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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8
  • 서(7)(書(7))
  • 황경함에게 답함(答黃景涵)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8 / 서(7)(書(7))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08.0001.TXT.0018
황경함에게 답함
지난번 편지에서 "양원(兩元)……"이라 한 것은 아마 그렇지 않는 듯하네. 이미 "원래 서로 섞이지 않는다.[元不相雜]"라고 하고 문득 "원래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元不相離]"라고 하였으니, 단지 이 두 구는 함께 거론하여 이룬 문장으로 이기의 묘함을 형용한 것은 완전하고 두루 족하여 남거나 모자라는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네. 만약 단지 "원래 서로 섞이지 않는다."는 것을 말할 뿐이라면 그 아래에 마땅히 "또한 말할 만한 서로 떨어지지 않는 것이 있다."라고 해야 하고, 만약 단지 "원래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할 뿐이라면 그 아래에 마땅히 "또한 말할 만한 서로 섞이지 않는 것이 있다."라고 해야 할 것이네. 지금 이미 원래 섞이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또 원래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면서, 그 사이에 또 다시 "역자(亦字)……"더하여 보태었으니, 상 위에 다시 상을 올려놓고 지붕 위에 다시 지붕을 올려놓은 것과 유사하지 않겠는가? 두 개의 원(元) 자가 만약 각각 방소(方所)가 있고 각각 시절(時節)이 있다면 천만 조각이라 해도 가하고 진흙에 물을 탔다고 해도 가할 것이네. 지금 원래 서로 섞이지 않는 가운데 원래 서로 떨어지지 않는 것이 있고, 원래 서로 떨어지지 않는 가운데 원래 서로 섞이지 않는 것이 있으니, 이른바 "너무 분개(分開)하였다."라는 것은 무슨 일인가? 여기에 또한 "원래 아니다.[元不]"라고 하고 저기에 또한 "원래 아니다.[元不]"라고 하였으니, 서로 떨어지지 않고 서로 섞이지 않는 오묘함을 더욱 볼 수 있네. 또 "원불상잡 원불상리(元不相雜元不相離)" 이 여덟 글자는 나의 창설(創說)이 아니고 이미 선유들이 말해 놓은 것으로 호락(湖洛)의 사이에 자자한 것인데 그대는 보지 못했던 것인가? 이(理)는 허공에 매달린 물이 아니고 단지 음양오행이 착종(錯綜)해도 어긋나지 않는 것이니, 이를 말하면 기는 실로 그 가운데 있네. 지금 "운행의 수각(手脚)이라 말할 수 있어도 그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라고 하니, 이것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만일 사람이라 말한다면 이른바 수각이라는 것은 유독 그 가운데 포함되어 있지 않은가? "건도 각정(乾道各正)"을 말함에 만물이 그 가운데 포함되어 있고, 천명 솔성(天命率性)을 말함에 사람과 사물이 그 가운데 포함 되어 있으니, 이것을 모두 화니대수(和泥帶水)주 34)라 할 수 있겠는가? 아마 그대는 이러한 곳에 혹 너무 살피는 단서가 없지 않은 듯한데, 너무 살피면 천착하기 쉬우니, 어떻게 여기는가? 내가 "그 위에서 누르고 있다."라고 한 것은 나의 뜻에도 실로 우아하지 못하다고 의심하여 고치려 하였지만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지금 그대의 말이 이와 같으니, 실로 마땅하고 마땅하네. 이미 서로 떨어지지 않음을 말하였다면 서로 떨어지지 않는 것이 주가 되기 때문에 "이가 바로 기이고 기가 바로 이이다."라고 하고, 서로 섞이지 않음을 말하였다면 서로 섞이지 않는 것이 주가 되기 때문에 "이는 스스로 이이고 기는 스스로 기이다."라고 하니, 이른바 "이는 스스로 이이고 기는 스스로 기이다."라는 것은 어찌 이와 기가 각각 한 곳에 있어 각각 스스로 용사(用事)한다는 것을 말하겠는가? 이를 기라 부를 수 없으니 이것이 이는 스스로 이라는 것이고, 기를 이라 부를 수 없으니 이것이 기는 스스로 기라는 것이네. 위아래의 단락은 단지 하나의 뜻인데 바로 위 한 단락은 옳게 여기고 아래 한 단락은 옳게 여기지 않는가?
