈, 손이나 발과 같고 일(一) 안에 본래부터 있다."라고 했으니 이 설을 가지고 밝히고자 한다.
귀, 눈, 손, 발 등의 백해(百骸 모든 뼈)와 백체(百體 온갖 부분)이 합쳐져 일신(一身)의 전체를 이루고 사람, 짐승, 풀, 나무 등 만상(萬象 모든 형상)과 만물(萬物 온갖 사물)이 합쳐져 천지의 전체를 이룬다. 사람 몸의 전체를 이루는 이(理)가 본래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는 것은 알면서도 천지의 전체를 이루는 이(理)가 본래 형체가 갖추어지기 전부터 있었다는 것은 모르는가. 사람의 귀, 눈, 손, 발이 본래부터 있었다는 것을 안다면 새와 짐승의 깃, 털, 발굽, 뿔과 풀과 나무의 줄기, 잎새, 꽃, 열매 또한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사람과 사물의 편전(偏全)은 과연 천명의 본연(本然)이 아니겠는가. 분(分)과 편전(偏全)이 만약 일관(一串)되지 않다면 주자(朱子)는 어떻게 덮어주고 실어주어 낳고 이루어 주는 편벽됨[偏]을 말하였겠는가.주 3) 또 어떻게 사람과 사물이 태어날 때 그 부여받은 형체가 치우치거나 올바른 것은 본디 처음부터 같지 않다고 말하였겠는가.주 4) 한 귀로만 듣고 한 쪽 몸만 기능하는 것에 대해 말하자면, 기(氣)가 고르지 못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어찌 이를 인용하여 주장을 펼 수 있겠는가.

○〈납량사의〉
"주자(朱子)가 이르기를, '태극(太極)이라는 것은 상수(象數)가 아직 드러나지 않았으나 그에 관한 이(理)가 이미 갖추어진 것을 일컫고, 형기(形器)가 이미 갖추어져 있으나 그에 관한 이(理)는 조짐이 없는 것을 가리킨다.'주 5)라고 하였다. 상수가 드러나지 않았다면 아직 깨어지지 않은 일(一)이고 그에 관한 이(理)가 이미 갖추어졌다면 분(分)이 이미 포함된 것이 아니겠는가. 형기가 이미 갖추어졌다면 이미 정해진 분(分)이고 그에 관한 이(理)는 조짐이 없다면 일(一)의 자재(自在)가 아니겠는가."

○〈납량사의기의〉
"알 수 없지만, 노사(蘆沙)는 그에 관한 이(理)가 이미 갖추어진 것을 사람과 사물이 하늘로부터 받는 편전(偏全)의 근원이라고 생각하였는가? 삼가 생각건대 이 구절에 담긴 뜻은 부자, 군신 관계가 생기기 전에 자(慈), 효(孝), 예(禮), 충(忠)의 이치가 이미 갖추어지고 사물의 미세함이 있기도 전에 사물의 미세함에 대한 이치가 이미 갖추어졌다는 것일 뿐이다. 성인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이일(理一) 안에 있는 분(分)과 수(殊)의 온전한 이치를 지니고 있고, 현인(賢人)과 중인(衆人)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온전하지 못한 약간의 이치를 지니고 있고, 지극히 어리석은 자와 매우 악독한 자는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전혀 바뀌지 않고 전혀 정리(情理)에 맞지 않는 이치를 지니고 있고, 조수 초목(鳥獸草木)은 생겨나기도 전에 이미 치우치고 막힌[偏塞] 이치를 지니고 있어 각각 온갖 형상이 얻는 근원이 된다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노사(蘆沙)가 이른 '하늘에 원래 이 분(分)이 없었다면 사람과 사물이 어느 곳에서 얻어 이 편전(偏全)을 가지게 되었겠는가.'라는 것과 판연하게 차이가 나니 의심할 만하다."

〈변(辨)〉
천지를 가득 채우고 있는 크고 작은 모든 것은 상수(象數)와 형기(形器)가 아닌 사물이 없다. 그렇다면 사람이 태어나기도 전에 사람에 관한 이치는 이미 갖추어지고 사물이 생기기도 전에 사물에 관한 이치가 이미 갖추어진 것에 대해서 어찌 많은 말을 하겠는가. 저 사람이 이 의리에 대해서 반드시 모르는 것은 아니건만, 고의적으로 기질(氣質), 분수(分數), 지극히 어리석은 자, 매우 악독한 자 등의 말을 인용하여 그 설을 현혹되고 혼란스럽게 만들어 일시적으로 남을 능가하려는 사사로움을 이루었다. 아, 마음을 쓰는 것이 이와 같으니 이러한 이치(理致)의 득실은 오히려 사소한 일이다.
하늘은 덮어주는 일에 치우치고 땅은 실어주는 일에 치우치며 해는 낮에 치우치고 달은 밤에 치우치며 눈은 보는 일에 치우치고 귀는 듣는 데 치우치며 손은 쥐는 데 치우치고 발은 걷는 일에 치우친다. 밝디밝은 것으로 하늘을 보면 하늘이 온전하고, 끊임없이 흐르는 것으로 하해(河海)를 보면 하해가 온전하며, 잎사귀 하나로 나무 한 그루를 보면 나무 한 그루가 온전하고, 하나의 사지(四肢)로 일신(一身)을 보면 일신이 온전하다. 세상에서 어떤 사물이 과연 편전(偏全)에서 벗어나겠는가. 이것을 본연(本然)이 아니라고 한다면 세상에 다시는 본연이 없게 된 지 오래일 것이다. 또한 조수 초목이 이(理)에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사람은 어떤 사물이라서 유독 이(理)에 본래 있는 것이 되겠는가. 사람이 이미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면 자(慈), 효(孝), 예(禮), 충(忠)의 이(理)는 어찌 유독 본래 지니게 되고 어디에 이미 갖추었겠는가. 어찌 처리하는 데만 급급하여 살필 겨를을 두지 않는가.

○ 〈납량사의〉
"'성(性)은 같다.'라는 것에 대해서 내가 그렇지 않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편전(偏全)의 성(性)을 본연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것은 분(分) 밖에 이(理)를 두는 것이다. 결국 같은 것을 주로 삼아 다른 것을 폐기한다면 성(性)은 체(體)만 있고 용(用)이 없는 사물이 된다."

○ 〈납량사의기의〉
"낙가(洛家)주 6)들이 성(性)에서 발현되어 나오는 충(忠), 효(孝), 인(仁), 양(讓)을 가리켜 '이것은 분(分)의 수(殊)이지 본연의 성(性)이 아니다.'라고 한다면 분(分) 밖에 이(理)가 있고 성(性)은 용(用)이 없는 사물이 된다. 다만 '만상(萬象 모든 형상)의 성(性)은 체(體)가 본래 온전하며 배워서 아는 사람[學知]부터 날짐승, 들짐승, 초목의 발현에 이르도록 각각 하늘로부터 받은 기(氣)에 따라서 스스로 하나의 성(性)을 이룬다고 하였으니 한 칸을 못 미치는 것[未逹一間]주 7)에서 아주 조금만 아는 것[一點子]주 8)에 이르기까지, 서로 비슷한 것[相近]에서 완전히 다른 것[絶不同]주 9)까지, 하늘이 내린 성인[天縱之聖]주 10)으로부터 지극히 어리석어 바뀌지 않는 사람[下愚不移]주 11)에 이르기까지 품류(品類)가 만 가지로 다르다.'라고 한다면 이것을 어떻게 모두 본연의 성이라고 이를 수 있겠는가."

〈변〉
기(氣)의 청탁(淸濁), 수박(粹駁)은 본래 만나는 바대로 우연히 정해지지만 온갖 사물이 생겨나고 편(偏)과 전(全)이 나뉘는 것 또한 만나는 바대로 우연히 정해지겠는가. 만약 만나는 바대로 우연히 정해진다면 콩은 오이가 될 수 있고 오이는 콩이 될 수 있고 말은 뿔이 날 수 있고 소는 갈기가 날 수 있다. 상제(上帝)가 주재(主宰)하는 것과 건도(乾道)가 각각 바로잡는 것[各正]주 12)은 과연 무슨 일이겠는가? 편(偏), 전(全), 분(分)이라는 말을 지키려다가 상제는 주재의 기능을 놓치고 건도(乾道)는 자기의 직임을 잃는 데 이른다면 옳겠는가, 그르겠는가?
만상(萬象)의 성(性)은 그 체(體)가 본래 온전하건만 발현(發現) 단계에 이르러 스스로 하나의 성(性)이 된다면, 이것이 과연 말이 되겠는가. 그렇다면 개의 성(性), 소의 성이 사람의 성(性)과 온전함을 함께하고 풀의 성(性), 나무의 성이 하늘의 성(性)과 그 위대함을 함께하다가 발현의 단계에 이른 뒤에야 비로소 하늘이 되고 사람이 되고 개나 소가 되고 풀이나 나무가 되겠는가. 말에 근거가 없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대신 얼굴을 붉히게 만든다.

○ 〈납량사의〉
"천하의 성(性)은 온전하지[全] 않으면 치우쳤으니[偏], 참으로 온전하지도 않고 치우치지도 않은 성은 없다. 편(偏)과 전(全)이 모두 본연(本然)이 아니라면 천하에 그 본연의 성을 성으로 삼을 수 있는 사물은 하나도 없고 본연의 성은 영원히 허공에 매달린 비어있는 자리가 될 것이니, 장차 어디에 저 성을 쓰겠는가. 정통(正通)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본연의 성을 얻었기 때문이다. 편색(偏塞)과 더불어 똑같이 본연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찌 정통을 귀하게 여길 수 있겠는가. 대개 분(分)이 없는 것을 일(一)로 여긴다면 그 폐단이 반드시 여기에 이르게 된다. 각정(各正)의 성(性)을 분수(分殊)에 떨어지고 형기(形器)를 범한 것으로 보아 일원(一原)으로 삼기에 부족하다고 여긴다면, 갑변(甲邊)의 의론과 차이가 없을 듯하다."

○ 〈납량사의기의〉
"'기질(氣質)이 다르다면 천명(天命)의 성(性)에는 편전(偏全)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주자(朱子)는 '편전이 있는 것이 아니다.'주 13)라고 하였다. 이것이 낙가(洛家)들이 근본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이제 만약 이를 비난하여 '천하의 성(性)이 편(偏)도 없고 전(全)도 없다면 비어있는 자리가 되는 데 불과하다.'라고 한다면 어찌 남의 말뜻을 다 파악한 것이 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다양하게 살피지 않더라도 명확히 드러난다. '정통(正通)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본연(本然)의 온전함[全]을 얻었기 때문이다.'라고 하니 그렇다면 편색(偏塞)한 것은 단지 본연의 편(偏)만 얻었을 뿐이어서 '천명의 성(性)에는 편전(偏全)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과 서로 어긋나지 않겠는가. 이를 바로잡아서 '정통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본연의 성을 온전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다면 의논의 여지가 없을 듯하다."

〈변〉
주자(朱子)는 "편전이 있는 것이 아니다."주 14)라고 하고, 또 "사람과 사물이 생겨날 때 그 부여받은 형체가 치우치거나 바른 것은 본디 처음부터 같지 않기 때문이다."주 15)라고 하였다. 모름지기 이(理)에 편전(偏全)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또 이(理)는 편전이 없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 연후에야 비로소 이치를 안다고 이를 수 있다. 천명의 성을 부여한 까닭은 본래 사람과 사물이 귀천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니 이것은 편전이 없음을 이른다. 만수(萬殊)의 분(分)이 일원(一原) 안에 성대하게 이미 갖추어진 것은 편전이 있음을 이른다.
편전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만 알고 사람과 사물에 각정(各正)의 성(性)이 없다고 하거나, 본디 처음부터 같지 않다는 말만 알고 사람과 사물에 일본(一本)의 성(性)이 없다고 하는 것은 모두 하나를 고집하여 백을 저버리고 이것을 얻느라고 저것을 잃는 것이다. 주자(朱子)가 입언(立言)한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서 도리어 남의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남을 비난하는가. 주자는 "각정(各正)은 만물이 태어나는 초기에 얻는다."주 16)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정통(正通)한 자는 본연의 전(全)을 얻고 편색한 자는 본연의 편(偏)을 얻는 것을 또 어찌 의심하겠는가.

○〈납량사의〉
"편전(偏全)은 선(善)의 한쪽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마치 구멍에 크고 작음은 있더라도 달빛은 그대로이고, 그릇에 네모와 둥긂이 있어도 물의 성질이 차이가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것이 어찌 본연이 아니겠는가."

○〈납량사의기의〉
"진실로 이 말과 같다면 벌과 호랑이와 원숭이의 인의(仁義)주 17)와 요(堯)ㆍ순(舜)ㆍ주공(周公)ㆍ공자(孔子)의 인의가 터럭만큼의 차이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주자(朱子)는 무엇을 가지고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수연(粹然)은 사람과 사물이 다르다주 18)고 하였는가?"

〈변〉
저 사람[간재(艮齋)]은 편전(偏全)을 본연이 아니라고 여겨 "만물의 성(性)은 그 체(體)가 본래 온전하다."라고 하였다. 편전을 도외시하고 '본래 온전하다'라고 말한다면 벌과 호랑이의 성(性)과 요순(堯舜)의 성은 과연 터럭만큼의 차이도 없으니 창을 거꾸로 들고 자신을 공격한다고 이를 만하다. 사람과 사물은 분(分)이 다르다[分殊]고 말하면 그 체(體)가 본래 온전한 것으로 반박을 하고, 사람과 사물의 성(性)이 같다고 말하면 벌과 호랑이의 원숭이로 비난을 하니 또한 정론(定論)은 없고 그 사람이 주장하는 바에 따라 공격하는 것이라고 이를 만하다.

○〈납량사의〉
"기질(氣質)은 선악을 겸하여 진흙에 섞인 물이 짙거나 맑은 정도가 백 겹이나 되고 창문 너머 비치는 달빛이 밝고 어두운 정도가 각양각색인 것과 같다. 편전(偏全)을 기질이라고 한다면 어찌 편전을 낮추는 것이 아니겠는가."

○〈납량사의기의〉
"요, 순, 공자의 온전함은 진실로 본연(本然)이다. 백이(伯夷), 유하혜(柳下惠)가 청(淸)과 화(和)에 치우친 것, 안연(顏淵)과 민자건(閔子騫)이 성인의 체식을 갖추었으나 미미했던 것, 자유(子游), 자하(子夏)가 겨우 일체(一體)만 지닌 것주 19)이 어찌 기질로부터 말미암지 않았겠는가. 이러한 유형은 선악을 겸했다고 이를 수 없다. 사람조차 이와 같으니 하물며 미물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지금 편전(偏全)을 기질로 여기려고 하지 않는다면 끝내 의심스러울 듯하다."

〈변〉
백이, 유하혜, 자유, 자하의 치우침은 기질의 선(善)한 부분이다. 걸(桀), 주(紂), 유(幽), 여(厲)의 포악함은 기질의 악(惡)한 부분이 아니겠는가. 비록 선(善)이라는 한쪽 부분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약간 미진한 곳은 또한 선하지 못한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지금 도리어 단지 선한 부분만 들어서 선악을 겸하지 않았다고 이른다면 되겠는가. 편전(偏全)에 대한 언급은 다시 변론할 필요가 없다.

○〈납량사의〉
"기질의 성을 성으로 여기지 않는 군자들이 있는데, 사람과 사물의 편전(偏全)의 성 또한 성으로 여기지 않은 군자들이 있도다!"

