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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0
  • 서(9)(書(9))
  • 정원실【현채】에게 답함(答鄭元實【現采】)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0 / 서(9)(書(9))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0.0001.TXT.0021
정원실【현채】에게 답함
서로 모여지내다가 갑자기 헤어지니 서글픈 마음은 배나 더하여 멈추질 않네. 인하여 부모를 모시고 공부하면서 줄곧 건강하다고 하니, 실로 걱정하던 마음이 놓이네. 나는 모든 것이 전날과 같네. 보내준 편지에서 길고 자세하게 말한 것에서 뜻을 세워 부지런히 공부함을 알 수 있으니 기특한 마음이 그치지 않았네. '마음은 하늘과 같다.…'라 하였는데, 사람이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 있네. 그렇다면 그대처럼 말하여도 무방하고 애장(艾丈)주 86)처럼 말하여도 무방하니, 어찌 일정하여 바뀌지 않겠는가. 본연의 심(心)과 기질의 심이라고 한 부분도 또한 자못 온당하지 않네. 성은 하나인데, 다만 그 성을 가리키면 본연의 성이라 하고 기를 겸하여 가리키면 기질지성이라 하네. 지금 만약 이로써 비준하여 '다만 그 심을 가리켜 본연의 심이라고 하고 그 기를 겸하여 가리키면 기질의 심이라 한다.'라고 말한다면, 아마도 온당하지 않은 것 같네. 심이란 사물은 본래 단지 리(理)자만으로 마칠 수 없고 또한 단지 기(氣)자 만으로 마칠 수 없으니, 반드시 리와 기가 합한 뒤에 이름을 얻은 것이라면 아마도 성(性)자의 본연이나 기질로 논할 수 없는 것 같네. 또한 본연의 심을 도심(道心)에 대응시키고 기질의 심을 인심(人心)에 대응시킨 것도 또한 옳지 않은 것 같네. 비록 성인이라도 인심이 없을 수 없다면 또한 기질의 심이 없을 수 없는 것 아닌가.
마음이 비록 미발과 이발의 다름이 있지만 기(氣)로써 리(理)를 싣는 것은 마찬가지이니, 어찌 미발을 다만 리라고 이르고 이발을 전적으로 기라고 이를 수 있는가. 형기(形氣)와 신리(神理)에 대해 논한 것은 말이 혹 통창하지 못하지만 뜻은 괜찮네. 다만 마지막 단락의 '성(性)과 정(情) 이외에 다시 마음이 없다.……'라 한 것은 아마도 옳지 않은 듯하네. 성과 정이 비록 마음의 체와 용이기는 하지만 성과 정을 주재하는 것은 마음이 아닌가. 이 의미를 다시 더욱 정밀하게 생각해보는 것이 어떠한가. 뒤에 보낸 편지에서 《주역》 괘효와 무극 태극에 대하여 논하였는데, 일단 이것은 한쪽으로 제쳐두고서 견해가 한 층 더 발전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어떻겠는가. 대저 평소 눈앞에 보이는 일과 사물에 나아가 그 소당연(所當然)과 소이연(所以然)을 궁구하는 것이 바로 절실하게 묻고 자신의 가까이에서 생각하는 것으로 학문이 이에 근거하여 추측하는 곳이 있게 되네. 만약 이를 도외시하고 마음을 현묘하여 알기 어려운 곳에 내달린다면 바람과 달을 붙잡으려 하는 것과 어찌 다르겠는가.

질문 : 배우고 때로 익히는 것은 인(仁)이며 벗이 먼 곳에서 온 것은 예(禮)이며 알아주지 않아도 화를 내지 않는 것은 의(義)인데, 지(知)와 신(信)이 들어가지 않은 것은 어째서입니까. 이 세 가지를 잘 다스리면 말하지 않아도 이 세 가지 안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까.
답변 : '기쁘다[悅]'는 말에는 인의 뜻이 있고 '즐겁다[樂]'는 말에는 예의 뜻이 있고 '성내지 않는다[不慍]'는 말에는 의의 뜻이 있을 뿐이니, 어찌 일찍이 때로 익히는 것이 인이 되며 벗이 찾아오는 것이 예가 되겠는가. 지(知)란 다만 이것을 아는 것이요, 신(信)이란 이것을 신실하게 하는 것이네.
