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화콘텐츠
  • 특화콘텐츠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8
  • 서(7)(書(7))
  • 권범회에게 답함(答權範晦)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8 / 서(7)(書(7))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08.0001.TXT.0026
권범회에게 답함
강운(江雲) 위수(渭樹)주 59)에 치달리는 마음 얼마나 되었던가? 멀리 떨어져 쓸쓸히 지내니 나도 모르게 혼이 녹아내렸네. 이런 즈음에 한 통의 편지를 갑자기 받아 어루만지고 읊조리니 위로되고 후련한 마음 어찌 감당하겠는가? 인하여 조부모님과 부모님이 강녕하시고 어른을 모시는 체후가 좋은 줄 알았으니, 더욱 지극히 듣고 싶은 마음에 흡족하였네. 의림(義林)은 몇 년 동안 하나의 병이 심해지기만 하고 덜하지 않으니, 이 어찌 세상에 오래 살 수 있겠는가? 공손히 저승사자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네. 장차 앞으로 한 번 찾아오겠다고 하였는데, 매우 연로한 분을 모시고 있는 처지에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오직 아침저녁으로 어른을 모시는 나머지에 옛날 학업을 익혀서 날마다 좋은 경지에 나아가야 할 것 이것이 문득 아침저녁으로 만나는 것이니,주 60) 어떻게 여기는가? 부모상을 함께 당하였을 때 비록 하루가 차이 나더라도 어머니가 먼서 돌아가셨다면 어머니를 위한 복은 1년이고, 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셨다면 어머니를 위한 복은 3년이니, 더구나 어머니상의 3, 4일 뒤에 아버지 상을 당한 경우에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복을 입는 기한은 의심이 없을 것이네.

[문] 흐린 물에 나아가 이 보주(寶珠)를 닦는다고 하니, 대개 흐린 물은 기(氣)를 비유한 것이고 보주는 이(理)에 비유한 것입니다. 지금 흐린 물을 변화시킨다고 말하지 않고 단지 이 보주를 닦는다고 하니, 이른바 기질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장차 어디에 힘을 써야합니까? 단지 그 이를 힘써 밝히면 기질은 변화시킬 수 있습니까?
[답] 흐린 물을 맑게 하는 것은 기질을 다스리는 것을 말하고, 명주(明珠)를 닦는다는 것은 명덕(明德)을 밝히는 것을 말하네. 그 공효가 됨은 실로 서로 바탕이 되니 두 가지 일이 아니네. 그러나 예로부터 성현은 일찍이 두 가지로 상대하여 말하지 않은 적이 없으니, 극기(克己)를 말하면 반드시 복례(復禮)를 말하고, 한사(閑邪)를 말하면 존성(存誠)을 말하며, 개과(改過)를 말하면 반드시 천선(遷善)을 말하고, 알인욕(遏人欲)을 말하면 반드시 존천리(存天理)를 말하였네.
[문] 옥계(玉溪) 노씨(盧氏)가 말하기를 "지선(至善)은 바로 태극(太極)의 이명(異名)이고 명덕(明德)의 본체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른바 명덕의 본체라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무릇 광명정대(光明正大)를 덕의 본체라고 하니, 지선과 같은 것은 정자는 "의리가 정미한 극치[理精微之極]"라고 하였고, 주자는 "사리의 당연한 극치[事理當然之極]"라고 하였으니, 모두 이가 사물에 드러나 그 지극함을 극진히 한 것으로 말하였는데, 노씨는 유독 지선을 명덕의 본체로 돌린 것은 어째서입니까?
[답] 태극은 하나인데 통체(統體)의 태극이 있고 각구(各具)의 태극이 있네. 이미 지선을 태극의 이명으로 여겼으니, 지선 또한 어찌 그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른바 명덕의 본체라는 것은 바로 통체의 지선이고, 이른바 사리의 극치라는 것은 각구의 지선이네.