○〈납량사의기의〉
"'기질(氣質)의 성(性)을 성으로 여기지 않는 군자가 있다.'라는 말은 횡거 선생(橫渠先生 장재(張載))의 말에 근거한다. 선생은 또 일찍이 말하기를, '모든 사물은 이 성(性)을 지니지 않은 것이 없다. 통하기도 하고, 가려지기도 하고, 열리기도 하고, 막히기도 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사람과 사물의 구별이 있고, 가려지는 것에 두텁고 옅음이 있으므로 지혜로움과 어리석음의 구별이 있다.'주 20)라고 하였다. 만약 위의 한 단락을 편색(偏塞)으로 여겨 본연의 성(性)에 귀속시키고 아래의 한 단락을 기질(氣質)로 여겨 성(性)으로 여기지 않는 등급으로 내린다면 문의(文義)나 사리(事理)가 모두 노사(蘆沙)의 말처럼 되기는 어려울 듯하다.
'기질이 같지 않다면 천명의 성도 편전(偏全)이 있는가?'라고 묻자, 주자(朱子)는 '하늘이 부여한 성(性)은 편전(偏全)이 없다.'주 21)라고 하였으니, 편전의 성(性)이 어찌 주자가 성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 아니겠는가. 여기에 근거한다면 남당(南塘)과 노사(蘆沙) 둘의 주장은 다시 자세히 논의해야 할 듯하고 천고 불변의 논의로 인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변〉
횡거 선생(橫渠先生)의 이 주장은 주된 의도를 오로지 인물의 현명함과 어리석음, 통함이나 가려짐과 열림이나 막힘[通蔽開塞], 두터움이나 옅음과 어려움과 쉬움[厚薄難易]의 구분에 두고 차례대로 얘기하였다. 문세(文勢)와 어맥(語脈)이 본연과 기질에 대해서 미칠 겨를이 없었으니 또 어찌 이 편전은 분(分)이 아니라는 오늘날의 주장이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미리 준비하였겠는가. 기질에서 말미암은 편전(偏全)은 본래 성(性)으로 여기지 않지만, 이분(理分)에서 비롯된 편전 또한 성으로 여기지 않는가? 편언(偏言)의 인(仁)과 전언(專言)의 인주 22) 또한 주자가 성으로 여기지 않았는가. 덮어주고 실어주어 낳고 이루어주는[覆載生成] 편(偏)을 천지도 또한 성으로 여기지 않았는가. 천고 불변의 논의는 아마도 개개인이 모두 알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주자는 '사람과 사물의 성(性)은 부여받은 형체의 편정(偏正)이 원래 다르다. 그러나 다른 가운데 또 각자 저절로 청탁(淸濁), 수잡(粹雜)의 다름이 있다.'주 23)라고 하였다. 상단(上段)에서 말하는 다름[不同]은 본연(本然)의 분(分)이고 하단에서 말하는 다름[不同]은 기질의 차이[異]이다. 《중용장구(中庸章句)》에서는 먼저 사람과 사물이 각각 얻는 분(分)을 말하고 다음으로 부여받은 기질이 다르기도 한 것에 대해서 말하였다. 횡거(橫渠)의 이 말 또한 이러한 뜻이다. 어찌 아래 한 부분에서 기질을 말한 것을 가지고 위 한 부분에 거짓으로 연결시켜 또 기질로 간주하겠는가.

○〈납량사의〉
"이(理)를 이미 만사의 본령이라고 했건만, 기(氣)는 어떤 물건이기에 유독 너는 하나로 보고 나는 다른 것으로 보아 서로 배치되는가? 근세의 여러 선생이 이(理)와 분(分)을 나누어 대체로 모두가 '너는 하나[一]로 보고 나는 다른 것[殊]으로 본다.'라고 의론을 벌였다. 그 폐해는 기(氣)가 이(理)의 명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이가 기의 제재를 받아 '하늘이 명한 것이 성(性)이다.'는 한갓 헛된 말이 되었다."

○〈납량사의기의〉
"이일분수(理一分殊)는 본래 이(理)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분수(分殊)에 대해서 선현(先賢) 가운데는 곧바로 기이처(氣異處)를 가지고 말 한 자가 매우 많다. 지금 우선 틈새에 비친 해[日]로 비유하자면 틈의 길이와 크기는 본래 다르지만 단지 그 해일 뿐이다. 단지 그 해라는 것이 이일(理一)이고 틈이 각각 다른 것이 분수(分殊)이다. 이것은 앞의 일의(一義)와 병행이 가능하며 서로 장애가 되지 않는다. 하늘이 명한 성(性)이 비록 매우 온전하고 더할 나위 없이 선(善)하더라도 부여된 형기(形氣)의 차이를 어쩌지 못하여 누구도 본연(本然)을 완수할 수 없다. 비록 성(性)이 체(體)이고 기(氣)가 용(用)일지라도 역시 이(理)가 약하고 기(氣)가 강하기 때문에 가려짐이 없을 수 없다. 만약 분수(分殊)를 오로지 이(理)로 돌린다면 이(理)는 과연 기(氣)를 호령하고 기(氣)는 과연 이(理)에 순종하여 더 이상 다스려지지 않는 나라가 없고 더 이상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이 없게 된다. 이와 같이 주장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변〉
본원(本原)으로 말하자면 조리(條理)와 분수(分殊)가 본래 찬연하게 잘 갖추어졌으니 이것이 도기(道器)가 뒤섞이지 않은 곳이고 태극권(太極圈)주 24)이 배출(排出)된 까닭이다. 유행(流行)으로 말하자면 조리와 분수(分數)는 기(氣)에 나아가 그 실제를 볼 수 있으니 이것이 도기(道器)가 떨어지지 않는 곳이고 음양권(陰陽圈)과 오행권(五行圈)이 각각 갖추어지게 된 까닭이다. 선현 중에 기이처(氣異處)에 나아가 분수를 말하는 자가 많았던 것은 이 때문이다. 만약 틈새에 비치는 해로 비유하자면 틈에 길이와 크기의 차이가 있더라도 그 길이와 크기에 따라 비추는 빛은 본래 찬연하게 해에 갖추어져 있다. 빛이 형체를 이루고 자취를 드러내는 것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 틈에 나아가 실제를 볼 수 있다.
이(理)가 기(氣)의 주인이라는 말이 어찌 일찍이 작용(作用)이 있고 호령(號令)을 하는 것을 이르렀겠는가. 그러나 그 이(理)가 없으면 그 일이 없고 그 이(理)가 있으면 그 일이 있다. 작용의 이(理)가 있으므로 기(氣)가 작용할 수 있고 호령의 이(理)가 있으므로 사람이 호령할 수 있다. 만약 조리(條理)와 분수(分數)를 모두 기(氣)에 귀결시킨다면 3백, 3천의 예(禮)주 25)가 모두 본연(本然)이 아니니 세교(世敎)와 관계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이미 '분(分)은 이(理) 안의 일이다.'라고 하면서 이어서 분수(分殊)를 오로지 해가 비치는 틈에 돌리며, 이미 '천명(天命)의 성이 십분(十分) 온전하다.'라고 하면서 이어서 분수(分殊)를 오로지 이(理)로 돌리지 않으니, '이(理)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이 과연 무슨 일이며 '십분(十分)'이라는 것은 과연 몇 푼이나 되겠는가. '병행하면서 서로 장애가 되지 않음'을 알지 못하겠다.
성(性)이 체(體)이고 기(氣)가 용(用)이라고 한다면 성(性)은 체(體)는 있지만 용(用)이 없는 사물이겠는가. 이와 같다면 정자(程子)가 이른바 '체(體)와 용(用)은 하나의 근원이다.[體用一原]'라는 것은 2개의 근원[二原]이 되고 이른바 '드러남과 은미함은 간격이 없다.[顯微無間]'주 26)는 것은 간격이 있게[有間]이 되고 이른바 '미응(未應)이 먼저가 아니고 이응(已應)이 나중이 아니다.[未應不是先 已應不是後]'주 27)라는 것은 선후(先後)가 있게 된다. 근세의 주기설(主氣說)은 잘못된 것이 대체로 여기에서 기인한다.
만약 다스려지지 않는 나라,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 때문에 이(理)가 주인이 아니라고 의심한다면 덕을 질투하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백성들은 덕을 좋아한다는 말을 배척하고 성품이 악한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맹자(孟子)의 성선설(性善說)을 폐기하는 것이니 그 설이 궁색함을 알 수 있다.

○〈납량사의〉
"오상(五常)이 사람과 사물에게 같은지 다른지는 결국 어디에서 정해지는가? 이것은 선각자(先覺者)의 말에 의해 정해진다. 주자(朱子)가 참으로 이것을 많이 논하였다. 《사서(四書)》에 대한 그의 주해(注解)와 설명에 보이는 내용은 직접 썼다는 점과 합당함으로 보자면 기록이나 편지에 견줄 바가 아니다. 《사서》의 주해에서 사람과 사물의 오상(五常)에 관해서 말한 것이 모두 세 곳이다. '사람과 사물이 생길 때에 반드시 이 이(理)를 얻은 뒤에 건순(健順)과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성(性)이 있게 된다.'라고 말한 것은 《대학혹문(大學或問)》에 나온다. '사람과 사물이 생길 때에 각각 이(理)를 타고나서 건순(健順)과 오상(五常)의 덕으로 삼는다.'라고 말한 것은 《중용장구(中庸章句)》에 나온다. 이 두 조목은 모두 사람과 사물을 구분하지 않고 일률적으로 설명을 하였으니, 문리에 대략 통한 사람이라면 애초에 변별하기가 어렵지 않다. 또 '얻어서 성(性)으로 삼는다.', '얻어서 덕으로 삼는다.'라고 한 것은 모두 모두 〈계사전〉에서 말한 성지자성(成之者性) 이하의 일에 속하지 계지자성(繼之者善) 이상의 일이 아니니, 주자의 의도는 사람과 사물의 성이 생겨날 때 이 오상을 동일하게 갖추고 있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유독 《맹자》 '생지위성(生之謂性)' 장의 집주에서 '이(理)로 말하면 인의예지의 순수함이 어찌 사물이 온전히 얻을 바이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전우(田愚)가 살피건대, '수연(粹然)'은 어떤 본에는 '품(稟)'으로 되어 있고 '이(以)'는 '이(而)'로 되어 있다.- 이것은 사람과 사물을 구분한 곳이다. -전우가 생각건대, 이 주석 또한 사람과 사물을 구별하는 데 중점을 둔 것이 아니다. 왜 그렇게 말하는가? 위 문장에서 성(性)은 형이상자(形而上者)라고 하였다. 사람과 사물이 생겨날 때 이 성(性)을 지니지 않는 경우가 없는데 이 성(性)은 무슨 성인가? 바로 이른바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성이다. 이는 《중용장구》와 《대학혹문》이 같다. 만일 '사물이 어찌 온전함을 얻었겠는가.'라고 한 것을 사람과 사물을 구분하는 단안으로 여긴다면 《중용장구》의 다음 문장에서 어찌 '기품에 차이가 있으므로 과불급의 차이가 없을 수 없다.'라고 말하지 않았으며, 《대학혹문》의 다음 문장에서 어찌 '저 미천하여 사물이 된 것은 형기에 질곡되어 그 온전함을 확충하지 못한다.'라고 말하지 않았겠는가? 이 두 조목은 또 모두 《맹자》 주석의 내용과 조금의 차이도 없다. 내가 생각건대, 세 곳은 모두 체는 같고 용은 다르다는 설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사물이 어찌 온전히 얻겠는가.'라고 말했을 뿐이지 '사물은 함께할 수 없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또한 사람과 사물이 오상을 동일하게 지녔다는 말이다. 주자(朱子)가 이 주장을 한 것이 어찌 새로운 논의를 펼치기 좋아하여 인도(人道)를 만물과 동일시한 것이겠는가.
대체로 이 이치 외에 더 이상 다른 이치는 없다. 따라서 단지 다만 위 성현에서부터 인성이라는 글자를 넷으로 쪼개고 만물에까지 일관시켰다고 해서 혐의쩍게 여기지 않은 것이다. -전우가 생각건대, 이상의 논의는 낙가(洛家)와 일치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렇더라도 일(一)이면서 분(分)이 없다면 내가 말하는 일(一)이 아니다. 그래서 《중용혹문》과 《대학혹문》에서 곧 말하기를 '새와 짐승, 풀과 나무가 생길 때 겨우 형기(形氣)의 치우침만 얻고 전체를 관통하지 못했으니, 저 천하여 사물이 된 것들은 형기의 치우치고 막힘에 구애를 받아 그 본체의 온전함을 확충할 수 없다.'주 28)라고 하였다. 이것은 사람과 사물의 성(性)이 이 일리(一理)를 함께 지니고 있더라도, 이(理)에서 다시 나뉜 한계[分限]가 없을 수 없음을 말한다. 기(氣)는 이 이(理)를 태우고 싣는 것이므로 형기를 떠나서 분(分)을 말하지는 못하더라도 일(一)에 분(分)이 없었던 적이 없음을 여기에서 인하여 볼 수 있다.
위와 아래의 이 문의(文義)를 합하여 보자면, 《맹자》 '생지위성(生之謂性)' 장의 집주와 또한 뜻이 다르지 않다. 후세 사람들이 각각 절반씩을 점유하여 올리고 내리고 하니, 이것이 어찌 주자가 예상할 수 있었던 바이겠는가. 이를 통해 물(物)과 아(我)가 오상(五常)을 균등히 가지고 있는 것은 이(理)의 일(一)이고, 오상에 편전(偏全)이 있는 것은 일(一) 안에 있는 분(分)임을 알 수 있다. 대개 통체일태극(統體一太極)으로부터 이(理)와 분(分)이 원융(圓融)하여 간극이 없기 때문에 만물에서 성(性)을 이루는 것도 이와 같다. 그러므로 선각자들이 성을 논할 때 이(理)가 같다고 말하는 이도 있고 이(理)가 같지 않다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서로 주장이 괴리되는 것이 아니다.
공공의 관점에서 그 묘(妙)를 논할 때는 배출(排出)의 측면에서 말하고 참되고 분명하게 그 체(體)를 가리킬 때는 즉기(卽氣)의 측면에서 밝힌다. 배출(排出)의 측면이라면 이(理)는 본래 하나이므로 이일(理一)이 주가 되어 만수(萬殊)가 그 가운데에 포함되고, -전우가 생각건대, 치우치고 온전하지 않은 것을 만수(萬殊)로 보는 것은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즉기(卽氣)의 측면이라면 기(氣)가 이미 나누어지므로 분수(分殊)가 주가 되어 이일(理一)이 그 사이에 있다. 이로부터 말에 두 가지가 있게 된 것이지 어찌 성(性)에 다양한 층절(層節)이 있겠는가. 제가(諸家)는 이(理)와 분(分)이 일체(一體)가 되는 곳으로 인하여 깊이 착안하지 못하였다. 다름을 말하면 오상(五常)을 홀로 차지하려 하고 같음을 말하면 이내 편전(偏全)을 낮추어 보니, 털끝만큼의 차이로 천리(千里)가 어긋난다는 말을 어찌 믿지 않겠는가."