질문 : "성은 서로 가깝다."주 87)는 것에 대해 정자는 전적으로 기질지성이라고 하였고 주자는 기질을 겸하여 말하였다고 하였는데,주 88) '겸(兼)'자는 대단히 정밀합니다. 대개 성이 서로 가까운 것은 바로 본연지성이 기질의 안에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기질을 따라 따로 한 성이 되었지만 그 본연의 것은 항상 주인이 되니 그러므로 기질을 겸하였다고 말하였으며 전적으로 기질을 주로 하여 말하지 않았습니다.
답변 :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은 본래 서로 다른 두 성이 아니니, 정자와 주자의 말씀이 어찌 다름이 있겠는가.
주석 86)애장(艾丈)
애산(艾山) 정재규를 가리킨다.
주석 87)성은 서로 가깝다
《논어》 〈양화(陽貨)〉에서 공자가 "본성은 서로 가까우나 습관에 의해 멀어진다.〔性相近也 習相遠也〕" 하였다.
주석 88)정자는……하였는데
정자는 "이는 '기질의 성〔氣質之性〕'을 말한 것이지 성(性)의 본연을 말한 것이 아니다. 그 본연을 말하면 성(性)이 곧 이(理)이고 이(理)는 불선함이 없으니……어찌 비슷함이 있겠는가?〔此言氣質之性 非言性之本也 若言其本 則性卽是理 理無不善……何相近之有哉〕"라고 하였고, 주자는 여기에서 말한 성(性)은 기질을 겸하여 말한 것이다. '기질의 성〔氣質之性〕'은 본디 아름답고 추악한 차이가 있지만, 처음 상태로 말하면 모두 차이가 그다지 크지 않다. 다만 선을 익히면 선해지고 악을 익히면 악해지니, 이리하여 비로소 차이가 크게 되는 것이다.〔此所謂性 兼氣質而言者也 氣質之性 固有美惡之不同矣 然以其初而言 則皆不甚相遠也 但習於善則善 習於惡則惡 於是始相遠耳〕"라고 하였다. 〈양화〉의 장하주.
答鄭元實【現采】
相聚之餘。遽爾分張。悵悢之懷。一倍難任。因詢侍旁學履。一視崇謐實副懸情。義林一如前日而已。示喩縷縷。可見存意之勤。感感亡已。心如天云云。此在人所見之如何。然則如賢說亦得。如艾丈說亦得。豈有一定不易者哉。本然之心。氣質之心。亦頗未穩。性一也。而單指其性。則曰本然之性。兼指其氣則曰氣質之性。今若以此準之。而曰單指其心則曰本然之心。兼指其氣則曰氣質之心。則恐不穩當矣。心之爲物。本非單理字可了。又非單氣字可了。必是理與氣合而得名者。則恐不似性字之以本然氣質論也。且以本然之心配道心。氣質之心配人心。亦恐不然。雖聖人不能無人心。則亦不能無氣質之心耶。心雖有未發已發之殊。而其爲以氣載理則均矣。豈何以未發獨謂之理。而已發專謂之氣哉。形氣神理以下。語或未暢而意則可矣。但末段性情之外更無心云云。恐未然。性情雖爲心之體用。而所以主宰性情者。非心耶。此意更加細思如何。後書周易卦爻。無極太極之說。姑且倚閣。以俟所見之長得一格如何。大抵就日用眼前事事物物上。究覈其所當然與所以然。此是切問近思。有依據捉摸處。若外此而馳心於玄妙怳惚之間。與捕風捉月。何異哉。學而時習仁。朋自遠方禮。不知不慍義也。知與信不參何也。治此三者。則不言而在此三者之中耶。悅有仁底意。樂有禮底意。不慍有義底意云耳。何嘗以時習爲仁朋來爲禮耶。知只是知此者也。信只是實此者也。性相近。程子專以爲氣質之性。朱子以爲兼氣質而言。兼字尤精。盖其所以相近者。正以本然之性。寓在氣質之中也。雖隨氣質。各爲一性。而其本然者。常爲之主。故兼氣質而言。非專主氣質而言也。本然氣質。本非兩性。則程子朱子之訓。亦豈有不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