[문] 《혹문(或問)》에서 "물격이라는 것은 사물의 이치가 각자 그 극처에 나아가는 것이다.[物格者 事物之理各有以詣其極]"라고 하였는데, 이 '예(詣)' 자는 이가 스스로 나아가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까, 내가 나아가는 것으로 보아야합니까? 만약 이가 스스로 나아가는 것으로 본다면 이가 어찌 능히 그 극처에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답] 옛날 퇴계 선생이 처음에는 심이 이르는 것[心到]으로 보았는데, 뒤에 주자의 이가 이른다[理到]는 설을 보고 이에 그 잘못을 깨달았네. 대저 이도(理到), 이예(理詣)라는 것은 단지 얼음이 녹고 언 것이 풀려 공효가 자연스럽다는 뜻이네.
[문] 옥계(玉溪) 노씨(盧氏)가 말하기를 "혼연히 안에 있어 그 본체는 애초 인(仁)·의(義)·예(禮)·지(智)의 구분이 없고, 감하는데 따라 응하여 그 작용이 비로소 측은(惻隱) 등 네 가지의 구별이 있다."라고 하였으니, 대개 이것은 인·의·예·지가 그 속에 있을 때 과연 하나의 물이고 말할 수 있는 분별이 없는 것입니까? 주자가 말하기를 "성은 비록 적연히 움직이지 않지만 그 속에 조리가 있고 절로 구조가 있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으로 말하자면 혼연한 가운데 찬연한 구분을 볼 수 있는데 노씨는 구분이 없다는 것으로 말한 것은 어째서입니까? 또 단(端)이라는 것은 서(緖)이니, 비유하자면 청(靑)·홍(紅)·백(白)·흑(黑)의 실이 한 그릇 가운데 있으면서 밖으로 드러나는 실마리가 절로 네 가지 색깔의 구분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속에 있는 실이 한 색깔인데 밖으로 드러나는 실마리가 네 가지 색이라고 한다면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또 화(禾)·마(麻)·숙(菽)·맥(麥)의 네 가지 종자를 혼합하여 한 곳에다 파종했는데 싹이 돋아남에 미쳐서는 바야흐로 이것은 벼의 싹이고 이것은 마의 싹임을 볼 수 있고 숙맥 또한 그러하니 어찌 한 종자에 네 가지 싹이 돋아날 이치가 있겠습니까?
[답] 옥계가 이른바 "혼연히 안에 있어 그 본체는 애초 인, 의, 예, 지의 구분이 없다."라고 한 것 이것은 아마 합당하지 않는 듯하네. 근세 주기설(主氣說)은 애초에 여기에서 말미암지 않음이 없네. 그대가 말한 청·홍·백·흑의 비유와 화·마·숙·맥의 설은 지극히 분명하니 매우 좋네. 원컨대 이 뜻을 굳게 지켜 요즘 사람들의 말에 동요되지 않기를 바라네.
[문] 유자(劉子)가 말한 "천지지중[天地之中]"이라는 것주 61)은 일본(一本)의 체(體)는 불편불의(不偏不倚)하다는 것으로 말한 것이고, 정자(程子)가 말한 "자유지중(自有之中)"이라는 것은 만수(萬殊)의 용(用)은 과불급(過不及)이 없다는 것으로 말한 것입니다.
[답] 실로 좋네. 그러나 또한 모름지기 체용이 일원(一原)이라는 뜻을 알아야 하네.
[문] 《대학》의 주에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것은 사람의 성이다."라고 하였고, 《혹문》에 "그 본심은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지 않음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대개 성은 심에 갖추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작용이 행하는 것은 실로 두 가지가 없는 것입니까?
[답] 심과 성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이니, 본심이라고 말할 것 같으면 바로 이른바 둘이면서 하나인 것이네.