○〈납량사의기의〉
"《중용혹문》, 《대학혹문》이 만약 미물(微物)만 단언(單言)하고 중인(衆人 평범한 사람)을 함께 거론하지 않았다면 노사(蘆沙)의 말과 같을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그 문장에서 지우(知愚)와 현부(賢否)의 기품(氣稟)이 다름에 대해서 분명하고도 분명하게 말하고 또 '이른바 성(性)이라는 것에는 혼잡(昏雜)한 바가 있어 받은 바의 바른 것을 온전히 할 방도가 없다.'라고 하고, 또 '이른바 명덕(明德)이라는 것은 이미 폐단이 없을 수 없어 온전함을 잃었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미물은 통하지 못하여 확충한 방도가 없다.'라는 것과 말의 뜻이 일치하여 유별(類別)과 체례(體例)에 다름이 없으니 '통하지 못하여 확충할 방도가 없다'는 것을 본연의 성(性)으로 귀결시키고 '온전히 할 방도가 없다', '온전함을 잃었다'는 것을 기질의 성으로 귀결시키면 공평함을 잃었다는 혐의가 있지 않겠는가. 만약 누군가가 노사(蘆沙)에게 묻기를, '성인(聖人)과 범인(凡人)의 덕성(德性)이 균일한 것은 이(理)의 일(一)이고, 덕성에 편전(偏全)이 있는 것은 일(一)의 분(分)이다.'라고 묻는다면 장차 대답하기를 옳다고 하지 않겠는가."

〈변〉
사람과 사물에 대해서 오성(五性 오상(五常))을 아울러 거론한 것은 3곳이다. 그래서 선사(先師)께서 그렇게 말했을 뿐이지, 하문(下文)에서 있고 없음을 구분한 것에 대해서는 논의할 필요가 없다. 《중용장구(中庸章句)》에서 "기품이 간혹 다르다."라고 한 것은 사람과 사물을 구분한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물에 대해서 기품(氣稟)이 같지 않음을 구분한 것이다. 사람과 사물을 구분한 것은 이미 상문(上文)인 "하늘이 음양과 오행으로 만물을 화육(化育)하고 생장(生長)하게 한다."라는 조에 있으니 이것으로 또한 사람과 사물의 편전(偏全)이 본연(本然)의 분(分)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체(體)는 같지만 용(用)이 다르다."주 29)라는 주장과 "성(性)은 체(體)이고 기(氣)는 용(用)이다."라는 주장은 동일한 권투(圈套, 올가미를 씌우는 수단)이니 많은 변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른바 낙가(洛家)와 같다는 것은 실제로는 같지 않다. 선사(先師)가 같다고 한 것은 곧 실(實)의 같음이고 제가(諸家)가 같다고 한 것은 도리어 허(虛)의 같음이다. 《중용혹문》과 《대학혹문》은 주로 천명(天命), 명덕(明德), 인물(人物)의 일원(一原)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 시말(始末)의 곡절과 다과(多寡)의 분수(分數)를 구별하였다. 그래서 초목과 금수로부터 중인(衆人)과 현인(賢人)에 이르고 성인(聖人)이 본성(本性)을 발휘함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쳤다. 어맥(語脈)과 차례는 진실로 이와 같아야 한다. 본연(本然)과 기질(氣質)에 대해서는 원래 달리 주장하였으니 구별할 겨를이 없다.
《중용장구》에 "사람과 사물은 각각 부여받은 이(理)를 얻는다."라고 하였다. 또 "사람과 사물은 각각 성(性)의 자연을 따른다."라고 하였다. 《대학혹문》에서는 "전체를 관통함이 없다."라고 하고 또 "그 본체를 확충할 방도가 없다."라고 하였다. 어찌하여 《중용장구》에 대해서는 포양을 하고 《대학혹문》에 대해서는 폄훼를 하였는가.
대체로 《중용장구》에서는 부여받은 본연의 묘(妙)를 말하고 《대학혹문》에서는 부여받은 분수(分數)의 이(異)를 말하였다. 이제 폄훼한 것을 보고 본연이 아니라고 여긴다면 포양한 것까지 더불어 본연이 아니라고 여기겠는가. '온전히 할 방도가 없고', '온전함을 잃는다'는 것이 곧 《중용장구》에서 말하는 "기품(氣稟)이 다르기도 하다."라는 것이고 도를 닦고 교화를 펼치는 곳이 된다.

○〈납량사의〉
"본체(本體)이면서도 '확충할 수 없다.[無以充]'라고 하였으니 본체가 본성의 영역[性分]이 되는가, 아니면 '무이충(無以充)' 3자에 이르러 비로소 본성의 영역이 되는가? 전체(全體)이면서도 '통할 수 없다.[不能通貫]'라고 하였으니 전체가 본성의 영역이 되는가, 아니면 '불능관통(不能通貫)' 4자에 이르러 비로소 본성의 영역이 되는가? 내가 말하기를, '본체와 전체는 곧 본성의 영역 중에 이일(理一)에 해당하는 곳이요, 확충할 수 없고 관통할 수 없다는 것은 곧 그 본성의 영역 중에 분수(分殊)에 해당하는 곳이다. 두 가지 사리(事理)는 있으면 함께 있는 것인데 지금 반드시 둘로 나누어 논하려 하니 잘못되었다.'라고 하였다."

○〈납량사의기의〉
"'확충할 수 없고', '통할 수 없는' 것은 분명히 형기(形氣)가 치우치고 막힌 병통이다. 지금 만약 반드시 성(性)의 분수(分殊)로 여긴다면 사람들을 의혹스럽게 할 것이다. 또 《대학》으로 논하더라도, '하늘이 백성을 낳으면서 모두에게 성(性)을 부여하였다.'라고 한 것은 본성의 영역 중에서 이일(理一)에 해당하는 곳이고, '기품(氣稟)이 가지런하지 않아서 모두 온전할 수가 없다.'주 30)라는 것은 본성의 영역 중에서 분수(分殊)에 해당하는 곳이다. '허령(虛靈)하여 온갖 이치를 갖추고 만사에 응한다.'는 것은 덕의 영역 중에서 이일(理一)에 해당하는 곳이고, '얽매이고 가리워져 혼매하기도 하다.'주 31)는 것은 덕의 영역 중에서 분수(分殊)에 해당하는 곳이니, 또한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보는 이들이 깨달음의 계기가 되는 한 마디를 알려 주기 바란다."

〈변〉
'확충할 수 없고', '통할 수 없는' 것이 어찌 주자(朱子)가 초목과 조수(鳥獸)는 요(堯)의 복식을 입지 못하고 요의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을 탄식해서 한 말이겠는가. 단지 천명(天命)과 명덕(明德)에 근거하여 보존하고 있는 서로 다른 분(分)이 이와 같음을 말했을 뿐이다. 사람이 요의 복식을 하고 요의 말을 하면 사람들은 장차 그를 성인으로 여길 것이다. 초목과 조수이건만 요의 복식을 하고 요의 말을 한다면 사람들은 장차 괴이하게 여길 것이다. 그렇다면 '온전할 방도가 없고', '온전함을 잃어버리는' 것이 사람의 입장에서는 본래 기품(氣稟)이 가려졌기 때문이니 '확충할 수 없고', '통할 수 없는' 것이 사물 입장에서는 어찌 본연의 분(分)이 아니겠는가.

○〈납량사의〉
"'이(理)로 말하면 만물이 일원(一原)이어서 본래 인물에 귀천의 다름이 없다.'주 32)는 이 하나의 구절은 이른바 배출의 측면에서 그 묘(妙)를 말한 것이니, 이일(理一)이 주가 되는 것이다. '기(氣)로 말하면 그 바르고 통함을 얻은 것이 사람이 되고, 그 편벽되고 막힘을 얻은 것이 사물이 된다.'주 33)는 이 하나의 구절은 이른바 즉기(卽氣)의 측면에서 그 실체를 가리키는 것이니 분수(分殊)가 주가 되는 것이다."

○〈납량사의기의〉
"위 1절(節)은 하나의 성(性) 안에 온갖 이치를 모두 갖추고 있어 하나의 성은 이일(理一)이고, 온갖 이치는 분수(分殊)이며 사람과 사물은 이 일원(一原)을 동일하게 가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비록 온갖 이치가 분수라 하더라도 사람과 사물의 귀천이 차이가 없음에 해가 되지 않는다. 이것에 근거하면 분편(分偏)을 가지고 비교 검토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가장 자세히 알아야 하는 부분이다.- 아래의 1절은 도리어 기품(氣稟)에 관한 일만 집중적으로 언급했을 뿐이다. 대체로 아래 1절의 21자(字)는 이(理)가 실제적인 작용을 하는 곳을 가리킬 수 있는 일점일획(一點一劃)도 없이 노사(蘆沙)의 말이 이와 같으니 의심할 만하다."

〈변〉
사람이 되고 사물이 되는 것이 본연의 분수(分殊)에 달려 있지 않다면 이른바 분수라는 것은 과연 어떠한 일인가? 이른바 사람과 사물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가? 사람과 사물의 구분[分]은 본래 일원(一原)에 이미 갖추어져 있으며 사람의 것도 단지 이 이(理)이고 사물의 것 또한 이 이일 뿐이다. 그래서 귀천(貴賤)의 다름이 없다고 한다. 사람과 사물의 구분은 본래 이미 미리 정해졌지만, 기(氣)에 의해 형체가 이루어진 뒤에야 비로소 그 실상이 드러난다. 그래서 "기(氣)에 나아가 실상을 가리킨다."라고 한 것이다. 공자(孔子)는 일음 일양(一陰一陽)을 도(道)로 여기고 정자(程子)는 물이 쉬지 않고 흐르는 것[川流不息]을 도체(道體)로 여기고 주자(朱子)는 오행(五行)을 도(道)의 체단(體段)으로 여겼다. 사람이 이치에 통달한다면 천지에 가득한 형형색색(形形色色)이 도리가 아닌 것이 없다. 만약 정통 편색(正通偏塞)을 이(理)의 실체(實體)가 아니라고 한다면 반드시 이(理)라는 글자, 도(道)라는 글자, 태극(太極)이라는 글자를 말한 이후에야 비로소 이(理)라고 이르겠는가? 일점일획 운운한 것은 사람을 웃음 짓게 만든다.

○〈납량사의〉
"마음이 기(氣)의 분수에 해당하는 사안이기는 하지만 여기에 갖춘 바는 성(性)이다. 마음이 성을 갖춘 것은 범인과 성인이 같지만, 마음이 성(性)을 극진히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범인과 성인이 다르다. 그 같음이나 다름이나 모두 그 중한 바가 성(性)에 있다.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은 곧 그 같은 것을 망각하고 그 다른 것을 주장하여 '성인과 범인의 마음이 다르다.[聖凡異心]'는 설을 법문(法門)으로 삼았으니, 그 또한 성인의 뜻에 모순이 된다. 남당과 논변한 사람도 그 중한 바가 있는 곳은 말하지 않고, 구구하게 그 광명(光明)한 마음의 분수(分數)를 비교하여 이로써 '성인과 범인의 마음이 같다.[同聖凡之心]'라고 하려 하였으니, 벙통을 찌르지 못한 것이다."

○〈납량사의기의〉
"기질(氣質)이라는 것은 청탁 수박(淸濁粹駁)이 전혀 가지런하지 않고, 마음[心]이라는 것은 허령 신묘(虛靈神妙)가 유일무이(有一無二)하다. 남당(南塘)은 곧 이 두 가지를 변별할 수 없는 사물로 여겼다. 만약 광명(光明)에 우열 분수(優劣分數)가 없음을 지적하지 않고 단지 마음이 성(性)을 갖추는 것은 성인과 범인이 동일하다는 점만 거론하여 변석한다면 남당(南塘)의 비웃음을 받지 않을 자가 드물 것이다. 하물며 마음[心]이 성(性)을 갖추는 것은 미물(微物)도 그러하니 어찌 남당의 의심을 풀 수 있겠는가."

