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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8
  • 서(7)(書(7))
  • 황경함에게 답함(答黃景涵)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8 / 서(7)(書(7))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08.0001.TXT.0015
황경함에게 답함
주자의 시주 27)에 "허령 묘용이 여기에서 나오기에, 내 몸의 주인 되어 성정을 통솔하네.[虛靈妙用由斯出 故主吾身統性情]"라고 하였는데, '사(斯)' 자는 심(心)을 가리켜 말하니, 제목을 심이라 했기 때문이네. 허령묘용은 단지 하나로 연결하여 설명하면서 능히 내 몸의 주인이 되어 성정을 통솔하는 것이니, 어찌 일찍이 허령하기 때문에 능히 묘용하고 묘용하기 때문에 능히 성정을 통솔하는 것이 그대가 말한 것과 같은 뜻이 있었던가? 령이 통솔을 주관하는 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억지로 고문(古文)을 배척함이 이와 같이 하면서 지금 감히 배척하지 않는다고 말하는가? '충막무짐(冲漠無眹)'은 나의 뜻은 처음에 또한 정일(精一) 쪽으로 알았는데, 지금 남당(南塘)의 말이 이와 같고 주자의 말 또한 이와 같은 곳이 있음을 보았네. 대개 충막무짐은 동정을 통괄하여 이의 면목이 본래 이와 같음을 말한 것이네. 그러나 정자가 "충막……"라고 한 아래에 '미응(未應)'과 '이응(已應)'으로 말한 것이 있으니, 또한 일괄 정(靜) 일변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불가할 듯하네. '비은(費隱)'에 이르러서는 더욱 동정으로 말하는 것은 불가하네. 물이 동하는 것은 실로 비(費)이지만 정(靜)한 것은 유독 비가 아닌가? 동하고 정하는 것 같은 것은 비가 아님이 없지만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은(隱)이네. 남당의 설은 아마 가볍게 의논해서는 불가할 듯하네. 어떻게 여기는가? 면우(俛宇)주 28)가 논한 '신(神)' 자의 설은 집의 상자에 두고 아직 부쳐드리지 못했으니, 남겨두고 뒤의 인편의 기다릴 뿐이네. 고부(姑夫)를 고부라 칭하면서 스스로 부질(婦姪)이라 칭하고, 존고부(尊姑夫)를 존고부라 칭하면서 스스로 부종손(婦從孫)이라 칭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분명한 근거를 보지 못했으니, 다시 생각해 보시게.
"미발(未發)……"이라 한 것은 단안(斷案)을 얻지 못한 지 오래되었네. 그러나 그대의 말은 오직 성인인 이후에 미발의 중이 있고, 나의 말은 비록 보통사람이라도 또한 미발의 성이 없지 않다는 것이네. 잘 관찰하면 두 가지의 말은 각각 마땅한 것이 있음이 되는 것에 해롭지 않아 폐해서는 불가하니, 만일 하나를 폐하고 하나를 보존하려고 한다면 혹 한 쪽으로 귀결됨을 면치 못할 듯하네. 또 보내온 편지에서 이른바 "탁박(濁駁)한 것은 장차 때로 용사하지 않음이 없다."라고 한 것은 이것은 그렇지 않을 듯하네. 사람이 기를 품부 받은 것은 비록 같지 않음이 있지만 대개 우연히 순후함에 돌아갈 때가 있고 개연(介然)히 깨달을 때가 있으니, 어찌 일괄 때로 탁박하지 않음이 없다고 이르겠는가? 그렇다면 맹자의 야기(夜氣)와 평명(平明)의 기에 대한 설은 유독 무엇을 이르는 것인가? 이미 '미발(未發)'이라고 하였다면 저 탁박한 것은 또한 어떻게 유독 용사하겠는가? 다시 상세히 살펴보시게. 《춘추》를 읽는 것은 매우 좋네. 모름지기 《춘추호씨전(春秋胡氏傳)》을 아울러 읽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나는 이 책에 대해 만년에야 비로소 한 번 섭렵하였지만 능히 정밀하고 익숙하게 보지 못하였으니 모름지기 항상 한스러워 하고 있네. 지금 의의(疑義)에 대해 또한 감히 쉽게 대답할 수 없고, 다만 마땅히 조만간에 생각해서 가부를 질정하겠네.
