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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8
  • 서(7)(書(7))
  • 정사옥에게 답함(答鄭士玉)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8 / 서(7)(書(7))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08.0001.TXT.0023
정사옥에게 답함
경함(景涵)주 53)은 주재(主宰)를 이(理)로 여기니, 이것은 주리(主理)가 너무 지나친 소치이네. 무릇 천하의 만사와 만물은 이 이(理)가 아님이 없는데 더구나 주재를 이라고 말한다면 무엇을 말해도 불가하겠는가? 그러나 이 말은 천지조화 상에서 말한다면 가하지만 인심의 운용 상에서 말한다면 의논할 만한 것이 없지 않네. 무릇 천(天)은 무위(無爲)하기 때문에 이가 주재가 되고, 인(人)은 유위(有爲)하기 때문에 심이 주재가 되니, 정자(程子)가 이른바 "도체는 무위하지만 인심은 지각이 있다.[道體無爲而人心有覺]"라는 것이 이것이네. 또 심이 주재가 되는 소이는 무엇인가? 허령지각이 있기 때문이네. 만약 허령지각이 아니라면 마른 나무와 꺼진 재나 다름이 없으니, 말할 수 있는 어떤 주재가 있겠는가? 허령지각은 실로 기의 정상(精爽)이지만 허령지각하는 소이는 이(理)이니, 령(靈)이 아니면 능히 각(覺)할 수 없고 이(理)가 아니면 각(覺)할 바가 없네. 만약 '소이(所以)' 자를 쓰지 않고 곧장 주재를 이라고 이른다면 이는 작용하는 물이 되고 이와 기, 심과 성이 섞여 경계가 없을 것이네. 대저 주기설은 실로 지금의 고질인데 이른바 주리를 주장하는 사람 또한 교왕과직(矯枉過直)의 폐단이 없지 않으니, 매우 탄식스럽네.

[문] 공자가 말하기를 "향원(鄕原)은 덕의 적이다."라고 하였는데, 주자가 해석하기를 "덕(德)과 비슷하나 덕이 아니어서 도리어 덕을 어지럽힌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저 향원과 광견(狂狷)은 서로 머니, 광자는 진취적이고 견자는 하지 않는 것이 있는데, 향원은 진취적이지도 않고 또 하지 않는 것도 없습니다. 성인이 미워했던 것은 유속(流俗)과 함께 하고 더러움에 영합하여 더불어 큰일을 할 수 없었던 까닭 때문입니다. 옛날에 애산(艾山) 선생주 54)께서 소자에게 한 말씀을 내려 주셨는데 그 뜻이 이와 같았고, 스승의 문하에서 귀에 대고 말씀하고 대면하여 타일러 주신 것 또한 애초에 이런 부류에 귀착될까 두려워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소자도 자신에게 절실한 실제의 병통이 되는 줄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병은 쉽게 얻고 고치기는 어려우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답] 사옥(士玉)은 자질이 십분 순근(醇謹)한데 과감하게 진작하는 기상이 부족하니, 한 사람의 근칙(謹勅)하는 선비가 되기에는 족하지만 무거운 책임을 맡아 멀리까지 도달하는 것에는 흠결이 있지 않겠는가? 이것이 애산 선생이 이른바 "병이 없는 병이 가장 치료하기 어렵다."라는 것은 자못 생각할 만 하네. 오호라! 성인께서 이런 순근한 사람을 취하지 않고 특별히 광견한 사람을 취한 것은 그 뜻을 알 수 있네. 기질을 고쳐서 바로잡는 이것은 사람마다 자신에게 절실한 공부이니, 원컨대 사옥은 힘쓸지어다.
[문] 주자가 이른바 "이에서 발하고 기에서 발한다.[發於理發於氣]"라는 것은 그 발하는 근본이 하나인데 이미 발한 뒤에는 같지 않음이 있기 때문에 하나의 '발(發)' 자 아래에 이(理) 자와 기(氣) 자를 나누어 둔 것입니다. 퇴계(退溪)가 이른바 "[사단은] 이가 발하여 기가 따르는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하여 이가 타는 것이다."라고 한 것은 분명 이 일변과 기 일변이 상대하고 병립하여 혹 여기에서 발하고 혹 저기에서 발하는 것이 있습니다. 대개 '발' 자를 이 자와 기 자 아래에 두었기 때문에 그 뜻이 서로 현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답] "혹 생겨나고, 혹 근원한다."라고 말하면 본원이 하나가 되는 것에 해롭지 않지만, 다만 발할 즈음에 인심과 도심을 변별했을 따름이네. 만약 "기가 발함에 이가 타고 이가 발함에 기가 따른다."라고 한다면 분명 머리를 나란히 하여 서로 발한다는 혐의가 있을 것이네.
[문] 성(誠)은 일(一)이니, 이른바 성의(誠意)라는 것은 불일(不一)의 사의(私意)를 하나로[一]한다는 것입니까?