〈변〉
심(心)과 기질(氣質)은 판연히 다른 두 가지 사물이 아니다. 청탁 수박(淸濁粹駁)에 따라 그 허령함[靈]은 분수(分數)가 없을 수 없으니 본래 이것을 가리켜 성인과 범인이 같다고 이를 수 없고, 또한 광명(光明)한 것만을 마음[心]으로 인식하여 성인과 범인이 다르다고 이를 수도 없다. 그렇다면 중시하는 것 외에 다시 어찌 우열 분수(優劣分數)가 없는 사물이 하나라도 있겠는가. 아니면 혹시라도 형이하(形而下)의 명덕(明德)이 있겠는가. -임전재(任全齋)주 34)는 명덕(明德)을 형이하(形而下)로 간주하였다.-
근세의 유자(儒者)들 가운데 기질(氣質)은 신체에 구애되지 않는다고 여기고 또 허령(虛靈)은 기질에 뿌리를 두지 않는다고 여기는 자들이 많아서 '상제가 허령을 내려주니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다.'라는 말이 있어 마침내 이것을 명덕(明德)으로 여기고 이것으로 성인과 범인이 같다고 여기게 되었다. 이것은 '그 빛이 번쩍번쩍하여 죽어도 사라지지 않는다.'라는 이단의 설과 어찌 구별이 있겠는가.
무릇 기질(氣質)이라는 것은 단지 이 몸에 있는 음양(陰陽)의 모임이고 마음[心]은 곧 그것의 정상(精爽)이다. 기(氣)에 이미 청탁 수박(淸濁粹駁)이 있다면 그 정상은 분수(分數)가 없음을 용납하지 못하지만 다만 갖추고 있는 것은 성(性)이다. 이른바 본심(本心), 양심(良心), 인의심(仁義心)이 어찌 일찍이 성인과 범인의 다름이 있었는가. 지금 광명(光明)에 분수가 없다는 말을 보면 그 오류를 계승하고 착오를 답습한 것이 일조일석에 비롯된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납량사의〉
"찢어진 종이에서 녹문(鹿門) 임씨(任氏)의 의론 한 단락을 얻었는데, '다름을 말하자면 성(性)이 다를 뿐 아니라 명(命)도 다르다. 같음을 말하자면 성이 같을 뿐 아니라 도(道)도 같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얼핏 겉만 보면 사슴 곁에 있는 것이 노루이고 노루 곁에 있는 것이 사슴이라는 것주 35)과 같지만, 실제로는 도리의 근원을 물 샐 틈 없이 설명하였다. 이천(伊川 정이(程頤))의 '이일분수(理一分殊)' 넉 자가 녹문에 힘입어 일맥(一脈)이 동방에서 추락하지 않았도다. 그의 전서(全書)를 얻어서 살펴보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납량사의기의〉
"이천(伊川)이 어찌 일찍이 이일분수(理一分殊)로 성(性)을 논하였는가. 다만 〈서명(西銘)〉으로 인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이(理)를 미루어 그 일(一)을 알게 하고 의리를 보존하여 분(分)을 세우게 할 뿐이었다.주 36) 양시(楊時)주 37), 이통(李侗)주 38), 주자(朱子)의 논의 또한 모두 이와 같다. 나 정암(羅整庵)주 39)에 이르러 비로소 이 4자를 내걸고 성명(性命)의 오묘함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가 말하기를, '기(氣)를 받은 초기에는 이(理)가 하나지만 형체를 이룬 뒤에는 분(分)이 달라진다.'주 40)라고 하였다. 이것은 노사(蘆沙)의 뜻과 거리가 멀다. 또 말하기를, '이일분수(理一分殊)로 성(性)을 논하면 자연히 천명(天命)과 기질(氣質)이라는 두 명칭을 세울 수 없다.'주 41)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그의 주장은 더욱 어긋나게 된다. 또 그가 이기(理氣)를 하나의 사물로 인식하고 이기(理氣)가 두 가지 사물이라는 주자(朱子)의 가르침을 심하게 책망한 것은 더 말할 수가 없다.
우리 동방의 임 녹문(任鹿門)이 또 나 정암이 말한 이일분수(理一分殊)의 지취를 조술(祖述)하였다. 그가 말하기를, '건(乾)의 건(健)이 곧 태극(太極)이고 건(健) 안에 원형이정(元亨利貞)이 있다. 곤(坤)의 순(順)이 곧 태극이고 순(順) 안에 원형이정이 있다. 원형이정은 곧 음양오행(陰陽五行)이다. 그러나 건(乾)의 원형이정은 여전히 건(健)일 뿐이고 곤(坤)의 원형이정은 여전히 순(順)일 뿐이다. 그렇다면 건(乾)과 곤(坤)의 태극은 자연히 서로 다름에 해가 되지 않는다.'주 42)라고 하였다. 또 인물성도(人物性圖)를 만들어 인권(人圈)에서는 오상(五常)과 태극(太極)을 자세히 적었지만, 물권(物圈)에서는 단지 태극만 적고 오상을 적지 않았다. 또 '혼연한 태극이 하나의 사물 안에 갖추어져 있다.'라는 주자의 학설을 논의하기를, '이것은 이 각일기성(各一其性)주 43)의 측면에서 천리(天理)가 완전하여 휴흠(虧欠)이 없다는 것을 이를 뿐, 하나의 사물이 온갖 이치를 구비했다는 것을 이르지 않는다.'주 44)라고 하였다. 이는 모두 분수를 잘못 보아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
또 인성의 선함을 논하면서 '이는 기질 이외에 따로 선한 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주 45)라고 하였다. 이는 더욱 이해할 수 없다. 만약 노사(蘆沙)가 다시 살아나서 이를 본다면 자기도 모르게 이마를 찡그리면서 장탄식을 할 것이다. 노주(老洲) 오 선생(吳先生)주 46)은 일찍이 나 정암과 임 녹문 양가(兩家)에 대해서 매우 많은 논의를 하였다. 이제 세 단락을 아래에 덧붙여 보여 노사 문하의 제공(諸公)이 자세히 보게끔 한다."
○《노주집잡지(老洲集雜識)》에 이르기를, "정암(整庵)과 녹문(鹿門)이 똑같이 이(理)와 기(氣)가 하나의 사물임을 논하였지만, 정암은 이일(理一)에 비중을 두었고 녹문은 분수(分殊)에 비중을 두었다. 이일(理一)에 비중을 둔다면 자연스럽게 이(理)가 주가 되고 분수(分殊)에 비중을 둔다면 결국에는 기(氣)가 주가 된다. 이것을 가지고 득실을 비교하여 논하자면 정암이 아마도 흠이 적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정암과 녹문이 모두 추리(推理 이(理)를 미루어 감)의 관점에서 합일(合一)의 오묘함을 본 것은 얼핏 보자면 고묘(高妙)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궁극에는 모두 주기론(主氣論)으로 귀결되었다. 정암은 그래도 일일이 이 이(理)를 일으켜 세운 뜻이 있다. 하지만 녹문은 줄곧 기(氣)라는 한 자로 천하의 이(理)를 모두 덮어버리고는 다시는 이(理)가 이(理)가 되는 까닭을 궁구하지 않았다. 대체로 녹문의 견해는 실로 정암(整庵 나흠순(羅欽順))에 근본하였지만, 기(氣)에 대한 주장은 자못 정암을 능가한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정암은 이일분수(理一分殊)를 이(理)와 기(氣)를 말하는 저울로 삼았다. 그가 말하기를 '성(性)은 명(命)이기 때문에 같고 도(道)는 형(形)이기 때문에 다르다.'라고 한 것은 매우 옳다. 성(性)은 명(命)이기 때문에 같다는 것은 바로 미발(未發)한 상태에서 이일(理一)을 가리키고, 도는 형이기 때문에 다르다는 것은 이발(已發)한 상태에서 분수(分殊)를 가리킨다. 녹문은 그의 이일분수(理一分殊)를 조술(祖述)하면서도 유독 이 말을 심하게 배척하였는데 무엇 때문인가? 끝내 사람과 사물의 편전(偏全)에 구애되어 성(性)과 도(道)에 비록 체용(體用)의 다름이 있더라도 일원(一原)의 동일함에 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통찰하지 못하였다."

〈변〉
덕(德)에는 일정한 법이 없어 선(善)을 주인으로 삼는 것이 법이 되며 선(善)은 일정한 주인이 없이 능히 한결같음에 합한다.주 47) "이치는 하나이나 생각은 백 가지이니 돌아감은 같으나 길이 다르다."주 48)라고 하고, "나의 도는 하나로써 모든 것을 꿴다."주 49)라고 하고, "그것의 사물됨이 변하지 않으니 사물을 냄이 측량할 수 없다."주 50)라고 하고, "널리 배우고 자세히 설명하는 것은 장차 돌이켜 간략하게 말하고자 함이다.주 51)"라고 하였다.
자세히 연구하고 상세히 완미하면 경전(經傳) 안에서 이일분수(理一分殊)의 뜻을 말한 부분이 매우 많으며 이 마음[心]과 이 성(性)의 오묘함을 밝히기 위한 것이 아님이 없다. 주자(朱子)는 "이(理)와 기(氣)에 대해서는 이천(伊川)의 말이 뛰어난데 이일분수(理一分殊)라고 하였다."주 52)라고 하였다. 이일분수는 곧 이천이 평소에 하던 말이지 이것이 어찌 〈서명(西銘)〉에 인하여서만 한 말이겠는가. 정자(程子)는 또 "텅 비고 고요하여 아무런 형체가 없지만, 온갖 형상이 이미 갖추어져 있다."주 53)라고 하였다. 장자(張子)는 "성(性)이라는 것은 모든 사물의 일원(一原)이다."주 54)라고 하였다. 이것으로 성(性)을 논할 수 없겠는가. 양씨(楊氏)와 이씨(李氏)가 인의(仁義)를 가지고 이일 분수(理一分殊)를 논하였으니 어찌 나씨(羅氏)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것을 들어 성(性)을 설명하였겠는가.
녹문(鹿門)의 건순 태극(健順太極)에 관한 학설은 해가 없을 듯하지만 '원형이정(元亨利貞)이 곧 음양오행이다.'라는 조항의 설은 이(理)와 기(氣)를 하나의 사물로 여기는 병통이 있다. 나 정암(羅整庵)의 '성(性)은 명(命)이기 때문에 같고 도(道)는 형(形)이기 때문에 다르다.'주 55)라는 설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중용장구(中庸章句)》에서 "성과 도는 비록 같지만[性道雖同]"주 56)이라고 하였다. 만물이 화생(化生)한 다음이라면 '비록 같다[雖同]'는 것의 '같음'은 이미 분수의 같음에 해당하니 어찌 형태가 완성되기를 기다려 달라지겠는가? '형(形)' 자를 '기품이 혹 다르다[氣稟或異]'는 것으로 간주한다면 형태와 기품은 그 의미가 현격하게 구별되니 녹문의 배척이 옳다. 다만 〈인물성도(人物性圖)〉와 기질(氣質)이 선(善)하다는 학설은 과연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람 때문에 그의 말까지 폐기할 수 없으니 하물며 이 말의 잘못 때문에 다른 말의 타당함까지 폐기할 수 있겠는가.

○〈납량사의〉
"제가(諸家)가 사람과 사물의 성(性)을 언급하면서 한결같이 모두 이(理)를 분(分)이 없는 것이라 여기고 분(分)은 기(氣) 때문에 생긴다고 여겨, 형기(形氣)를 벗어난 곳에다 이일(理一)을 제한시키고 형기에 떨어진 이후에다 분수(分殊)를 국한시킨다. 이에 이(理)는 이대로 있고 분(分)은 분대로 있어 성(性)과 명(命)이 단절된다."

○〈납량사의기의〉
"만약 낙가(洛家)가 태극에는 원형이정(元亨利貞)이 없고 성(性)에는 인의예지가 없다고 여겼다면 응당 '이(理)는 분(分)이 없는 사물이다.'라고 말해야만 한다. 만약 원형이정은 기(氣)로 인하여 비로소 존재하고 인의예지는 기(氣)에 의지하여 비로소 생겨난다고 여긴다면 '분(分)은 기(氣)로 말미암아 존재한다.'고 말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제 그렇게 말하지 않았으니 이(理)는 이대로 있고 분(分)은 분대로 있는 근심이 어디에 있겠는가?"

〈변〉
원(元)은 만물을 낳는 이(理)이고 두루 포용하고 보호하지 않음이 없으며, 형(亨)은 만물을 키우는 이(理)이고 조리와 등급이 찬연하고 밝게 드러나며, 리(利)는 만물을 완성하는 이(理)이고 제재와 차별에 합당하지 않음이 없으며, 정(貞)은 만물을 갈무리하는 이(理)이고 대화(大和)를 보전하고 각각 성(性)과 명(命)을 바르게 한다. 이 이(理)는 하늘에서는 하늘의 이(理)가 되어 만물의 이치를 갖추고, 사람에게서는 사람의 이가 되어 만사의 이를 갖춘다. 이제 태극에 원형이정이 있음을 알면서도 원형이정의 이면에 사람과 사물의 편전(偏全)과 자연(自然)의 분(分)이 있음을 모른단 말인가?
사람은 하나의 몸을 가지고 천하의 일을 주관해야 한다. 무엇 때문인가? 하나의 몸을 가지면 이 몸을 주관하는 자가 있어야 하니 군상(君上)이 이에 해당하고, 이 몸을 낳은 자가 있어야 하니 부모가 이에 해당하고, 이 몸의 앞뒤로 태어난 자가 있어야 하니 형제가 이에 해당하고, 이 몸과 짝을 이루는 사람이 있어야 하니 부부가 이에 해당하고, 이 몸과 동류인 자가 있어야 하니 붕우가 이에 해당한다. 이 몸이 만물의 영장이라면 만물을 주재하는 이가 있어야 하고, 이 몸이 천지의 마음이라면 천지를 돕는 이가 있어야 한다. 사람도 이와 같은데 하물며 하늘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하늘에 대해 잘 말하는 자는 반드시 사람에게서 관찰한다.
하단(下段)의 〈외필변(猥筆辨)〉에서 이미 '기(機) 상의 이(理)만을 가리키면 태극이라 하고 사시(四時)의 기를 함께 거론하면 원형이정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반드시 사시의 기(氣)를 함께 거론한 뒤에야 원형이정이라고 한다면 이것이 '기(氣)로 인하고', '기를 기다린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납량사의〉
"지금 한 덩어리의 쇠가 있다고 할 때 이것으로 그릇을 만들 수 있고 칼을 만들 수 있는 것은 분수가 일(一)에 포함된 것이다. 이른바 찬연(燦然)하다는 것주 57)은 한편으로는 그릇을 만들 수 있고 한편으로는 칼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그릇을 만드는 화로에 들어가면 그릇이 되고 칼을 만드는 화로에 들어가면 칼이 되어 각각 그 본분에 맞는 하나를 얻는다."

○〈납량사의기의〉
"가령 누군가가 말하기를, '경청로(輕淸爐)에 들어가면 하늘이 되고 중탁로(重濁爐)에 들어가면 땅이 되며 청수로(淸粹爐)에 들어가면 상지(上智)가 되고 탁박로(濁駁爐)에 들어가면 하우(下愚)가 되며 양강로(陽剛爐)에 들어가면 남자가 되고 음유로(陰柔爐))에 들어가면 여자가 된다. 이것은 각각 본연(本然)의 일(一)을 얻기 때문이다.'라고 한다면 장차 어떻게 변론하여 이를 물리치겠는가?"

〈변〉
사람이 되고 사물이 되며 남자가 되고 여자가 되는 것은 쇠가 대야가 되고 사발이 되며 칼이 되고 검(劒)이 되는 것과 같다. 현자(賢者)가 되고 우인(愚人)이 되는 것은 쇠가 노구(爐鞲)의 긴밀함과 헐거움에 따라 단련(鍛鍊)의 정도가 정밀하기도 하고 거칠기도 한 것과 같다. 또 대야나 사발이 되고 칼이나 검이 되는 것이 쇠가 스스로 하는 것인가, 아니면 주장하는 자가 존재하는 것인가?"

○〈납량사의〉
"이미 분(分)을 기(氣)로 인하여 생긴 것이라고 여겼으니, 사람과 사물이 동일하게 오상(五常)을 지닌 것을 본연의 성[本然之性]이라 하고 편전의 성[偏全之性]은 본연이 아니라고 하여 사람과 사물의 성(性)이 같다고 논해도 괴이할 것이 없다."

○〈납량사의기의〉
"편전(偏全)과 통색(通塞)은 분수(分殊)의 분(分)과 등급상 다른 점이 있다. 분수(分數)는 하늘과 땅, 사람과 사물이 태어나기 전에 갖추어져 있지만, 편전(偏全)과 통색(通塞)은 도리어 부여받은 기(氣)에 달려있다. 또한 편전(偏全)은 사람과 사물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인(聖人)과 범인(凡人)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주자(朱子)는 '학지(學知) 이하로는 기(氣)의 청탁(淸濁)에 많고 적음이 있고 이(理)가 온전하거나 빠지거나 하는 것이 여기에 달려있다.'주 58)라고 하였다. 이제 성인과 범인이 동일하게 오상을 지닌 것을 본연(本然)의 성(性)으로 여기고 이(理)가 온전하거나 빠지는 것을 본연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떠한 장애가 있겠는가? 이와 같다면 사람의 성(性)에 대해서도 미루어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변〉
편전(偏全)으로 사람과 사물을 말하는 것은 본연(本然)의 분(分)이고 성인과 범인을 말하는 것은 기품(氣稟)의 이(異)이다. 만약 사람의 온전함을 본연이라고 하고 사물의 치우침을 기질이라고 한다면 사람만이 본연의 성(性)을 얻고 사물이 얻는 것은 기질의 성(性)일 뿐이겠는가. 그렇다면 솔개가 날아오르고 물고기가 뛰노는 것주 59), 물이 아래로 흐르고 불이 위를 향해 타오르는 것주 60)이 모두 본연이 아니게 되니 천하에 자기의 성(性)을 성(性)으로 지닐 수 있는 사물이 어찌 하나라도 있겠는가.
분(分)은 사람과 사물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갖추어져 있다고 하면서 오히려 편전(偏全)을 도리어 부여받은 기에 달려있다고 여긴다면 사람과 사물의 분(分)은 편전(偏全)을 버려두고 다시 어떠한 분(分)이 있겠는가. 그 주장이 막히는 곳을 알 수 있으니 너무나도 생각이 부족한 것이다.

○〈납량사의〉
"오상이 사물에 따라 치우치거나 온전한[偏全] 것은 바로 이 이(理)의 본분이니,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편전(偏全)이 같지 않은데도 오히려 같다[同]고 하는 것은 마치 대야와 사발, 칼과 검(劍)을 쇠라고 한다면 같다고 할 때의 동(同)이지, 혼동해서 대야와 사발, 칼과 검의 차이가 없어서 같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편전의 성은 본연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그릇이나 칼을 벗어나 쇠를 찾는 말이다."

○〈납량사의기의〉
"사람과 사물의 일원(一原)주 61)에는 오상(五常)이 있으니, 이것이 이(理)의 본분(本分)이다. 이제 오상(五常)이 기(氣)에 따라서 발현되는 과정에 전결(全缺)이 있는 것을 이(理)의 본분(本分)이라고 여기고 성(性)의 본연(本然)이라고 부른다면, 이것은 주자(朱子)가 말한 '기질지성(氣質之性)이란 성(性)이 기질(氣質)에 떨어져 있는 것'주 62)이라는 것과 그 부류가 다르다. 이른바 기질(氣質)의 성(性)과 기질로 논하자면 대체로 성(性)이 같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모두 얼음이 녹는 듯 분명한 해석인데 두 주장이 서로 어긋남이 없겠는가?"