심설(心說)을 매번 이렇게 제기하니, 터득하지 못하면 그만두지 않는 뜻이 지극히 독실하고 지극할 뿐 아니라 남의 혼몽함을 근심하여 열어서 구원해 줄 수 있기를 생각하는 것이니, 그 의가 어찌 우연이겠는가? 지난 편지는 실로 소소하게 맹렬한 단서가 없지 않았는데 개의치 않고 오히려 또 이렇게 말하니, 그 넓게 포용한 장후(長厚)함은 실로 보통사람이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매우 공경하고 감사하네. 만약 다시 심기를 내리고 평안히 하여 반복하여 논변해서 황연히 하나로 귀결되는 데 이른다면 그 다행함은 또 어떠하겠는가? 지금 멀리 다른 설을 인용할 필요가 없고 단지 그대 편지 속의 몇 조목 말로 말해보겠네.
주자가 말하기를 "성이 유행함에 심이 그것의 주가 된다."라고 하였으니, 이 '심(心)' 자는 과연 오로지 이로서 말한 것인가? 선사께서 말하기를 "사람에 있어서는 동작과 운용이 주가 된다."라고 하였으니, 이 '주(主)' 자는 과연 이로서 말한 것인가? 이미 오로지 그 이를 말한 것이 아니라면 능(能)과 소(所)의 구분이 없을 수 없음이 주자가 능각(能覺)과 소각(所覺)을 말한 것과 같으니, 또 무엇이 방해이겠는가? 군(君)이 주재가 되지만 부여받은 직분이 아니라면 주재가 될 수 없고, 심이 주재가 되지만 부여받은 성이 아니라면 능히 주재가 될 수 없으니, 어떻게 여기는가? 하늘은 무위(無爲)하기 때문에 이가 주가 되고, 사람은 유위(有爲)하기 때문에 심이 주가 되네. 그러나 심이 주가 되는 것이 바로 이가 주가 되는 까닭이네.
효건(孝巾) 이것은 시속의 제도인데 그 제도는 예문에 보이지 않으니, 봉합(縫合)이 앞에 있고 뒤에 있는 것은 어떻게 해야 가한지 모르겠네. 그러나 길관(吉冠)은 왼쪽으로 향하고 흉관(凶冠)은 오른쪽으로 향한다는 설로 미루어보면 뒤에 있어야 마땅할 듯하니, 오른쪽이 음이 되고 뒤가 또한 음이기 때문이네. 또 모든 관의 봉합이 뒤에 있으니, 그 마땅함을 얻은 듯하네. 신(神)이 태원(太元)으로 돌아간다는 설은 나의 뜻 또한 그대의 말과 같네. 미리 신주[祠板]를 적는 것은 그 가함을 모르겠으니, 비록 심하게 눈 내리고 춥더라도 어찌 한 줄이나 반줄을 쓸 수 없는 이치가 있겠는가? 만일 심한 이유가 아니라면 문득 고례(古禮)를 고쳐 편리함에 나아가는 것은 불가하니, 그렇지 않다면 어찌 예를 제 마음대로 남에게 허여 한다주 29)는 꾸지람이 없겠는가? 이것은 남의 이런 질문에 답할 때 살펴 신중히 하지 않아서는 불가하네. 집안의 걱정이 평상을 회복하면 바라건대 혹 한 번 찾아와 주겠는가?
들으니 그대는 근래 초서와 예서 같은 기예에 매우 공을 들이고 있다고 하는데 과연 그러한가? 이것은 다른 사람 입장에서는 실로 좋지만 그대에게는 기대하고 바라는 것이 어떠한데 이런 등의 기예에 구구하게 날을 허비한단 말인가? 애장(艾丈)주 30)이 '소이(所以)' 두 글자로 이단에 가깝다고 한 것은 이것은 한 때 우연히 말함에 지나치게 통쾌하게 한 말인데 그대는 "만약 주재하는 바가 있음을 말한 것이라면 이것은 이단이 아닌가?……"라고 여기니, 애장은 이미 우연히 실수한 것인데 그대는 이에 이것을 끌어들여 증명하여 그 설에 일일이 나아가려고 하는가? 어찌 너무 지나치게 믿고 너무 예리하게 꺾는 것을 이와 같이 하는가? 그대는 혹 이런 기상이 없지는 않을 것이네. 이것은 비록 작은 흠이지만 또한 온전히 아름다운 도는 아니니, 만약 단칼로 베어 내지 않는다면 또 어찌 작은 흠에 그치지 않을 줄 보장하겠는가? 우리들이 서로 향하는 마음에 만약 말을 다하여 서로 규계하지 않는다면 어찌 이른바 남을 위하여 도모함에 충심을 다한다는 뜻이겠는가? 더구나 그대가 나에게 간절하게 하는 것이 갈수록 더욱 지극한데 내가 보답할 것은 과연 어떤 일이겠는가? 항상 부족하고 부끄럽던 차에 삼가 이 일전어(一轉語)주 31)를 드려 그대가 혹 취하는 것이 있기를 바라니, 어떻게 여기는가? 