[답] 일(一)로 성의의 성을 해석하는 것은 주자가 '실(實)' 자로 해석하여 착수할 곳이 있는 것만 못하네.
[문] "고요하고 막막하여 아무 조짐이 없을 때 만 가지 형상이 빽빽이 이미 갖추어져 있다.[沖漠無朕 萬象森然已具]"라고 하니, 만약 중인으로서 이런 경계를 묵묵히 알려고 하면 새벽녘 사물과 접하지 않아 담연(湛然)하고 허명(虛明)할 때에 가능하겠습니까?
[답] 새벽녘 담연할 때 및 우연히 순수함을 회복했을 때가 이것이네. 그러나 조금이라도 알려고 하는 뜻이 있으면 문득 무짐(無朕)이 아니고 문득 삼연(森然)이 아니네.
[문] 《대학》의 지선(至善)이 바로 《중용》의 중(中)입니까?
[답] 지선은 실리(實理)로 말한 것이고, 중은 체단(體段)으로 말한 것이네.
[문] 혹 고요히 앉아 수렴하지만 혼매하고 치달려 만족스럽지 못한 때가 있기도 하고, 혹 수렴할 겨를도 없는데도 부지불각 중에 스스로 만족스러운 때도 있는데, 모두 어렴풋하여 그 실마리를 모르겠으니, 어찌하면 가하겠습니까?
[답] 이것은 함양이 미숙하여 실심(實心)이 안정되지 못한 소치이니, 정히 마땅히 더욱 힘써야 하네.
[문] 맹자가 말하기를 "마음을 기르는 것은 욕심을 적게 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養心莫善於寡欲]"라고 하였으니, 다만 욕심을 적게 하는 곳[寡欲]에서 몇 년의 공부를 쏟으면 천기(天機)가 자연한 본체는 보존하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절로 보존되겠습니까?
[답] 욕심을 적게 하는 것은 실로 마음을 기르는 제일의 방법이네. 그러나 욕심이라는 것은 단지 식색(食色)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이 법도에 따르지 않는 모든 곳이 모두 욕심이니, 장차 모름지기 거친 곳에서 정밀한데로 들어가는 것이 가할 것이네.
[문] 기(氣)는 볼 수 있는 바탕이 있지만 이(理)는 볼 수 있는 형상이 없으니, 다만 바탕이 있는 기에 나아가 형상이 없는 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까?
[답] 이것은 아래 한 절의 설이니 만약 위 한 절에 나아가 말한다면 어찌 일찍이 기를 기다려 이를 말하겠는가?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라고 한 것과 같은 것이 이것이네.
[문] 다만 마땅히 그 선념(善念)을 보존하기만 하면 악념(惡念)은 자연스럽게 물러납니다. 만약 선념이 생기는 곳에 가서 접속하지 않고 다만 악념을 제거하려고 한다면 마치 도둑이 동서로 치달려 들어오는 것과 같고 마치 불을 끄려고 하면 더욱 치솟아 번지는 것과 같아 그 형세는 제거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답] 고인의 기허(器虛)와 기실(器實)의 비유주 55) 또한 이 뜻이네. 이것은 고생스럽게 경험한 속에나 나온 말이니, 어찌 귀하지 않은가? 힘쓰고 힘쓰시게!
[문] 정자(程子)는 이른바 "타고난 것을 성이라고 한다."라는 것은 바로 사람이 태어나 고요한 상태 그 이전은 말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태어난 이후를 성이라 한다고 하였는데, 고자(告子)는 바로 그 지각운동(知覺運動)을 가리켰기 때문에 맹자가 물리친 것입니다.
[답] "타고난 것을 성이라고 한다."라는 것에 정자의 뜻은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성이 바로 기이고 기가 바로 성이라고 여긴 것이고, 하나는 사람이 태어난 뒤에 바야흐로 성을 말할 수 있다고 여긴 것인데, 고자는 오로지 기에 나아가 말하였네.
[문] 수렴(收斂) 제철(提綴)하여 허명(虛明) 정일(靜一)함은 바로 이른바 "이미 놓아 버린 마음을 가져다 돌이켜서 몸에 들어오게 하는 것이다."라는 것주 56)입니다. 대저 심(心)과 인(仁)은 본래 두 가지 물이 아니니, 심이 보존되면 인이 보존되고, 심이 달아나면 인이 달아납니다. 그렇다면 방심을 구하는 것은 바로 인을 구하는 공부입니다.
[답] 자네 말이 좋네.
주석 53)경함(景涵)
황철원(黃澈源, 1878~1932)의 자이다. 자세한 내용은 앞의 주석 "황경함(黃景涵)" 참조.
주석 54)애산(艾山) 선생
정재규(鄭載圭, 1843~1911)를 말한다. 자세한 내용은 앞의 주석 '애산(艾山)' 참조.