〈변〉
사람과 사람이 다르고 사물과 사물이 다른 것은 기질(氣質)의 편전(偏全)이고 사람과 사물이 다른 것은 본연(本然)의 편전이다. 주자(朱子)는 "사람과 사물의 편정(偏正)은 원래 다르다."주 63)라고 하였다. 정자(程子)는 인(仁)을 말하면서 "편언(偏言)하면 하나의 일이지만 전언(全言)하면 4가지를 포괄한다."주 64)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편전(偏全) 또한 모두가 본연이 아니겠는가?

○〈납량사의〉
"'일(一)'로 '오(五)'를 견주어 보면 '오(五)'는 '일(一)'과 같고 '오(五)'로 서로 견주어 보면 분(分)이 여기에 존재한다. 산수(散殊)주 65)가 끝이 없다고 해도 모두 본분(本分)에 속하는 일이니 편전(偏全)을 낮추어 보려고 하는 것이 옳겠는가."

○ 〈납량사의기의〉
"일신(一身)의 관점에서 사지(四肢)를 보면 사지는 똑같이 일신이고 사지의 관점에서 서로를 보면 분(分)이 여기에 존재한다. 이것은 본래 그러하다. 그러나 어찌 사지와 분수(分殊)로 편전을 나누겠는가. 그래서 나는 분(分)과 편전(偏全)은 다르다고 말한다. 편(偏)을 말하고자 한다면 응당 사지가 마비되어 불편하거나 중풍이 들어 팔다리를 쓰지 못한 다음에야 비로소 편(偏)이라고 이를 수 있다. 낮춰보지 않고자 하더라고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변〉
일신(一身)을 통틀어 말하자면 이일(理一)과 같고 온갖 부분을 가리켜 말하자면 분수(分殊)와 같다. 일신을 말하지만 백체(百體 온갖 부분)가 그 안에 있고 백체를 말하지만 일신이 그 안에 있으니, 일신 밖에 별도로 백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백체 밖에 별도로 일신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일(理一)과 분수(分殊)가 각각의 범위가 있고 각각의 시기가 있는 것이 아님이 이와 같다. 지금 일신을 사지(四肢)와 대립시켜 이일(理一)을 일신에 국한시키고 분수(分殊)를 사지에 제한하여 이일과 분수를 고정된 간격이 있는 사물로 여겼다. 이것이 본체는 같지만 작용은 다르므로 편전은 분이 아니라는 학설이 있게 된 까닭이다.

○〈납량사의〉
"《중용혹문》과 《대학혹문》에서 이미 음양오행설을 따라 그 강리(綱理 벼리가 되는 이)가 같음을 언급하고, 이어서 음양오행의 편전(偏全)으로 그 조건이 같지 않음을 언급하였다. 한때의 일을 앞뒤로 말하였으니 무슨 의심할 만한 단서가 있는가."

○〈납량사의기의〉
"음양오행의 편전은 본래 기질(氣質)에 속하고 건순오상(健順五常)의 조건은 본래 분수(分殊)에 속한다. 어찌 곧장 분수를 가리켜 편전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와 같다면 손발의 명칭이 다른 것을 편전이라고 할 수 있으니 말이 되지 않을 듯하다."