가만히 보건대 그대는 종종 같은 것을 기뻐하고 다른 것을 싫어하며 합하는 것을 기뻐하고 나누는 것을 싫어하는 뜻이 있으니, 무슨 까닭인가? 일찍이 애장(艾丈)은 "심은 음양과 같다.[心猶陰陽]"는 한 구를 음양권(陰陽圈)에 배합하여 해석한 것을 보았는데, 그대 또한 이 권(圈)을 바로 가리킨 것이라 여겼기 때문에 나의 설에서 운운한 것이 있었던 것은 위의 태극권(太極圈)에 연결하여 말한 것이 아니었네.
기가 이미 그 가운데 포함 되어 있다고 한 것은 나의 뜻은 이와 기를 합하여 일물(一物)이 된 것이 마치 금과 동과 철을 합하여 하나의 기물이 되고 소진(蘇秦)과 장의(張儀), 노자와 부처가 합하여 한 사람이 되었다는 뜻을 말한 것이 아니네. 단지 이를 말하면 기는 이가 포함한 안에 있다는 말일 뿐이니, 그대가 인용한 선사(先師)의 "기는 이 가운데의 일이다."라는 말과 무슨 구별이 있는가? 동일한 말과 뜻인데 그 취사(取舍)와 향배(向背)가 어찌 이와 같이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가? "월파(月波) 어른주 35)……"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근세 주기(主氣)의 남은 의론이네. 이 어른의 견해는 본래 이와 같으니, 수십 년 전의 설과 여전하네. 그대의 말은 모두 옳겠지만 그러나 "심은 이의 주재이고 기의 정상이니, 그 덕을 형상하면 '허령'이라 하고 그 실제를 가리키면 '신명'이라 합니다. 미발일 때 중리를 갖춘 체가 있고 이발일 때 만사에 응하는 용이 있습니다. 주재는 그 골자의 실체이고 정상은 그 경계의 지반입니다. 동정을 꿰뚫고 적감(寂感)에 통하는 것입니다.주 36)"라고 하였으니, 이 단락의 문사는 오직 번잡한대도 줄이지 않았을 뿐 아니고, 주재·정상·허령·신명이라 한 것은 그 층절이 외람되이 많은 것이 아니겠는가? 정상과 허령은 실로 두 가지 물이 아니고, 신명과 주재 또한 어찌 두 건이겠는가? 만일 혹 수정한다면 "심은 기의 정상이고 이의 주재이니, 주재는 그 골자의 실두(實頭)이고 정상은 지반의 당체(當體)이다. 미발일 때 중리의 체를 갖추고 있고 이발일 때 만사에 응하는 용이 있어 동정을 꿰뚫고 적감을 갖춘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또 말하기를 "발자(發者)는 기이고 발지자(發之者)는 것은 심이고 소발자(所發者)는 성입니다."라고 하였으니, 이 단락 또한 온당하지 못한 점이 있네. 심 자를 가지고 이와 기에 상대하여 삼두(三頭)로 만들면 심은 이인가, 기인가? 아니면 이기의 바깥에 별도로 이른바 심이라는 것이 있는가? 또 혹 수정한다면 위의 구절 "발자기야(發者氣也)" 네 글자를 삭제하면 가할 듯하네. 그렇지 않다면 가운데 구절"발지자심야(發之者心也)" 다섯 글자를 삭제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다시 더 신중히 생각하여 깨우쳐 주시게.