주석 59)강운(江雲) 위수(渭樹)
강동의 구름과 위수의 나무로, 벗을 간절히 그리워하는 마음을 뜻한다. 두보(杜甫)가 이백(李白)을 그리워하면서 지은 〈춘일억이백(春日憶李白)〉에 "위수 북쪽엔 봄 하늘에 우뚝 선 나무, 강 동쪽엔 저문 날 구름.[渭北春天樹, 江東日暮雲.]"이라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주석 60)아침저녁으로 만나는 것이니
시간을 초월하여 지기(知己)를 만나는 기쁨을 비유하는 말이다. 《장자》 〈제물론(齊物論)〉의 "만세의 뒤에라도 이 해답을 아는 대성인을 만나게 된다면, 이것도 아침저녁 사이에 만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萬世之後, 而一遇大聖人知其解者, 是朝暮遇之也.〕"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석 61)유자(劉子)가 말한 천지지중(天地之中)
천지지중은 천지의 중정(中正)한 기운이라는 뜻이다. 《춘추좌씨전》 성공(成公) 13년에 "인민이 천지의 중정한 기운을 받아 이로 인해 생장하니 이것이 이른바 명이라는 것이다.〔民受天地之中以生, 所謂命也.〕"라고 한 것을 말한다. 유자는 유(劉)나라 군주인 자작(子爵)이라는 말이다.
答權範晦
江雲渭樹。馳懷幾時。涯角落落。不覺消魂。際玆一書。翩然入手。摩挲沈吟曷勝慰豁。因審重庭康寧。侍履佳吉。尤咔願聞之至。義林積年一疾。有加無減。此豈久於世哉。恭俟符到而已。前頭一枉之示。在篤老下情地。豈是易事也。惟晨昏之餘。溫理舊業。日就佳境。此便是朝暮遇。如何如何。父母皆喪。雖一日之間。母先喪則服母期。父先喪則服母三年。况母喪三四日後而遭父喪者乎。股期無疑矣。
就濁水中。揩拭此珠。盖濁水是比氣。寶珠是比理。今不曰變其濁水。而只云揩拭此珠。則所謂變化氣質者。將何以用力。只務明其理。則氣質可得以變化否。
澄淸濁水。是治氣質之謂也。揩拭明珠。是明明德之謂也。其爲功。固相資而非二事。然自古聖賢未嘗不兩下對說。言克己。必曰復禮。言閑邪。必曰存誠。言改過。必曰遷善。言遏人欲。必曰存天理。
玉溪盧氏曰。至善。乃太極之異名。而明德之本體。所謂明德之本體。未易解。夫光明正大曰德之本體。若夫至善。則程子曰。義理精微之極。朱子曰。事理當然之極。皆以理之見於事物而極其至者言之。盧氏獨以至善。歸於明德之本體。何。
太極一也。而有統體之太極。有各具之太極。旣以至善爲太極之異名。則至善。亦安得不然也。所謂明德之本體。卽統體之至善也。所謂事理之極。卽各其之至善也。物格者。事物之理。各有以詣其極。此詣字。作理自詣看。作我所詣看。若作理自詣看。則理豈能自詣其極乎。昔退溪先生初以爲心到。後見朱子理到之說。乃覺其非。大抵理到理詣者。只是氷鮮凍釋。功效自然之意也。
玉溪盧氏曰。渾然在中。其體初無仁義禮智之分。隨感而應其用始有惻隱等四者之别。盖此仁義禮智其在中時。果是一物。無分别可言否。朱子曰。性雖寂然不動。而其中自有條理。自有間架。以是言之。渾然之中。可見粲然之分。而盧氏以無分言之何也。且端者緖也。譬如靑紅白黑之絲。在於一器中。其見於外之緒。自有箇四色之分。若曰在中之絲一色。而見外之緖四色。則是安有此理哉。又如禾麻菽麥。四種渾合。播種於一處土。而及其萌芽。則方見得此是禾芽。此是麻芽。菽麥亦然。豈有一種四芽之理乎。
王溪所謂渾然在中。初無仁義禮智之分。此恐未安。近世主氣之說。未始不由於此矣。賢所謂靑紅白黑之喻。禾麻菽麥之說。極其分明。甚好甚好。願牢守此意。勿爲時人口氣所遷動。
劉子所謂天地之中。以一本之體。不偏不倚者言。程子所謂自有之中。以萬殊之用。無過不及者言。
固好。然亦須知體用一原之義。
大學註曰。好善惡惡。人之性也。或問曰。其本心。莫不好善而惡惡。盖性是具於心者。故其用之所行。固無二致否。
心與性。一而二。二而一。若曰本心。則卽所謂二而一者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