〈변〉
장자(張子 장재(張載))가 "기질지성(氣質之性)을 군자는 성으로 여기지 않는다."주 66)라고 하였다. 이는 기질지성(氣質之性)이 본연이 아님을 말한 것이다. 주자(朱子)는 오행이 생겨날 때 그 성을 하나씩 갖는 것주 67)을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보았다. 이것은 장자(張子)의 말과 다르기는 하지만 각각 일의(一義)가 되기에는 방해가 되지 않는다. 이것을 본연의 분(分)이 아니라고 이를 수 없다. 간재의 〈납량사의기〉에서 이미 기질지성은 본연이 아니라고 하고 음양오행의 편전을 기질에 귀속시켜 이른바 마비, 중풍과 같은 부류로 여겼으니 매우 말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양강 음유(陽剛陰柔), 수윤 화조(水潤火燥)주 68)가 모두 본연이 아니라는 것인가. 천지 만물은 있으면 다 있으니 인체(人體)의 사지(四肢)와 백해(百骸 모든 뼈)가 더할 수도 없고 감할 수도 없이 완벽하게 충족되어 비거나 빠진 부분이 없는 것과 같다. 이것이 태극(太極)의 대전(大全)이고 조화(造化)의 묘용(妙用)이다. 만약 "음양오행은 부여된 기에 달려있고 때가 되면 배정될 뿐이다."라고 한다면 태극은 결과적으로 헛된 명칭이 되고 조화를 행하는 자가 너무 수고롭지 않겠는가.
하늘이 만물(萬物)을 낳는 것은 사람이 만사(萬事)에 응하는 것과 같다. 만사에 응하는 이(理)가 먼저 갖추어지지 않으면 인성(人性)의 본체에 흠결이 있게 된다. 만물을 낳는 이(理)가 먼저 갖추어지지 않으면 천명(天命)의 본원에는 소루함이 있게 된다. 천명의 본원과 인성의 본체가 다르다고 한다면 그것은 내가 아는 바가 아니다.
주자(朱子)는 "사람과 사물의 성은 부여받은 형체의 편정(偏正)이 정녕 본래 같지 않다. 그러나 편정한 가운데 다시 절로 청탁혼명(淸濁昏明)의 차이가 있다."주 69)라고 하였다. 위 단락의 '본래 같지 않다.'는 것은 본연(本然)에 의한 분(分)이고 아래 단락의 '다시 절로 같지 않다.'는 것은 기에 따른 분(分)이다. 만약 위 단락과 아래 단락을 합쳐서 한결같이 기분(氣分)주 70)으로 귀결시킨다면 되겠는가.
주석 1)납량사의(納凉私議)
기정진(奇正鎭)이 1843년에 작성한 성리학 저술로, 우주의 구성에서부터 인간의 본질에 대한 해명, 사단칠정과 인심도심(人心道心) 등 심성의 문제,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의 문제, 선악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이일분수(理一分殊)라는 이체이용(理體理用)의 논리로 설명하였다.
주석 2)편전(偏全)
치우침과 온전함, 부분과 전체, 소와 대의 차이 등을 나타낼 때 쓰는 성리학 용어이다.
주석 3)주자(朱子)는……말하였겠는가
《중용장구》 제12장에 "천지의 큼으로도 사람이 오히려 한스러워하는 바가 있다."라고 한 데 대한 주희의 집주에 "사람이 천지에 대하여 한스러워한다는 것은 예를 들면 덮어주고 실어주어 낳고 이루어주는 편벽됨과 추위와 더위, 재앙과 상서가 그 바름을 얻지 못하는 것과 같다.[人所憾於天地, 如覆載生成之偏及寒暑災祥之不得其正者.]"라고 한 것을 이른다.
주석 4)사람과……않다
《주자어류》 권4 〈성리(性理)〉에 보인다.
주석 5)태극(太極)이라는……가리킨다
《주역전의대전》 〈역본의도(易本義圖) 복희팔괘차서지도(伏羲八卦次序之圖)〉에 〈계사전〉을 인용하여 "역에 태극이 있으니, 이것이 양의를 낳고 양의가 사상을 낳고 사상이 팔괘를 낳았다.[易有太極, 是生兩儀, 兩儀生四象, 四象生八卦.]"라고 하였는데, 이 구절 아래에 부록으로 실려 있는 주희(朱熹)의 말에 보인다.
주석 6)낙가(洛家)
낙론 또는 낙파라고 한다. 심(心)과 성(性)에 대한 이해(理解)의 문제로 성리학자들이 대립하여 진행된 논쟁인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 낙론(洛論)은 미발은 마음의 본체로서 순선(純善)하여 선악이 없고 사람과 물건의 성은 본연지성으로 이(理)와 같으므로 같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였고, 호론(湖論)은 미발한 마음의 체에도 기질의 선악이 있으며 현실에 드러나는 본연지성은 기질의 맥락 속에 있을 수밖에 없으므로 사람과 물건의 성은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이 논쟁에 있어 주로 서울ㆍ경기 지역에 거주한 농암 김창협, 삼연 김창흡, 외암(巍巖) 이간(李柬) 등이 한 파를 이루어 이를 낙론 또는 낙파라 하였으며, 충청 지역에 사는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 등이 또 한 파를 이루어 이를 호론 또는 호파라 하였다.
주석 7)한 칸을……미치는 것
《논어집주대전(論語集註大全)》 권9 〈자한(子罕)〉에 "양씨가 말하기를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의 등급인 선인(善人)으로부터 선(善)을 충실히 하여 빛나는 등급인 대인(大人)에 이르기까지는 역행(力行)을 쌓아서 될 수 있지만, 대인이 성인이 되는 것으로 말하자면 역행으로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안자가 성인의 경지에 한 칸을 못 미친 이유이다.[可欲之謂善, 充而至於大, 力行之積也. 大而化之, 則非力行所及矣. 此顏子所以未逹一間也.]' 하였다."라고 하였다.
주석 8)일점자(一點子)
주희가 인물지성(人物之性)에 대해 논한 대목 가운데 "기(氣)는 서로 비슷하다. 그래서 예컨대 춥고 따스한 것을 느끼는 것이나, 배고프고 배부른 것을 아는 것이나, 사는 것을 좋아하고 죽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나, 이익을 좇고 해를 피하는 것 등은 인(人)과 물(物)이 모두 같다. 반면에 이(理)는 같지 않다. 그래서 예컨대 벌과 개미의 군신은 단지 그 의(義)에 대해서 아주 조금만 아는 것이 있을 뿐이며, 범과 이리의 부자는 단지 그 인(仁)에 대해서 아주 조금만 아는 것이 있을 뿐이다.[氣相近. 如知寒煖, 識飢飽, 好生惡死, 趨利避害, 人與物都一般. 理不同. 如蜂蟻之君臣, 只是他義上, 有一點子明, 虎狼之父子, 只是他仁上, 有一點子明.]"라고 말한 내용이 나온다. 《朱子語類 卷4 性理1 人物之性氣質之性》
주석 9)서로……다른 것
주희가 말한 이(理)와 기(氣)의 차이를 의미한다. "만물은 근원이 하나라는 점에서 논하면 이(理)는 같고 기(氣)는 다르다. 그러나 만물의 체(體)가 다르다는 점에서 살펴보면 기(氣)는 그래도 서로 비슷하지만 이(理)는 완전히 다르다.[論萬物之一原, 則理同而氣異. 觀萬物之異體, 則氣猶相近, 而理絶不同.]" 《朱子語類 卷4 性理1 人物之性氣質之性》
주석 10)하늘이 내린 성인
《논어》 〈자한(子罕)〉에 자공(子貢)이 공자를 찬양하며 "진실로 하늘이 내신 성인이시다.[固天縱之將聖.]"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주석 11)지극히……사람
《논어》 〈양화(陽貨)〉에서, 공자가 "오직 지극히 지혜로운 자와 지극히 어리석은 자는 변화시킬 수 없다.[唯上知與下愚不移.]"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석 12)건도(乾道)가……바로잡는 것
《주역》 건괘(乾卦) 단사(彖辭)에 "하늘의 도가 변화하여 각 생명의 타고난 성품이 바르게 길러지도록 한다.[乾道變化 各正性命.]"라는 말이 나온다.
주석 13)편전이……아니다
《주자어류》 권4 〈성리(性理) 1〉에 보인다.
주석 14)편전(偏全)이……아니다
《주자어류》 권4 〈성리(性理) 1〉에 보인다.
주석 15)사람과……때문이다
《주자어류》 권4 〈성리(性理)〉에 보인다.
주석 16)각정(各正)은……얻는다
《주역본의(周易本義)》 〈건괘(乾卦)〉에 보인다.
주석 17)벌과……인의(仁義)
《주자어류》 권4 〈성리(性理)〉1, '인물지성기질지성'에 "기(氣)는 서로 비슷하다. 그래서 예컨대 춥고 따스한 것을 느끼는 것이나, 배고프고 배부른 것을 아는 것이나, 사는 것을 좋아하고 죽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나, 이익을 좇고 해를 피하는 것 등은 인(人)과 물(物)이 모두 같다. 반면에 이(理)는 같지 않다. 그래서 예컨대 벌과 개미에게 군신간의 의리가 있는 것은 단지 그 의(義)에 대해서 아주 조금만 아는 것이 있을 뿐이며, 범과 이리에게 부자간의 의리가 있는 것은 단지 그 인(仁)에 대해서 아주 조금만 아는 것이 있을 뿐이다.[氣相近. 如知寒煖, 識飢飽, 好生惡死, 趨利避害, 人與物都一般. 理不同. 如蜂蟻之君臣, 只是他義上有一點子明, 虎狼之父子, 只是他仁上有一點子明.]"라는 내용이 보인다.
주석 18)인의예지(仁義禮智)의……다르다
《맹자집주(孟子集註)》 〈고자〉 주자주에 보인다. "성(性)이란 사람이 하늘에서 얻은 바의 이(理)이고 생(生)이란 사람이 하늘에서 얻은 바의 기(氣)이니, 성(性)은 형이상이고 기(氣)는 형이하이다. 사람과 물건이 태어날 때에 성(性)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가 없으며, 또한 기(氣)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가 없다. 그러나 기(氣)로써 말한다면, 지각과 운동은 사람과 물건이 다르지 않은 듯하지만, 이(理)로써 말한다면, 인의예지의 본성을 받은 것을 어찌 물건이 얻어 온전히 할 수 있겠는가. 이는 사람의 성(性)이 불선함이 없어서 만물의 영장이 되는 이유이다.[性者, 人之所得於天之理也; 生者, 人之所得於天之氣也. 性, 形而上者也; 氣, 形而下者也. 人物之生, 莫不有是性, 亦莫不有是氣. 然以氣言之, 則知覺運動, 人與物若不異也; 以理言之, 則仁義禮智之稟, 豈物之所得而全哉? 此人之性所以無不善而爲萬物之靈也.]"라고 하였다.
주석 19)안연(顏淵)과……지닌 것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자하ㆍ자유ㆍ자장은 모두 성인의 한 지체를 가졌고 염우ㆍ민자건ㆍ안연은 그 전체를 소유하였으되 광대하지 못하였다."라는 구절이 있다.
주석 20)모든……있다
《장자전서(張子全書)》 권14 〈성리습유(性理拾遺)〉와 《근사록》 〈도체편〉에 보인다.
주석 21)하늘이……없다
《주자어류》 권4 〈성리(性理) 1〉에 보인다.
주석 22)편언(偏言)의……인(仁)
편언은 다른 개념과 상대적으로 말한 것고 전언은 전체로 말했을 때를 가리킨다. 《주자어류》에 "편언이나 전언이라는 것은, 단지 인만 말했을 때에는 곧 체로서의 인을 말하지만, 의를 말했을 때는 곧 인에서 갈라져 나온 하나의 도리라는 것이다.[偏言、專言者, 只說仁, 便是體; 才說義, 便是就仁中分出一箇道理.]", "편언은 한 가지 일이고, 전언은 인ㆍ의ㆍ예ㆍ지 네 가지를 포괄하는 것이다.[偏言則一事, 專言則包四者.]"라는 내용이 보인다. 《朱子語類 卷94 周子之書 太極圖, 卷95 程子之書1》
주석 23)사람과……있다
《주자어류》 권4 〈성리(性理) 1〉에 나오는 말이다.
주석 24)태극권(太極圈)
주돈이(周敦頤)가 〈태극도(太極圖)〉를 그리고 이 그림에 대한 설명의 글을 지었다. 도의 맨 위가 1층으로 태극권이며, 그 아래 2층이 음양권, 그 아래 3층이 오행권, 그 아래 4층이 남녀권, 그 아래 5층이 만물권이다.
주석 25)3백, 3천의 예(禮)
예의 조목이 많음을 형용하는 말로, 《예기(禮記)》 〈예기(禮器)〉에 "경례가 삼 백이고 곡례가 삼 천인데, 그 근본을 따져 보면 성경 한 가지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주석 26)체(體)와……없다
체용일원(體用一源) 현미무간(顯微無間)은 정주학의 유명한 명제(命題) 중의 하나인데, 체(體)가 본질이요 본체요 이치[理]요 형이상(形而上)의 절대적 진리를 표상하는 개념으로서 미(微)를 그 속성으로 한다면, 용(用)은 작용이요 기능이요 자취[迹]요 형이하(形而下)의 현상 세계를 표상하는 개념으로서 현(顯)을 그 속성으로 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녹문집》 권20 〈존존감기(存存龕記)〉에, 정이가 경(敬)을 주일(主一)로 설한 것에 대해서, 녹문이 "이것 역시 천기를 너무 누설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其亦可謂太漏洩天機者矣.]"라고 평한 대목이 나온다.
주석 27)미응(未應)이……아니다
《이정유서(二程遺書)》 권15에 "텅 비어 조짐이 없을 적에 이미 만상(萬象)이 삼연(森然)히 갖추어져 있으니, 미응(未應)이 먼저가 아니고 이응(已應)이 뒤가 아니다. 예를 들면 100자 되는 나무가 근본으로부터 지엽에 이르기까지 모두 하나로 꿰여 있는 것과 같다.[沖漠無眹, 萬象森然已具, 未應不是先, 已應不是後. 如百尺木, 自根本至枝葉, 皆是一貫.]"라는 정이(程頤)의 말이 보인다.
주석 28)새와……없다
《대학혹문(大學或問)》 권1 〈경 1장(經一章)〉에 보인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그 이치로써 말하면 만물은 하나의 근원이니 참으로 사람과 물에 귀함과 천함의 차이가 없고, 기로써 말하면 바르고 통하는 것을 얻은 것은 사람이 되고 치우치고 막힌 것을 얻은 것은 물(物)이 되기 때문에 귀해지기도 하고 천해지기도 하여 가지런하지 않은 것이다. 저 천하여 물이 된 것은 이미 치우치고 막힌 형기에 구속되어 본체의 온전함을 확충할 수 없고, 오직 태어나면서부터 바르고 통하는 기운을 얻은 사람만이 그 본성이 가장 귀하게 되기 때문에 방촌의 사이가 허령하고 통철하여 모든 이치가 모두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대개 사람이 짐승과 구별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고, 요순이 되어 천지에 참여하여 화육을 도울 수 있는 것 또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명덕이라는 것이다.[然以其理而言之, 則萬物一原, 固無人物貴賤之殊; 以其氣而言之, 則得其正且通者爲人, 得其偏且塞者爲物, 是以或貴或賤而不能齊也. 彼賤而爲物者, 旣梏於形氣之偏塞而無以充其本體之全矣, 唯人之生乃得其氣之正且通者而其性爲最貴, 故其方寸之間, 虛靈洞徹, 萬理咸備. 蓋其所以異於禽獸者, 正在於此, 而其所以可爲堯舜而能參天地以讚化育者, 亦不外焉. 是則所謂明德者也.]"
주석 29)체(體)는……다르다
호굉(胡宏, 1106~1161)의 《지언(知言)》에 보인다. 호굉은 호안국(胡安國)의 아들로서 양시(楊時)에게 배웠다. 그가 성(誠) 속에 이미 선과 악의 씨앗이 갖추어져 있다고 해석한 이른바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이 체는 같고 용이 다르다.'고 주장한 설을 가리킨다.
주석 30)하늘이……없다
《대학장구》 〈서(序)〉에 보인다.
주석 31)허령(虛靈)하여……하다