전날 나의 편지에서 "정상과 허령은 실로 두 가지 물이 아니고, 신명과 주재 또한 어찌 두 건이겠는가?"라고 한 것은 그 뜻이 이것으로 저기에 짝하여 확정(確定)하고 적대(的對)하다는 것이 아니네. 다만 그 두서가 외람되이 많음을 보고 이에 총괄하여 요약하면 대개 이와 같을 뿐이네. 대저 정신·정상·허령·신명 등의 말은 비록 대략 정추가 있지만 그 실제는 두 가지 물이 아니니, 어찌 유독 허령과 신명만이 분별하는 것이 없겠는가? 기·심·성을 환치(換置)한 설은 비록 이전의 설보다 나은 듯하지만 끝내 삼두의 혐의가 있음을 면치 못하고, 심이 이기를 합한 의가 있음을 보지 못하니, 어찌 그대의 뜻은 두 조목의 설 아래에 주재의 의가 있음을 보지 못한다고 여겼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만약 "발자는 기이고 소발자는 성이다."라고 한다면 소발자가 주재가 되니, 바로 장자(張子)가 이른바 "기가 유행함에 성이 주재가 된다."라는 것이고, 만약 "발지자는 심이고 소발자는 성이다."라고 한다면 발지자가 주재가 되니, 바로 장자가 이른바 "성이 유행함에 심이 주재가 된다."라는 것이니, 시험삼아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일간에 우연히 《남당집(南塘集)》을 읽어보았는데, "천리가 주재하는 오묘함을 밝힌다면 그 말이 작용에 저촉되기 쉽고, 도기(道器)의 간격이 없는 오묘함을 밝힌다면 그 말이 혹 주재에 소략하다.주 37)"라고 한 것이 있었으니, 이 말은 처음 보았을 때 좋은 듯하여 절실하고 지극한 의론이라 여겼는데, 다시 생각해 봄에 남당의 어긋난 곳은 모두 여기에 근원한 것이었네. 무릇 이가 천변만화하는 것은 모두 그 주재의 오묘함이니, 태극이 양의(兩儀)를 낳는 것을 말함에 건도가 변화한다는 설과 같은 것이 이것인데, 다시 어디에 작용한다는 혐의가 있는가? 다만 사람의 몸에서는 작용을 성으로 여기는 것은 불가하니, 심이 있기 때문이네. 석씨(釋氏)는 성을 령으로 여겨 불생불사(不生不死)한다는 미혹이 있었기 때문에 남당이 이것으로 인하여 도리어 조화 본원의 바탕에 의심하였으니, 가하겠는가? 또 그 아래 단락에 주재에 대해 소략한 것 또한 분명히 알 수 없네. "도기(道器)가 합일하였다."는 곳에 이르러서는 그 주재의 오묘함이 마치 "일음 일양을 도라고 한다."라는 것이 이것이라고 하는 것과 같음을 보겠네. 남당의 오성(五性)은 기로 인하여 있다는 설 및 한 층의 본연을 본연 위에다 별도로 세운 것은 작용의 혐의가 있을까 두렵지 않은 것이 없네. 이미 작용이 있을까 두려워한다면 주재에 대해 소략한 것은 형세상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이니, 이 설이 어떠한가?
차설(劄說)에 "성(誠)은 성(性)에서 말한 것이고, 경(敬)은 심(心)에서 말한 것이다."라고 한 것이 있으니, 봄에 그 기상과 의사가 실로 그럴 듯한 점이 있었네. 그러나 자세히 생각해 봄에 그렇지 않은 점이 있네. 무릇 성은 실리(實理)로 말하고 실심(實心)으로 말하네. 만약 성은 실리의 자연스러운 명칭이라 한다면 모두 실리로 말하니 그 성은 실로 의논할 것이 없고, 만약 성과 경을 상대하여 말한다면 성은 실심의 의인데 "성(誠)은 성(性)이고 경(敬)은 심(心)이다."라고 하면 성과 경에 체용과 본말의 혐의가 있을 뿐 아니라 성의(誠意)의 학문과 성신(誠身)의 공부는 반드시 잡을 것이 없고 손 댈 것이 없는 곳으로 귀결될 것이네. 더구나 성(誠)이라는 것은 하늘의 도라는 한 단락의 말은 본래 성인의 마음에서 말한 것인데 지금 도리어 이라고 이르는 것인가? 또 무망(無妄)과 무위(無僞)는 본래 모두 사람의 마음에 나아가 말한 것이니, 실로 말할 만한 무망과 무위가 없는데 어찌 무망을 이(理)라고 하여 성인의 분수에 소속시키고, 무위를 심이라고 하여 현인의 분수에 소속 시키는가? 무망(無妄)과 불기(不欺)는 비록 성인과 현인의 구분이 있지만 또한 이와 심으로 구분할 필요는 없을 듯하네. 미진한 뜻이 있어서 다시 이렇게 대략 말하네.

[문] 도암(陶庵)주 38)이 말하기를 "장지(葬地)가 비록 종가와 가깝더라도 행상(行喪)한 뒤에 뒤 좆아 조조(朝祖)주 39)의 의식을 두는 것은 고례의 본의를 어김이 있으니, 사사로운 견해로 만들어 행하는 것은 불가하다.……조조는 사자(死者)의 효심을 따르는 것이니, 사자가 생시에 종가를 지나가면서 어찌 조조의 예를 하지 않음이 있겠는가? 후세에 반드시 의로 일으킬 군자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답] 만약 종가의 문을 지나면서 사시(已時)라고 해서 지나치는 것은 불가하네.
