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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8
  • 서(7)(書(7))
  • 황경함에게 답함(答黃景涵)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8 / 서(7)(書(7))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08.0001.TXT.0017
황경함에게 답함
지난 번 편지에 대해 답장을 적어 책상에 두고서 인편을 기다린 지 오래였는데, 편지를 보내기 전에 또 그대가 보내준 편지를 받았으니, 불안한 가운데 또 다시 불안하였네. 심이 이가 되고 령이 되는 것은 결안(決案)을 얻지 못한 것이 오래 되었는데, 지금 보여준 것을 받아보니 편지 가득 자세하고 긴 내용은 절실하고 정당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족히 오래 동안 울적했던 심회를 깨드릴 수 있었네. 말단에 이른바 "당체(當體)를 취하여 바로 말하지 않으면 주리(主理)가 너무 지나친 폐단이 있고, 근본에 나아가 극도로 말하지 않으면 주리가 너무 무거운 폐단이 있다."라고 하였으니, 이 설은 지극히 옳네. 이와 같이한 이후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아 정당한 안목이 될 수 있네. 옛날 성현이 혹 심을 이로 여기고, 혹 심을 기의 신령함으로 여긴 것은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내가 이 설을 견지한 것이 오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가까이로는 그대에게 인정받지 못했고 멀리로는 애장에게 인정받지 못했으니, 개인적으로 불안하여 말할 만한 곳이 없었는데, 난만하게 함께 귀결됨이 오늘에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위로와 다행함이 실로 많네. 그러나 의리는 무궁하니, 오늘 스스로 치우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과연 백대의 정론이 되어 폐단이 없을 줄 어찌 보장하겠는가?
무릇 이와 기는 원래 서로 떠나지 않고 원래 서로 섞이지 않네. 원래 서로 떠나지 않는다는 것으로 말하면, 이에 나아감에 기는 이미 그 가운데 포함되어 있고 기에 나아감에 이는 실로 그 위에서 누르고 있으며, 원래 서로 섞이지 않는다는 것으로 말하면, 이를 기라고 부를 수 없고 기를 이라고 부를 수 없어 이는 스스로 이이고 기는 스스로 기이네. 이것은 전날의 편지에서 '전언(專言)'과 '대언(對言)'의 설이 있었던 까닭이네. 보내온 편지에서 그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매우 당연하다고 여기고 그 위에서 누르고 있다는 것은 불가하다고 하였네. 이미 그 위에서 누르고 있다는 것을 불가하다고 여긴다면 그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는 것 또한 불가해야 할 것이니, 어찌 동일한 말과 뜻인데 하나는 가하고 하나는 불가한 것이 있겠는가? 그대의 뜻은 어쩌면 기는 본래 이를 띠고 있는 물이니 그 위에서 누르고 있음을 다시 말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것인가? 하문에 "《태극도》……"라고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겠네. 만약 《태극도》로 말하자면 위의 한 개 권(圈)을 제거하고 음양의 권(圈)으로만 보면 또한 말할 수 있는 불상리(不相離) 불상잡(不相雜)이 없지 않으니, 어찌 이 한 개 권(圈)은 다시 불상잡의 오묘함이 없고 단지 불상잡만 있어 국한된다고 이르겠는가? 또 '음양' 두 글자가 경전에 드러나는 것이 한번이 아니고 많으니, 어찌 반드시 심이 음양과 같다는 것으로 바로 이 권(圈)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기겠는가? 이면에 태극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원용하여 심을 풀이하려는 것이네. 그렇다면 심은 기의 정상이니, 정상의 이면에 또한 태극이 있는가? 아니면 정상을 이로 인식하기를 마치 면우(俛宇)의 설처럼 하는가? 일찍이 애장이 심은 음양과 같다는 것을 해석한 뜻을 보니, 음양으로 해석하여 동정으로 삼고 동정으로 해석하여 신(神)으로 삼고 신으로 해석하여 이(理)로 삼았으니, 이것이 그 본의이겠는가? 무릇 성은 태극과 같고 심은 음양과 같다는 것은 절로 평탄한 말인데, 어찌 지루하게 끌어 인용해서 말과 설을 허비하기를 이렇게까지 하는가? 이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주리가 너무 지나쳐 심이 이가 될 수 없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일 것이네. 무릇 불상리 불상잡은 이와 기가 모두 그러하니, 어찌 이에 불상잡이 있고 기에 유독 불상리가 있겠는가? 기에 유독 불상리가 있을 뿐이라면 이는 또한 무엇으로 말미암아 유독 불상잡이 되는 것인가? 아니면 두 개의 태극이 있어 하나는 불잡(不雜)하고 하나는 불리(不離)하는 것인가? 불리 불잡은 이것은 이와 기가 대대(對待)하는 경계인데, 만약 주복(主僕)과 수역(帥役)의 구분으로 말하면 이는 기를 통솔할 수 있고 기는 이를 통솔할 수 없으니, 이것은 선사께서 권상리(權上里)주 33)와 변론한 것에 "유소(有所)……"라고 하였던 것은 당시 사람의 주기의 폐단을 배척한 것으로, 그 말이 이와 같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네. 그대는 "음양권(陰陽圈)……"이라고 한 설에 대해 독실히 믿은 지 오래인데, 어찌 나의 고설(瞽說)로 능히 따질 수 있겠는가? 하단의 기질지심(氣質之心)과 본연지심(本然之心) 등 여러 가지 설은 모두 인용한 것이 정밀하고 합당하여 의리가 조창(條暢)하니, 그대가 근년에 진보한 것이 보통이 아님이 있음을 볼 수 있겠네.