《대학장구》 경 1장에 "대학의 도는 명덕을 밝힘에 있으며 백성을 새롭게 함에 있으며 지선에 그침에 있다."라고 하였는데, 주희의 주에 "명덕은 사람이 하늘에서 얻은 것으로 허령하고 어둡지 않아서 중리(衆理)를 갖추고 만사(萬事)에 응하는 것이다. 다만 기품(氣稟)에 구애되고 인욕(人慾)에 가려지면 때로 어두울 경우가 있으나, 그 본체의 밝음은 일찍이 그친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배우는 자가 마땅히 그 발하는 바를 인하여 마침내 밝혀서 그 처음을 회복하여야 한다.[明德者, 人之所得乎天, 而虛靈不昧, 以具眾理而應萬事者也. 但爲氣稟所拘, 人欲所蔽, 則有時而昏, 然其本體之明, 則有未嘗息者. 故學者當因其所發而遂明之, 以復其初也.]"라고 하였다.
주석 32)이(理)로……없다
《대학혹문(大學或問)》 경 1장에 보인다.
주석 33)기(氣)로……된다
《대학혹문(大學或問)》 경 1장에 보인다.
주석 34)임전재(任全齋)
임헌회(任憲晦, 1811~1876)로, 본관은 풍천(豐川), 자는 명로(明老), 호는 고산(鼓山)ㆍ전재(全齋)ㆍ희양재(希陽齋)이다.
주석 35)사슴……사슴이라는 것
왕안석(王安石)의 아들 왕방(王雱, 1044~1076)이 어릴 때 어떤 사람이 사슴과 노루를 한 우리에 넣고서 어느 것이 노루이고 어느 것이 사슴인지 묻자, 한참을 생각하다가 "노루 곁에 있는 것이 사슴이고, 사슴 곁에 있는 것이 노루입니다." 하니, 왕안석이 형식에 구애되지 않는 활달한 사유 방식을 기특하게 여겼다고 한다. 《古今說海》 그러나 주희(朱熹)는 《사서혹문》 〈논어혹문(論語或問)〉에서 경전을 해석함에 '어느 것이나 아는 바가 없어서 노루 곁 사슴, 사슴 곁 노루처럼 무한히 순환 반복하기만 하고 끝내는 제대로 된 답을 찾지 못한다.[彼此俱昧, 而欲互以相明, 如獐邊之鹿鹿邊之獐, 循環無端, 而卒無所决其偶.]'고 하여 피차간에 정확한 분변을 하지 못하는 병폐를 뜻함.
주석 36)이천(伊川)이……뿐이었다
이천(伊川) 정이(程頤)는 서명을 두고 "이치는 하나이나 분수가 다름을 밝혔다."라고 평한 바 있다. 《古文眞寶後集 卷10》 《近思錄 卷2 爲學》
주석 37)양시(楊時)
1053~1135. 자는 중립(中立), 호는 구산(龜山),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사양좌(謝良佐), 유작(游酢), 여대림(呂大臨)과 함께 '정문 사선생(程門四先生)'으로 불렸다. 그의 학문은 나종언(羅從彦)ㆍ이동(李侗) 등을 거쳐 주희에게로 이어져 이학(理學)의 형성 발전과정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저서에 《구산어록(龜山語錄)》 등이 있다.
주석 38)이통(李侗)
송나라 때 남검주(南劍州) 태생으로, 자는 원중(愿中)이며 통칭 연평 선생(延平先生)으로 불린다. 주자가 한때 그에게 수학한 바 있다. 그는 후학을 지도할 때, 강론(講論)보다는 말없이 앉아 스스로 터득하는 것을 중시하였다. 《송사(宋史)》 권428ㆍ《송원학안(宋元學案)》 권39.
주석 39)나 정암(羅整庵)
명나라 때의 유학자 나흠순(羅欽順, 1465~1547)을 말한다. 정암은 호이고 자는 윤승(允升)으로, 국자감 사업(國子監司業)과 이부 상서(吏部尙書) 및 예부 상서(禮部尙書) 등을 지냈으나 사직하고 학문에 투신하였다. 처음에는 불교의 선학(禪學)을 연구하였으나 후에 주자학으로 돌아섰다. 저서에 《곤지기(困知記)》, 《속기(續記)》, 《나정암집》 등이 있다.
주석 40)기(氣)를……달라진다
《곤지기(困知記)》 권상에 보인다.
주석 41)이일분수(理一分殊)로……없다
《곤지기(困知記)》 권상에 보인다.
주석 42)건(乾)의……않는다
《녹문선생문집》 권19 〈녹려잡지(鹿廬雜識)〉에 보인다.
주석 43)각일기성(各一其性)
《근사록》 권1 〈도체(道體)〉에 "오행은 한 음과 양이고, 음과 양은 한 태극이니, 태극은 본래 무극이다. 오행이 생겨남에 각각 그 성을 하나씩 간직하였다.[五行一陰陽也, 陰陽一太極也, 太極, 本無極也. 五行之生也, 各一其性.]"라고 하였다.
주석 44)이는……아니다
《녹문선생문집》권19 〈녹려잡지(鹿廬雜識)〉에 보인다.
주석 45)이것은……않는다
《녹문선생문집》권19 〈녹려잡지(鹿廬雜識)〉에 보인다.
주석 46)노주(老洲) 오 선생(吳先生)
오희상(吳煕常, 1763~1833)으로 자는 사경(士敬), 호는 노주, 본관은 해주(海州),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설을 절충하였다. 저서에 《노주집》이 있다.
주석 47)덕(德)에는……합한다
《서경》 〈상서 함유일덕(咸有一德)〉에 보인다.
주석 48)이치는……다르다
《주역(周易)》 〈계사전 하(繫辭傳下)〉에 "천하가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생각하겠는가. 천하가 돌아감은 같으나 길은 다르며, 이치는 하나이나 생각은 백 가지이니, 천하가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생각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주석 49)나의……꿴다
《논어》 〈이인(里仁)〉에 보이며 공자가 증자(曾子)에게 한 말이다.
주석 50)그것의……없다
《중용장구》 제26장에 "천지의 도는 한마디 말로 다 할 수 있으니, 그 물건 됨이 변치 않는다. 그리하여 물건을 냄이 측량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주석 51)널리……함이다
《맹자》 〈이루하(離婁下)〉에 보인다.
주석 52)이(理)와……하였다
《주자어류》 권1, 〈이기(理氣)상〉에 보인다.
주석 53)텅 비고……있다
《근사록(近思錄)》 권1, 〈도체(道體)〉에 보인다.
주석 54)성(性)이라는……일원(一原)이다
《정몽(正蒙)》 〈성명(誠明)〉에 보인다.
주석 55)성(性)은……다르다
《곤지기속록(困知記續錄)》 권상에 보인다.
주석 56)성과……같지만
《중용장구》 제1장 제1절 주희(朱熹)의 주에 "성과 도는 비록 같지만 기품이 혹 다르기 때문에 과하고 불급한 차이가 없을 수 없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주석 57)이른바……하다는 것
《주자대전》 권42 〈답오회숙(答吳晦叔)〉에 나오는 말이다. 해당 부분에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의리를 이해하려면 모름지기 먼저 명의(名義)의 경계와 구분을 분석해 내어 각각 귀착할 곳이 있어야 한다. 그런 뒤에야 마음에 절로 관통처(貫通處)가 있을 것이니, 비록 '관통(貫通)'이라고 하였으나 혼연(渾然)한 가운데 이른바 '찬연(粲然)'한 것은 애초에 어지러웠던 적이 없었다.[理會義理, 須先剖析得名義界分, 各有歸著. 然後於中自有貫通處. 雖曰貫通而渾然之中所謂粲然者, 初未甞亂也.]"
주석 58)학지(學知)……달려있다
《주자전서》 권43 〈성리(性理)〉에 나오는 말이다.
주석 59)솔개가……뛰노는 것
《중용장구》 제12장에 "《시경》에 이르기를 '솔개는 날아 하늘에 이르는데,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논다.' 하였으니, 상하에 이치가 밝게 드러남을 말한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주석 60)물이……타오르는 것
《서경》 〈홍범〉에 "첫 번째 오행으로 말하면, 첫 번째는 수(水)이고, 두 번째는 화(火)이고, 세 번째는 목(木)이고, 네 번째는 금(金)이고, 다섯 번째는 토(土)이다. 수는 윤하(潤下)이고, 화는 염상(炎上)이고, 목은 곡직(曲直)이고, 금은 종혁(從革)이고, 토는 이에 가색(稼穡)을 한다. 윤하는 짠 것이 되고, 염상은 쓴 것이 되고, 곡직은 신 것이 되고, 종혁은 매운 것이 되고, 가색은 단 것이 된다."라고 하였다.
주석 61)일원(一原)
《주자대전》 권4 〈재거감흥 20수〉의 제20수에 "내가 전인의 가르침에 어두운 것은, 이 가지와 잎이 무성하기 때문이네. 분발하여 영원히 깎아낸다면, 일원에서 큰 공을 거두리라.[曰余昧前訓, 坐此枝葉繁. 發憤永刊落, 奇功收一原.]"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주자대전차의》의 '일원(一原)'에서 "정자의 〈이천역전서(伊川易傳序)〉에 '체와 용은 하나의 근원이다.'라고 하였다. ○웅씨가 말하기를 '이 편은 천도는 말을 하지 않고 성인은 말이 없는데, 후세에 말을 많이 하는 폐단을 논하였다.'라고 하였다. ○내가 가만히 생각건대, 〈감흥시〉는 처음에는 하나의 리를 말하고 중간에는 흩어져 만사가 되고 끝에서는 다시 합해져 하나의 리가 되니, 이것은 《중용》의 뜻이다.[程子易傳序 體用一原. ○熊氏曰, 此篇論天道不言, 聖人無言, 後世多言之弊. ○愚竊謂感興詩, 首言一理, 中散爲萬事, 末復合爲一理, 此中庸之義也.]"라고 하였다.
주석 62)기질지성(氣質之性)이란……있는 것
《주자전서(朱子全書)》 권42, 〈성리(性理)〉에 "기질의 성은 단지 이 성이 기질에 떨어져 있는 것이므로 기질에 따라 각각 하나의 성이 된다[氣質之性, 只是此性墮在氣質之中, 故随氣質而自爲一性]"라는 말이 보인다.
주석 63)사람과……다르다
《주자어류》 권4 〈성리(性理)〉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인과 물의 성은 부여받은 형체의 편정이 정녕 본디 같지 않다. 그런데 편정한 가운데 다시 청탁혼명의 차이가 본래 있다.[人物之性, 其賦形偏正, 固自合下不同. 然隨其偏正之中, 又自有清濁昏明之異.」)"
주석 64)편언(偏言)하면……포괄한다
정이천(程伊川)의 《역전(易傳)》 〈건괘(乾卦) 단사(彖辭)〉에서 "사덕의 원이 오상의 인과 같으니, 따로 떼어서 말하자면 네 가지 가운데 하나의 일이고 통틀어서 말하면 네 가지를 포괄하는 것이다.[四德之元, 猶五常之仁. 偏言則一事, 專言則包四者.]"라고 한 것에 근거하였다.
주석 65)산수(散殊)
각양각색, 각각 구별이 있다는 말이다. 《예기》 〈악기(樂記)〉에 "하늘은 위에 있고 땅은 아래에 있으며 그 중간에 만물이 각양각색으로 산재하여 예의가 행해진다.[天高地下, 萬物散殊, 而禮制行矣.]"라고 하였다.
주석 66)기질지성(氣質之性)을……않는다
북송의 유학자 장재(張載)가 말하기를 "형체를 이룬 뒤에 기질의 성이 있으니, 본래의 선으로 돌아가면 천지의 성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기질의 성을 군자는 성이라고 하지 않는다.[形而後有氣質之性, 善反之, 則天地之性存焉. 故氣質之性, 君子有不性者焉.]"라고 하였다. 《張橫渠集 卷3 誠明篇》
주석 67)오행이……갖는 것
《근사록》 권1 〈도체(道體)〉에 "오행은 한 음과 양이고, 음과 양은 한 태극이니, 태극은 본래 무극이다. 오행이 생겨남에 각각 그 성을 하나씩 간직하였다.[五行一陰陽也, 陰陽一太極也, 太極, 本無極也. 五行之生也, 各一其性.]"라고 하였다.
주석 68)수윤 화조(水潤火燥)
물이 축축한 곳으로 흐르고 불이 마른 곳으로 나아가는 성질을 말한다.
주석 69)사람과……있다
《주자어류》 권4 〈성리(性理)〉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인과 물의 성은 부여받은 형체의 편정이 정녕 본디 같지 않다. 그런데 편정한 가운데 다시 청탁혼명의 차이가 본래 있다.[人物之性, 其賦形偏正, 固自合下不同. 然隨其偏正之中, 又自有清濁昏明之異.]"
주석 70)기분(氣分)
개인이 하늘로부터 부여받아 가지고 있는 원기(元氣)를 말한다.
辨田愚所著。蘆沙先生納凉私議記疑。
凉議曰。分也者。理一中細條理。理分不容有層節。分非理之對。分殊二字。乃對一者也。○記疑曰。此語驟看。無可疑者。但蘆沙答奇景道書云。在天原無此分。則人物何處得來而有此偏全。然則此言分者細條理。將爲異日人物所得。偏本然全本然之源。愚意偏之與分。元非一串。分如一身耳目手足。偏如一耳獨聽。半身偏遂也。分是一中本有之理。而偏是氣上對全之性。恐難做一樣說也。
理有分。故物有偏全。理若無分。物何自而有偏全乎。今曰分如一身之耳目手足。而爲一中之本有。請以此說明之。合耳目手足百骸百體。而爲一身之統體。合人獸草木萬象萬物。而爲天地之統體。知人身統體之理。本有於未生之前。而不知天地統體之理。本有於未形之前耶。知人耳目手足之本有。則鳥獸之羽毛蹄角。草木之枝葉花實。亦不可謂非本有矣。然則人物偏全。果非天命之本然乎。分與偏全。若非一串。朱子何以曰覆載生成之偏。又何以曰人物之生。其賦形偏正。固合下不同耶。至若獨聽偏遂。此是氣失其平。而爲未成之物也。烏可援而爲說耶。
凉議曰朱子曰太極者象數未形而其理已具之稱。形器已具而其理無眹之目。夫象數未形。則未破之一矣。而其理已具。則非分之己涵乎。形器已具。則旣定之分矣。而其理無眹。則非一之自在乎。○記疑曰未審蘆沙以其理已具。爲人物所稟偏全之源乎。竊意此句指意。恐是父子君臣未生之前。慈孝禮忠之理已具。事物微細未有之先。事物微細之理已具云爾。非聖人未生之前。已有理一中分殊之全理。賢人衆人未生之前。已有幾分未全之理。下愚大憝未生之前。已有十分不移十分乖戾之理。鳥獸枯槁未生之前。已有偏塞之理。而各爲萬象所得之源也。然則似與蘆沙所謂在天源無此分。則人物何處得來而有此偏全云者。判然殊別矣。可疑。
盈天盈地。若大若細。無一物而非象數與形器也。然則人未生而人之理已具。物未生而物之理已具者。何足多辨彼於此義。必非不知。而故引氣質分數下愚大憝之語。眩混其說。以濟其一時忌克之私。噫。用心如此。此等理致之得失。猶是小事也。
天偏於覆。而地偏於載。日偏於晝。而月偏於夜。目偏於視而耳偏於聽。手偏於持。而足偏於行。以昭昭而視周天。則周天爲全。以涓涓而視河。海則河海爲全。以一葉而視一樹。則一樹爲全。以一肢而視一身。則一身爲全。天下何物果有外於偏全者哉。以此爲非本然。則天下更無本然久矣。且以鳥獸草木。謂非理之所本有。則人是何物。獨爲理之所本有耶。人旣非本有。則慈孝禮忠之理。豈獨爲本有而已具於何處耶。豈以急於取辨而有不暇察也耶。
凉議。曰性同者。吾不曰不然。而以偏全之性。爲非本然。則是分外有理也。遂主同而廢異。則性爲有體無用之物矣。○記疑曰。洛家若指性中發出來底忠孝仁讓。而曰此分之殊。非本然之性也。則分外有理。而性爲無用之物矣。但謂萬象之性。其體本全。而自學知以下。至於翔走枯槁之發見。各隨所稟之氣而自爲一性。由未達一間。至於一點子。由相近至絶不同。由天縱之聖。至下愚不移。其品有萬不齊。是安可皆謂本然之性乎。
氣之淸濁粹駁。固隨遇而適然。萬物之生。偏全之分。亦隨遇而適然者乎。若隨遇而適然。則豆可以瓜。瓜可以豆馬可以角。牛可以鬛。上帝之主宰。乾道之各正。果是何事。欲守偏全分之語。而至於上帝失其宰。乾道失其職。可乎不可乎。
萬象之性。其體本全。至於發見自爲一性。此果成說乎。然則犬之性牛之性。與人之性同其全。草之性。木之性。與天之性同其大。而至於發見而後。乃始爲天爲人爲犬牛爲草木耶。言之無謂。令人代赧。
凉議曰。天下之性不全則偏。固未有不全又不偏之性也。偏全皆非本然。則天下無一物能性其本然之性者。而本然之性永爲懸空之虛位。卽將安用彼性矣。所貴乎正通者。以其得本然之性也。若與偏塞者。均之爲非其本然。則何正通之足貴乎。蓋以無分爲一。其敝必至於此。其以各正之性。爲落分殊犯形器。不足以爲一原。與甲邊之議。恐無異同。○記疑曰。問氣質不同。則天命之性。有偏全否。朱子曰。非有偏全。此洛家之所本也。今若譏之曰。天下之性。旣無偏又無全。則不過爲虛位云爾。則豈得爲盡人之言者耶。此不待多般而明矣。所貴乎正通者。以其得本然之全。然則偏塞者所得。只是本然偏矣。無乃與天命之性。非有偏全者。相盭矣。若改之曰。所貴乎正通者。以其能全本然之性。則似無可議矣。
朱子曰。非有偏全。又曰。人物之生。其賦形偏正。固自合下不同。須知理之非有偏全。又知理之不容無偏全。然後方可謂識理矣。天命之性所以賦予者。固無人物貴賤之殊者。是無偏全之謂也。萬殊之分。森然已具於一原之中者。是有偏全之謂也。徒知非有偏全之語。而謂人物無各正之性。徒知合下不同之語。而謂人物無一本之性者。皆執一而廢百。得此而失彼者也。旣不能盡乎朱子立言之意。而乃反譏人以不能盡人言之意耶。朱子曰。各正得於有生之初。然則正通者。得本然之全。偏塞者。得本然之偏。又何疑乎。
凉議曰偏全指善一邊。如孔隙雖有大小。而月光自若。盤盂雖有方圓。而水性無恙。豈不是本然。○記疑曰信斯言也。蜂虎果然之仁義。堯舜周孔之仁義。毫無殊別矣。然則朱子何以言仁義禮智之粹然者。人與物異乎。