주석 55)고인의……비유
《근사록》 권4 존양류(存養類)에 정호(程顥)가 "빈 그릇을 물속에 넣으면 물이 자연히 들어가겠지만, 하나의 그릇에 물을 채워서 물속에 두면 물이 어떻게 들어갈 수 있겠는가. 대개 내부에 주가 있으면 실하니, 실하면 외부의 환란이 들어올 수 없어 자연히 무사할 것이다.[虛器入水, 水自然入, 若以一器實之以水, 置之水中, 水何能入來? 蓋中有主則實, 實則外患不能入, 自然無事.]"라고 한 것을 말한다.
주석 56)이른바……것
《맹자》 〈고자 상(告子上)〉 '구방심장(求放心章)'의 주석에서 명도(明道)가 한 말이다.
答鄭士玉
景涵以主宰爲理。是主理太過之致也。夫天下萬事萬物。莫非是理。況以主宰謂之理。孰云不可。然此言在天地造化上說則可。在人心運用上說。則不能無可議者。夫天無爲。故理爲主宰。人有爲。故心爲主宰。程子所謂道體無爲。而人心有覺者。此也。且心之所以爲主宰。何也。以其有虛靈知覺故也。若非虛靈知覺。則與枯木死灰無異。有何主宰之可言也。虛靈知覺。固氣之精爽。而所以虛靈知覺者。理也。非靈則不能覺。非理則無所覺。若不下所以字。而直以主宰謂理。則理爲作用之物。而理與氣。心與性。混無界至矣。大抵主氣之說。固今日之膏肓。而所謂主理者。亦不無矯枉過直之敝。可歎可歎。孔子曰。鄕原德之賊。朱子釋之曰。似德非德。反亂乎德。大抵鄕原與狂狷相遠。狂者進取。狷者有所不爲。鄕原者未嘗進取。又無所不爲。聖人所惡者。以其同流合汚。不可與有爲故也。昔艾山先生賜小子一言。其意在此。師門平日耳提面命者。亦未始非恐歸此流。小子亦非不知爲切己實病。而病易得而難瘳。如之何則可。
士玉姿質。十分醇謹。而少果敢振作之氣。其爲一箇謹勅之士則足矣。而於任重致遠。不其有欠乎。此艾山先生所謂不病之病。最爲難治者。殊可念也。嗚呼。聖人不取此醇謹底人。而特取狂狷之人者。其意可知。矯捄氣質。此是人人切己之功。願士玉勉之。
朱子所謂發於理發於氣者。是其發之本一也。而及其已發之後。有不同者。故一發字下。分着理氣字。退溪所謂理發而氣隨之。氣發而理乘之者。是分明有理一邊。氣一邊。相對竝立。或發於此。或發於彼。盖其着發字於理氣下。故其義相爲懸殊。曰或生或原則。不害爲本原之一。而特於臨發之際。辨別其人心道心之義而已。若曰氣發而理乘。理發而氣隨。則分明有齊頭互發之嫌。
誠一也。所謂誠意者。是一其不一之私意。
以一釋誠意之誠。不如朱子以實字釋之。而有下手處沖漠無眹。萬衆森然已具。若以衆人而欲黙識此境界。則於平朝未與物接。湛然虛明之時。可乎。
平朝湛然。及偶然圓淳之時。是也。然纔有欲識底意。則便非無眹便非森然。
大學之至善。卽中庸之中。
至善以實理言。屮以體段言。
或靜坐收斂。而有昏昧走作不慊之時。或未暇收斂。而有不知不覺自好之時。皆怳惚而莫知其端。如何則可。
此是涵養未熟。實心未定之致。正宜加勉。
孟子曰。養心莫善於寡欲。但於寡欲上。費得幾歲幾年工夫。則天機自然之體。不期存而自存否。
寡欲固養心第一方。然欲非特食色之謂凡心不循軌處。皆欲也。且須由粗入精。可也。
氣則有質可觀。而理則無形可見。但就有質之氣。知其有無形之理乎。
此是下一節說。若就上一節說。則何嘗待氯而言理。如曰無極而太極。是也。
但當存其善念。惡念自然退聽。若於善念處。不之接續。而但欲除去惡念。則如寇之東驅西入。如火之愈撲愈熾。其勢有不可得以除者。
古人器虛器實之喩。亦比意。此是辛苦經歷中出來語。豈不可貴。勉之勉之。
程子所謂生之謂性。正以其人生而靜以上。不容說。故以爲生以後。謂之性。告子則正指。其知覺運動。故孟子闢之。
生之謂性。程子之意。有兩般焉。一則以爲性卽氣。氣卽性。一則以爲人生以後。方說性。告子專就氣說。
收斂提綴。虛明靜一。卽所謂將己放之心。反復入身來。大抵心與仁。本非二物。心存則仁存。心亡則仁亡。然則求放心。卽求仁工夫
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