주석 33)권상리(權上里)
권우인(權宇仁)을 말한다. 자는 신원(信元),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전라북도 정읍의 상리(上里)에서 살았다. 기정진(奇正鎭, 1798~1879)과 이기논변(理氣論辨)을 치열하게 전개한 사람이다.
答黃景涵
作前書之答。留案俟便有日矣。書未發。而又承惠幅。不安之中。又復不安。心之爲理爲靈。未得決案久矣。今承來示。其盈幅覼縷。無非切實正當。足以破積鬱之懷。末段所謂不取當體而正言。則有主理太過之敝。不就本根而極言。則有主理過重之敝。此說極是。如此而後。可以不偏於一邊。而爲正當眼目。古昔聖賢。或以心爲理。或以心爲氣之靈者。其非爲是耶。愚之持此說。非不久矣。而近不見可於左右。遠不見可於艾丈。私竊耿耿。無可告語。誰知爛漫同歸在於今日乎。慰辛實多。然義理無窮。今之自謂不偏者。安知果爲百世之定論而無敝否也。
夫理與氣。元不相離。元不相雜。以元不相離者言。則卽理而氣已包在其中。卽氣而理固壓在其上。以元不相雜者言。則理不可喚做氣。氣不可喚做理。理自理。氣自氣矣。此於前日之書。所以有專言對言之說。來書以包在其中爲甚當。而以壓在其上爲不可。旣以壓在其上爲不可。則包在其中。亦爲不可豈以同一語意而有一可一不可者乎。賢意豈以爲氣本帶理之物。不可復言壓在其上云耶。觀下文太極圖云云之說。可見矣。若以太極圖言之。則除了上一圈。只以陰陽圈觀之。亦不無不相離不相雜之可言。豈謂此一圈。更無不相雜之妙。而只有不相離者。爲之局定乎。且陰陽二字之著於經傳者。不一而多。何必以心猶陰陽。爲之正指此圈乎。以其裏面有太極。故欲援之以訓心也。然則心者氣之精爽。精爽裏面。亦有太極乎。抑認精爽爲理。如俛宇之說乎。嘗見艾丈解心猶陰陽之義。以陰陽解作動靜。以動靜解作神。以神解作理。此其本義乎。夫性猶太極心猶陰陽。自是平坦語。何其支離牽引。費了辭說乃爾耶。此非他故。以主理太過。而恐心之不得爲理也。夫不相離不相雜。理氣皆然。豈理有不相雜。而氣獨有不相雜乎。氣獨有不相離而己。則理亦何由而獨爲不相雜乎。抑有兩太極。一則不雜。一則不離者乎。不離不雜。此是理氣對待之界至。而若以主僕帥役之分言之。則理可以統氣。氣不可以統理。此先師與權上里辨者。所以有所云云。而斥時人主氣之敝。其言不得不如是也。賢者於陰陽圈云云之說。篤信之久矣。豈區區瞽說所能上下哉。下段氣質之心本然之心諸般說。皆援引精當。義理條暢。可見吾友近年進業。有不尋常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