彼以偏全謂非本然。而曰萬象之性。其體本全。外偏全而言本全。則蜂虎之性。與堯舜之性。果無毫髮差殊。可謂倒戈而自攻。言人物分殊。則以其體本全駁之。言人物性同。則以蜂虎果然譏之。亦可謂無定論。而隨其人之所在而攻之者也。
凉議曰氣質是兼善惡。如和泥之水。稠淸百層。隔窓之月。明暗多般。以偏全爲氣質。豈不低陷了偏全。○記疑曰堯舜孔子之全。固當爲本然。至於夷惠之偏於淸和。顔閔之具體而微。游夏之僅有一體。則豈非出於氣質乎。此類不可謂兼善惡也。人猶如此。況於微物乎。今不欲以偏全爲氣質。恐終可疑。
夷惠游夏之偏。是氣質之善一邊也。桀紂幽厲之暴。非氣質之惡一邊乎。雖以善一邊言之。其些有未盡處。亦不可謂非未善也。今乃特擧善一邊。而謂之不兼善惡可乎。偏全之云。不須再辨。
凉議曰氣質之性。君子有不性者焉。人物偏全之性。君子亦有不性焉者乎。○記疑曰。氣質之性。君子有不性者焉。本橫渠先生語。先生又嘗言。凡物莫不有是性。由通蔽開塞。所以有人物之別。由蔽有厚薄。故有知愚之別。今以上一股爲偏塞。而屬於本然之性。下一股爲氣質。而降爲不性之科。恐文義事理俱難如蘆沙之言矣。問氣質不同。則天命之性。亦有偏全否。朱子曰。非有偏全。偏全之性。豈非朱子之所不性焉者乎。據此則南塘蘆沙兩說。似當更加商確。恐未可認爲千古不易之論也。
橫渠先生此說。主意專在於人物賢愚通蔽開塞厚薄難易之分。而次第說來。其文勢語脈。於本然與氣質。有不暇及。又安知今日有此偏全非分之說。而豫爲準備之耶。偏全之出於氣質者。固不性焉。偏全之由於理分者。亦不性焉乎。偏言之仁。專言之仁。亦朱子不性焉乎。覆載生成之偏。天地亦不性焉乎。千古不易之論。恐非人人所得知也。朱子曰。人物之生。其賦形偏正。固自合下不同。然於不同之中。又各自有淸濁粹駁之不同。上段不同。是本然之分下段不同。是氣質之異。中庸章句。先言人物各得之分。次言氣稟或異。橫渠此言。亦是此義。豈以下一股言氣質。而賺連上一股。亦作氣質看耶。
凉議曰理旣云萬事本領。氣是甚樣物事。乃獨你一我殊背馳去。近世諸先生圻開理分。大抵皆你一我殊之論。其蔽也。氣無聽命於理。理反取裁於氣。天命之性。徒爲虛語耳。○記疑曰。理一分殊。固是理中事。然分殊。先賢直就氣異處說者。極多。今且以隙日譬之。隙之長短大小。自是不同。然只是此日。只是此日。理一也。隙自不同。分殊也。此與前一義。可倂行而不相礙也。至若天命之性。雖十分大全。十分至善。無奈所賦形氣有異。莫能遂其本然。雖是性體而氣用。亦是理弱而氣强。故不能無蔽也。若以分殊專歸之理。則理果號令乎氣。氣果隨順於理。而更無不治之國。更無爲惡之人也。恐難如此立語。
以本原而言。則條理分殊。固粲然已具。此道器不雜處。太極圈所以排出也。以流行而言。則條理分數。可以卽氣而見其實。此道器不離處。陰陽五行圈所以爲各具也。先賢多就氣異處。說分數者。此也。如以隙日譬之。隙雖有長短大小。而其長短大小必照之光。固燦然已具於日矣。至於光之成形著迹。則可以就其隙而見其實也。
理爲氣主。曷嘗是有作用行號令之謂。然無其理則無其事。有其理則有其事。有作用之理。故氣能作用。有號令之理。故人能號令。若以條理分數。一歸於氣。則三百三千。皆非本然。其有關於世敎。爲何如哉。旣曰分是理中矣。而繼以分殊專歸於日之隙。旣曰天命十分大全矣。而繼以分殊不專歸於理。則所謂理中事。果何事。所謂十分者。果是幾分耶。未見其倂行而不相礙也。若曰性體而氣用。則性爲有體無用之物耶。如此則程子所謂體用一原。爲二原矣。所謂顯微無間。爲有間矣。所謂未應不是先。已應不是後。爲有先後矣。近世主氣之說。其失蓋原於此。
若以不治之國爲惡之人。而疑理不爲主。則是見有媢德之人。而斥烝民好德之言。見有性惡之人。而廢孟子性善之說。可見其說之窮矣。
凉議曰。五常人物同異。畢竟惡乎定。曰定於先覺之言。朱子之論此固多。其見於四子註說者。則手筆稱停。非記錄書疏之比。其言人物五常。凡有三處。曰人物之生。必得是理然後。有以爲健順仁義禮智之性者。大學或問也。人物之生。各得所賦之理以爲健順五常之德者。中庸章句也。此皆不區分人物。一例說去。粗通文理者。初不難辨。且得以爲性。得以爲德之云。皆屬成性以下。而非繼善以上事。則朱子之意。明以人物之生爲同五常矣。獨於孟子生之謂性章集註。以理言之。則仁義禮智之粹然者。豈物之所得以全哉。【田愚按。粹然者。本作稟。以本作而】此爲區分人物處。【田愚按。此註亦不專於區分人物。何以言之。上文旣言性形而上者。人物之生。莫不有是性。是性何性。卽所謂仁義禮智之性也。是章句或問之同矣。如以物豈得全爲區分人物之斷案。則章句下文。豈不曰。氣稟或異。故不能無過不及之差。或問下文。豈不曰彼賤而爲物者。梏於形氣。而無以充其全矣乎。此二條。又皆與孟註之云。無些子異意。愚按。謂三處俱是同體異用之說也。】然而只曰物豈得全。不曰物莫得與。則此亦人物同五常之說也。朱子之爲此說。豈喜爲刱新之論。以同人道於庶類哉。蓋此理之外。更無佗理。是以直以從上聖賢。四破人性的字。一萬物而貫之。不以爲嫌也。【田愚按。以上所論。無不與洛家同。】雖然。一而無分。非吾所謂一也。故庸學或問。卽言鳥獸草木之生。僅得形氣之偏。而不能有以通貫乎全體。彼賤而爲物者。梏於形氣之偏塞。而無以充其本體之全。此言人物之性。雖同此一理。而理中之分限。不能無也。氣所以承載此理。故雖不離形氣而言分。而一之未嘗無分於此因可見矣。合此上下文義而觀之。其與生之謂性集註。亦非有異義也。後人各占二半。就生軒輊。此豈朱子之所能料哉。是知物我均五常者。理之一也。五常有偏全者。一中之分也。蓋自統體一極。理分圓融而無間。故其成性於萬物者。又如此。故先覺論性。有言理同理不同者。非相戾也。共公以論其妙。則排出而言之。眞的以指其體。則卽氣而明之。排出則理本一。故理一爲主。而萬殊涵於其中。【田愚按。以偏而不全者。爲萬殊。殊不可曉。】卽氣則氣已分。故分殊爲主。而理一存乎其間。自是話有兩般。何曾性有多層。諸家緣理分一體處。未甚着眼。說異則欲獨擅五常。說同則乃低視偏全。差以毫釐。謬以千里。豈不信乎。○記疑曰。庸學或問。若單言微物而不倂擧衆人。則猶或可如蘆沙之言矣。今其文明明言知愚賢否氣稟之異。而曰於其所謂性者。有所昏雜而無以全其所受之正。又曰。其所謂明德者。已不能無弊。而失其全矣。此與微物之不能通無以充者。語意一致。類例無二。而以不能通無以充歸之本然之性。無以全失其全。歸之氣質之性。則無亦有失其平之嫌乎。如有人質於蘆沙曰。聖凡均德性者。理之一也。德性有偏全者。一之分也。則將應之曰然乎否乎。
就人物上倂擧五性字而言之者。有此三處。故先師云然耳。下文之區分有無。不須論也中庸章句氣稟或異非人物之區分。是就人物上區分其氣稟之不同。若人物之區分。則已在於上文天以陰陽五行化生萬物條。此亦可以知人物偏全爲本然之分也。同體異用與性體氣用之說。同一圈套。不足多卞。所謂與洛家同者。其實有不同焉。先師所謂同。卽實底同。諸家所謂同。乃虛底同。庸學或問。主言天命明德人物一原。而究別其源委曲折多寡分數。故自草木禽獸。至於衆人賢人。以至於聖人之盡性而乃已。其語脈次第。固應如此。至若本然與氣質。自是別說。有不暇區別。章句曰。人物各得所賦之理。又曰人物各循其性之自然。或問曰。無以通貫全體。又曰無以充其本體。何其褒於章句而貶於或問也。蓋章句言所稟本然之妙。或問言所賦分數之異。今見其貶者。以爲非本然。則倂與其褒者而以爲非本然耶。無以全。失其全。正章句所謂氣稟或異者。而爲修道立敎處也。
凉議曰。本體而云無以充。本體爲性分耶。至無以充三字。始爲性分耶。全體而云不能通貫。全體爲性分耶。至不能通貫四字。始爲性分耶。曰本體全體。卽性分中理一處。無以充不能通貫者。卽性分中分殊處也。兩項事理。有則俱有。今必欲二而論之。謬矣。○記疑曰。無以充不能通貫。分明是形氣偏塞之病。今必以爲性之分殊。使人聽瑩。且以大學論之。天降生民。莫不與性。性分中理一處。氣稟不齊。不能皆全。性分中分殊處。虛靈具應德分中理一處。拘蔽或昏。德分中分殊處。如此說亦得否。請觀者爲下一轉語。
無以充不能通。豈朱子歎草木鳥獸之不能服堯服言堯言而爲是說耶。只是據天命明德。而言其所存不同之分。有如此耳。人而服堯言堯。人將以爲聖矣。草木鳥獸而服堯言堯。人將以爲怪矣。然則無以全。失其全。在人固爲氣稟之蔽。無以充。不能通在物豈非本然之分耶。
凉議曰以理言之。則萬物一原。固無人物貴賤之殊。此一節。所謂排出以言其妙。理一爲主也。以氣言之。則得其正且通者爲人。得其偏且塞者爲物。此一節。所謂卽氣以指其實。分殊爲主者。○記疑曰。上一節。言一性之中含具萬理。一性理一也。萬理分殊也。人物同此一原也。【雖萬言分殊。不害其無人物貴賤之殊。據此可見分偏之不可以相準。此一着最可領悟。】下一節却只專言氣稟事。蓋此二十一字。無一點一畵可指理之實處。而蘆沙之言如此。可疑。
爲人爲物。不在本然分殊之中。則所謂分殊。果是何事。所謂人物。果從何處來。人物之分。固已具於一原之中。而人底只是此理。物底亦只是此理。故曰無貴賤之殊也。人物之分。固已素定。而至氣以成形而後。方見其實。故曰卽氣而指其實。孔子以一陰一陽爲道。程子以川流不息爲道體。朱子以五行爲道之體段。人苟達於理致。則盈天地形形色色。莫非道理也。今以正通偏正。謂非理之實體。則必言理字道字太極字而後。乃謂之理耶。一點一畵之云。令人可笑。
凉議曰。心雖氣分事。而乃所具則性也。心具性。凡聖同。心不能盡性。凡聖異。其同其異。皆所重在性也。南塘乃忘其同者。主張其異者。以聖凡異心爲法門。其亦矛盾於聖人之意矣。與南塘辨者。亦不言其所重之有在。區區較其光明之分數。欲以此爲同聖凡之心。未爲箚着痛處。○記疑曰。氣質者。淸濁粹駁。有萬不齊。心者虛靈神妙。有一無二。南塘乃認兩者爲無辨之物。今不指其光明之無優劣分數。只擧心具性聖凡同者以辨之。其不被南塘之哂者鮮矣。況心之具性。微物亦然。何足以辨南塘之疑乎。
心與氣質。不是判然二物。隨其淸濁粹駁。而其靈不能無分數。固不可指此而謂聖凡同。亦不可專認光明爲心而謂聖凡異。然則所重之外。更安有一物獨無優劣分數者乎。抑或有形而下之明德耶。【任全齋以明德爲形而下。】近世諸儒。多以氣質爲不囿於身體。又以虛靈爲不根於氣質。有上帝降靈坐在方寸之語。遂以此爲明德。以此爲同聖凡。此與異說其光爍爍死而不滅。何別。夫氣質者。只是此身陰陽之團聚。而心則其精爽也。氣旣有淸濁粹駁。則其精爽不容無分數。但所具者性也。所謂本心良心仁義心。何嘗有聖凡之異。今見光明無分之語。可知其承誤踵訛。非一朝一夕之故也。
凉議曰。碎紙中。得鹿門任氏一段議論。苟言異則非但性異。命亦異也。苟言同則非但性同。道亦同也。此言驟看外面。殆若鹿邊者獐。獐邊者鹿。而其實說得道理原頭。無有滲漏。伊川理一分殊四字。賴此公而一脈不墜於東方歟。恨未得其全書而攷閱也。○記疑曰。理一分殊。伊川何嘗以之論性。只因西銘。使人推理而知其一。存義而立其分而已。楊李朱子所論。亦皆如此。至羅整庵始揭此四字。以爲性命之妙。無出於此。其言曰。受氣之初。其理惟一。成形之後。其分則殊。此與蘆沙之意遠矣。又曰。以理一分殊。論性。則自不須立天命氣質兩名。則其說更乖矣。又其認理氣爲一物。而深病乎朱子理氣二物之訓。則愈不可說矣。我東任鹿門。又祖述羅氏四字之旨。而其言曰。乾之健卽太極。而健之中。有元亨利貞。坤之順卽太極。而順之中。有元亨利貞。元亨利貞卽陰陽五行也。然乾之元亨利貞。依舊是健。坤之元亨利貞。依舊是順。然則乾坤之太極。自不害其不同也。又作人物性圖。人圈具書五常。太極物圈只書太極而不書五常。又論朱子渾然太極各具一物之說云。此謂卽此各一處。天理完全無所虧欠耳。非謂一物具萬理。此皆看得分殊之過。而至於如此。又論人性之善曰。此乃氣質之外。別有善底性也。此尤不可曉矣。使蘆沙復起見此。不覺蹙頞而長太息也。老洲吳先生。嘗有論羅任兩家者極多。今擧三段附見于下。使蘆門諸公看詳焉。○老洲集雜識曰。整庵鹿門均爲理氣一物之論。然整庵於理一看得重。鹿門於分殊看得重。看理一重。則自然理爲主。看分殊重。則畢竟氣爲主。以此較論得失。整庵殆其少疵矣乎。又曰。整庵鹿門皆從推理看得合一之妙者。驟看非不高妙。然其究也。皆歸於主氣。而整菴則猶有每每提掇此理之意。鹿門直以一氣字。盡冒天下之理。更不求理之所以爲理。蓋鹿門之見。實本於整菴。而其主張氣字。則殆過之耳。又曰。整庵以理一分殊。爲說理氣底枰子。其曰。性以命同。道以形異者。極是。性以命同。卽未發而指理一也。道以形異。卽已發而指分殊也。鹿門祖述其理一分殊。而獨深斥此語。何也。終是拘於人物之偏全。不能疏觀性道雖有體用之異。不害其一原之同也。
德無常師。主善爲師。善無常主。協于克一。曰一致而百慮。同歸而殊塗。曰吾道一以貫之。曰其爲物不貳。則其生物不測。曰博學而詳說之。將以反說約也。細究而詳玩之。則經傳之中。說理一分殊義甚多。而無非所以明此心此性之妙也。朱子曰。理與氣。伊川說得好。曰理一分殊。理一分殊。卽伊川所雅言也。豈但因西銘而發哉。程子又曰。沖漠無眹。萬象已具。張子曰。性者萬物之一原此不可以論性耶楊李二氏以仁義論理一分殊是豈至羅氏始揭以說性耶。
鹿門健順太極之說。恐無害。而其曰元亨利貞卽陰陽五行一條說。有理氣一物之病。羅整庵性以命同道以形異之說。有不可曉。中庸章句性道雖同。在化生萬物之後則雖同之同。已是該分之同。豈待形而後異哉。形字若作氣稟或異看。則形與氣稟。意義逈別。鹿門斥之是矣。但人物性圖及氣質之善之說。果不可曉。然不以人廢言。況以此言之失而廢他言之得乎。
凉議曰諸家言人物之性。一是皆以理爲無分之物。分爲因氣而有。限理一於離形氣之地。局分數於墮形氣之後。於是理自理。分自分。而性命橫決矣。○記疑曰。若使洛家謂太極而無元亨利貞。性而無仁義禮智。則當曰理爲無分之物矣。若謂元亨利貞因氣而始有。仁義禮智待氣而始生。則當曰分爲因氣而有矣。今旣不然。則安有理自理分自分之患乎。
元是生萬物之理。而包含徧覆。無不周徧。亨是長萬物之理。而條理等威。粲然宣著。利是成萬物之理。而裁制差別。無不恰當。貞是藏萬物之理。而保合大和。各正性命。此理也。在天爲天之理。而萬物之理具焉。在人爲人之理而萬事之理具焉。今知太極之有元亨利貞。而不知元亨利貞裏面。有人物偏全自然之分耶。
人有一箇身。便須管着天下事。夫何故。有一箇身。必有主此身者。君上是也。必有生此身者。父母是也。必有此身先後生者。兄弟是也。必有此身對配者。夫婦是也。必有此身同類者。朋友是也。此身爲萬物之靈。則必有宰萬物之理。此身爲天地之心。則必有輔相天地之理。人猶如是。況於天乎。善言天者。必於人觀之。
下段猥筆辨。彼旣曰單指機上之理則曰太極。兼擧四時之氣則曰元亨利貞云云。必兼擧四時之氣而后曰元亨利貞。則此非因氣待氣而何。
凉議曰。今有一塊銅鐵。可以爲盤盂。可以爲刀劒。是分殊之涵於一。所謂粲然者。非東邊可爲盤盂。西邊可爲刀劍。則渾然。及其人盤盂爐而爲盤盂。入刀劒爐而爲刀劍。各得其本分之一。○記疑曰。假如有人言入輕淸爐而爲天。入重濁爐而爲地。入淸粹爐而爲上智。入濁駁爐而爲下愚。入陽剛爐而爲男。入陰柔爐而爲女。是各得其本然之一云。將如何辨破。
爲人爲物。爲男爲女。是銅鐵之爲盤爲盂爲刀爲劒也。爲賢爲愚。銅鐵之遇爐鞲緊歇。而鍛鍊有精鹿也。且爲盤盂爲刀劒。是銅鐵之自爲邪。有主張者存乎否。
凉議曰。旣以分爲因氣而有。則無怪其以人物同五常。爲本然之性。而偏全之性。爲非本然。有人物性同之論。○記疑曰。偏全通塞。與分殊之分。殺有不同。分雖具於天地人物未生之前。而偏全通塞。却繫於所賦之氣。且偏全非可單言於人物。亦可幷言於聖凡。故朱子言學知以下。氣之淸濁有多寡。而理之全缺繫焉。今以聖凡同五常。爲本然之性。而理之全缺者。爲非本然。有何窒礙乎。如此則人之性。可以三隅反也耶。
偏全以人物言者。本然之分也。以聖凡言者。氣稟之異也。若以人之全謂本然。而物之偏謂氣質。則人獨得本然之性。物之所得。只是氣質之性而已耶。然則鳶飛魚躍。水潤火燥。皆非本然也。天下安有一物能性其性者耶。
旣曰分已具於人物未生之前。而猶以偏全謂却繫於所賦之氣。夫人物之分。舍偏全而更有何分乎。可知其說之窮矣。不思之甚也。
凉議曰。五常之隨物而偏全。乃此理之本分。何可同也。偏全不同。而猶謂之同者。如盤盂刀劒爲銅鐵則同之同。非以混同無盤盂刀劒而謂之同也。偏全之性非本然。離盤盂刀劒而求銅鐵之說也。○記疑曰。人物一原之中。有五常。此爲理之本分。今以五常之隨氣而發見有全缺者。謂之理之本分。而喚做性之本然。此與朱子性之在氣質者。其品不一。所謂氣質之性。與以氣質論則凡言性不同者。皆氷釋之訓。無或相戾乎。
人與人不同。物與物不同。此是氣質之偏全。人與物不同。此是本然之偏全。朱子曰。人物偏正。固自合下不同。程子言仁曰。偏言則一事。全言則包四者。此言偏全。亦皆非本然耶。
凉議曰。以一視五。五者同一。以五相視。分於是存。雖散殊之無窮。皆本分中事。欲低視偏全可乎。○記疑曰。以一身視四肢。四肢同一身。以四肢相視。分於是存。此固然矣。然豈可以四肢與分殊。分偏全乎。愚故曰。分與偏全不同。如欲言偏。當曰四肢或有痿痺不仁。癱瘓不遂。然後方可謂之偏。雖欲不低視得乎。
統一身而言。則猶理一也。指百體而言。則猶分殊也。言一身而百體在其中。言百體而一身在其中。非一身之外別有百體。非百體之外。別有一身。理一分殊之非各有方所各有時節。如此。今以一身對四肢。而局理一於一身。限分殊於四肢。以理一分殊爲局定間隔之物。此其所以有同體異用偏全非分之說也。
凉議曰庸學或問。旣從陰陽五行說來。言其綱理之一般。繼以陰陽五行之偏全。言其條件之不同。一時事而先後言之。有何可疑之端乎。○記疑曰陰陽五行之偏全。自屬氣質。健順五常之條件。自屬分殊。何可直指分殊爲偏全乎。若如此則手足之異名。而可謂之偏全。恐不成言。
張子曰。氣質之性。君子有不性者焉。此言氣質性之非本然也。朱子以五行之生。各一其性。爲氣質之性。此與張子之言。雖不同。而不害其各爲一義也。此則不可謂非本然之分也。彼旣以氣質之性。謂非本然。而以陰陽五行之偏全。歸之於氣質。而與所謂痿痺癱瘓者。同科。其無謂甚矣。然則陽剛陰柔。水潤火燥。皆非本然耶。天地萬物。有則俱有。如人身之四肢百骸。加不得。減不得。完全周足。無有空闕。此是太極之大全。造化之妙用。若曰陰陽五行。繫於所賦之氣。而爲臨時排定云爾。則太極果是虛位。而爲造化者。不已勞乎。
天之生萬物。猶人之應萬事。應萬事之理。不先具。則人性之體。有欠闕矣。生萬物之理。不先具則天命之原。有疎漏矣。若曰天命之原。與人性之體。有不同云。則非愚之所知也。
朱子曰。人物之生。其賦形偏正。固自合下不同。然於偏正之中。又各自有淸濁昏明之不同。上段合下不同。是本然之分也。下段又自不同。是隨氣之分也。今合上下段。而一歸之氣分可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