[문]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맹자》를 통해 《주역》을 볼 수 있다."라고 하였으니, 의리(義利)의 구분이 음양 숙특(陰陽淑慝)과 같음을 말한 것입니다.
[답] 왕도(王道)를 권하고 잠룡(潛龍)을 사용한 류와 같은 것이 모두 이러한 것이네.
주석 34)화니대수(和泥帶水)
선(善), 악(惡), 시(是), 비(非) 등이 뒤섞여 분명히 구별되지 않음을 뜻한다.
주석 35)월파(月波) 어른
정시림(鄭時林, 1837~1912)을 말한다. 자는 언백(伯彥), 호는 월파,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문인이다. 저서로는 《월파집》이 있다.
주석 36)심은……것입니다
《중헌집(重軒集)》권2〈일신재 정 선생께 올리다[上日新齋鄭先生]〉제4서에 보인다.
주석 37)천리가……소략하다
《남당집》권34〈한수재 권 선생 행장(寒水齋權先生行狀)〉에 나오는 말이다.
주석 38)도암(陶菴)
이재(李縡, 1680~1746)로의 호이다. 자는 희경(煕卿), 호는 도암ㆍ한천(寒泉), 본관은 우봉(牛峰)이다. 1702년(숙종28) 문과에 급제, 형조 참판ㆍ이조 참판ㆍ양관 대제학ㆍ공조 판서ㆍ의정부 좌우참찬 등을 역임했다.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중부(仲父) 이만성(李晩成)이 노론 사대신(四大臣)의 당으로 몰려 피살되자 벼슬을 버리고 인제(麟蹄)의 설악(雪岳)에 들어가 성리학(性理學)을 닦는 데 힘썼다. 1725년(영조1) 여러 번 소를 올려 군흉(群凶)을 몰아낼 것을 청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자 용인(龍仁)에 퇴거하였다. 저서로는 《도암집》, 《사례편람(四禮便覽)》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주석 39)조조(朝祖)
발인하기 하루 전 조전(朝奠)을 마친 뒤에 영구(靈柩)를 모시고 사당에 가서 마지막으로 조상을 뵙게 하는 의식으로, 조묘(朝廟)와 같은 뜻이다.
答黃景涵
前書兩元云云。恐不然。旣曰元不相雜。旋曰元不相離只此兩句。倂擧成文。而其形容理氣之妙。可謂完全周足。無所餘欠。若只言元不相雜而已。則其下當曰亦有不相離之可言。若只言元不相雜而已。則其下當曰亦有不相雜之可言。今旣言元不相雜。又言元不相離。而其間又復添補亦字云云。則其不類於床上之床。屋上之屋乎。兩元字。若各有方所。各有時節。則謂之千萬片可也。謂之和泥水可也。今元不相雜之中。而有元不相離焉。元不相離之中。而有元不相雜焉。則所謂太分開者。何事耶。此亦曰元不。彼亦曰元不。而其不離不雜之妙。尤可見矣。且此八字。非愚之創說也。已經先儒口語。而藉藉於湖洛間者。其未之見耶。理非懸空之物。只是陰陽五行所以錯綜而不差者。則言理而氣固在其中矣。今曰可以言運行手脚。而不可以言包在其中。此未知何說也。如言人。則所謂手脚者。獨不包在其中耶。言乾道各正。而萬物包在其中。言天命率性。而人物包在其中。此皆可謂和泥帶水耶。恐賢於此等去處或不無太察之端太察則易鑿如何如何壓在之云鄙意固疑其未雅而欲改未果今賢言如此固當固當旣言不相離。則不相離爲主。故曰理卽氣。氣卽理。言不相雜。則不相雜爲主。故曰理自理。氣自氣。所謂理自理氣自氣者。豈理與氣各在一處。各自用事之謂耶。理不可喚做氣。則是理自理也。氣不可喚做理。則是氣自氣也。上下段落。只是一意。而乃以上一段爲是。以下一段爲不是耶。竊觀賢者。種種有喜同惡異。喜合惡分底意。未知何故耶。當見艾丈以心猶陰陽一句。配陰陽圈而解之。賢亦以爲正指此圈。故鄙說有所云云。非連上太極圈而言之也。
氣已包在其中云者。鄙意非謂合理與氣爲一物。如合金銀銅鐵爲一器。合蘇張老佛爲一人之意也。只是言理。則氣在理所包之內云爾。與賢所引先師氣是理中事之語。何別矣。同一語意。而其取舍向背。何若是遙絶耶。月波丈云云。此是近世主氣餘論也。此丈之見本如此。依舊是數十年前說話也。賢言恐皆得之。然其曰心者理之主宰。氣之精爽。狀其德則曰虛靈。指其實則曰神明。未發而有具衆理之體。已發而有應萬事之用。主宰。其骨子。精爽。其界至地盤。貫動靜。通寂感者也。此段文辭。不惟爲繁而不殺。而曰主宰曰精爽曰虛靈曰神明。其層節不爲猥多乎。精爽虛靈。固非二物。神明主宰。亦豈兩件。如或修潤。則曰心者。氣之精爽。理之主宰。主宰。其骨子實頭也。精爽。其地盤當體也。未發而有具衆理之體。已發而有應萬事之用。而貫動靜該寂感者。則何如耶。又曰發者氣也。發之者心也。所發者性也。此段亦有未穩。將心字對理與氣。而爲三頭。則心是理歟氣歟。抑於理氣之外。別有所謂心者耶。又或修潤。則刪去上句發者氣也四字。則似可矣。不然。刪去中句發之者心也五字。如何。更加三思。却以見喩也。
前日鄙書。精爽虛靈。固非二物。神明主宰。亦豈兩件者其意不是以此配彼。而爲確定的對也。但見其頭緖猥多。而乃總而約之。大槩如斯耳。大抵精神精爽虛靈神明等說。雖約有精粗。而其實非二物也。豈獨虛靈神明無所分別耶。氣心性換置之說。雖若勝似前說。然終未免有三頭之嫌。而未見有心合理氣之義。豈賢意以爲以兩條說下。則未見有主宰之義故耶。若曰發者氣也。所發者性也。則所發者爲主宰。卽張子所謂氣之流行。性爲之主者也。若曰發之者心也。所發者性也。則發之者爲主宰。卽張子所謂性之流行。心爲之主者也。試思之如何。
日間偶閲南塘集。有曰。明天理主宰之妙。則其言易涉於作用。明道器無間之妙。則其言或略於主宰。此言初看似好。以爲切至之論。更思之。南塘差處。皆原於此夫理之千變萬化。皆其主宰之妙。如言太極生兩儀。乾道變化之說。是也。更安有作用之嫌。但放人身上。不可以作用爲性者。以其有心故也。釋氏認性爲靈。有不生不死之惑。故南塘因此而反疑於造化本原之地。可乎且其下段略於主宰者。亦不可曉。到道器合一處。尤見其主宰之妙。如言一陰陽之謂道是也。南塘五性因氣有之說。及别立一層本然於本然之上者。無非怕有作用之嫌也。旣怕作用。則其略於主宰。勢所必至矣。夫知此說如何。
劄說有曰。誠是性上說。敬是心上說。看來其氣象意思。固有似之。然細思之。有不然焉。夫誠以實理言。以實心言。若曰誠是命之道。若曰誠是實理自然之名。皆以實理言。其爲說。固無議爲。若以誠敬對言。則誠是實心之義。而曰誠是性。敬是心。則不惟誠敬有體用本末之嫌。而誠意之學。誠身之功。必歸沒把捉無下手處矣。況誠者天之道一段語。本以聖人心上說。而今反謂之理耶。且無妄無僞。本皆就人心上說。則固無無妄無僞之可言。豈以無妄謂理。而屬乎聖人分上。無僞謂心。而屬乎賢人分上乎。無妄不欺。雖有聖賢之分。而亦恐不必分理與心也。竊有未盡之意。復此略申。
陶庵曰。葬地雖近於宗家。行喪後。追有朝祖之儀。有違古禮。本意不可以私見創行。止朝祖。所以順死者之孝心。則死者於生時過。宗家。豈有不朝祖之禮乎。後世必有義起之君子。
若過宗家之門。恐不可以已時而戞過。
程子曰。由孟子可以觀易。蓋言義利之分。如陰陽淑慝。
如勸王道用潛龍之類。皆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