보여준 용계(龍溪)주 32)의 설 제1조목에 대해 심은 실로 형기(形氣)와 신리(神理)를 겸하였다고 여기고 능히 주재하는 것에 이르러서는 신리에 있다고 하니, 이 설은 실로 좋네. 그러나 이 '신(神)' 자를 그대는 이(理)가 스스로 하는 것이라 인식하지 않는가? 제2조목에 대해 군(君)과 신(臣)을 합하여 한 나라의 주로 삼는 것은 불가하다고 여겼는데, 이것은 비긴 것이 정밀하지 못한 듯하네. 심은 성과 지각을 합한 이름이니, 성과 지각을 나누면 심이 될 수 없네. 군과 신을 합하면 군이 될 수 없고 이와 기를 합하면 실로 주재라 이를 수 없지만 성과 지각을 합하는 것 또한 주재라 이를 수 없는가? 주자는 오히려 지각을 주재라고 하였네. 제3조목에 대해 물칙(物則)의 칙은 이(理)만을 가리켜 말한 것이고 그 물은 이를 겸하여 가리켜 말한 것이니, 하나라도 빠뜨리면 물을 이루지 못한다고 여긴 것은 또한 옳네. 내가 일찍이 "이를 말하면 기를 섞을 수 없고 기를 말하면 이와 떠날 수 없다."라고 한 것이 이러한 것이네. 그대는 이미 이것을 알았다면 유독 령(靈)이 주가 되는 것은 바로 이가 주가 되는 소이임을 알지 못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심이 음양과 같은 것을 태극이라 여기면서 유독 심의 령을 주재로 여기지 않는가? 또 심이 음양과 같은 것을 이기를 겸하였다고 하는 것은 가하지만 곧장 음양을 바로 가리켜 태극이라 하는 것이 가한가? 령을 주재로 여기면 령은 이 가운데의 일이니, 이가 주재가 되는 것은 실로 여전하네. 지금 령을 주재로 여기면 이가 주재를 잃을까 두렵고 이를 주재라 하면 령이 쓸데없는 곳으로 돌아갈까 두렵기 때문에 곧 령을 일러 이라고 하였네. 이는 절로 하나의 령이 있고 기는 절로 하나의 령이 있으며, 이는 절로 하나의 신이 있고 기는 절로 하나의 신이 있으며, 령은 능히 주재하는 것이 있고 능히 주재하지 못하는 것이 있으며, 신은 능히 묘용하는 것이 있고 능히 묘용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고 하는데 이르렀으니, 이것은 무슨 의체(義諦)인가? 그대의 견해로 천착하는 것이 여기에 이를 줄 생각하지 못하였네. 정자가 말하기를 "심은 이와 하나이지만, 사람이 합하여 하나로 하지 못한다."라고 하였으니, 심이 이와 하나라는 것이 바로 주재하는 곳이네. 심과 이가 하나라고 하는 것은 가하고, 심이 문득 성이라고 하는 것은 불가하고, 령이 문득 이라고 하는 것은 불가하니, 앞에서 이른바 "령(靈)이 주가 되는 것은 바로 이가 주가 되는 소이이다."라는 것은 심이 이와 하나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또 심이 이와 하나라는 것이 바로 주재하는 곳인데, 지금 이에 나누어 둘로 하여 하나의 심 안에 두 개의 신과 두 개의 령과 능주(能主)와 불능주(不能主)의 구분이 있다고 여기니, 가하겠는가, 불가하겠는가? 보내온 편지에서 내가 겨우 이 이가 있는 것만을 보았기 때문에 이 령이 있는 것이 마치 세상 사람이 기는 이에 근본하기 때문에 이가 주가 된다는 설과 같다고 기롱하면서 그 진체(眞體)와 묘용(妙用)은 지극히 신령하여 헤아릴 수 없는 것은 여전하다고 하였네. 무릇 이가 주재가 되는 것은 그 근원에 이 이가 있기 때문이고 기가 복역(僕役)이 되는 것은 그 뿌리가 이에 근본하기 때문이니, 어찌 이것 밖에 별도로 주재하는 것이 있음이 마치 호령을 행하고 기세를 부리는 것 같이 하겠는가? 그렇다면 이에 작용이 있는 것이 분명하네. 그대가 이른바 "신(臣)이 그 수고로움을 맡고 군(君)이 그 공을 차지한다."라는 것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그 폐단이 오직 군이 그 수고로움을 맡을 뿐만 아니라, 전날의 여위(輿衛)들로 하여금 승진하여 오늘의 주재가 되게 하니, 그 명위(名位)가 도치되는 것이 과연 어떠한가? 피차간에 모두 정견(定見)이 없네. 다만 구구한 밝음으로 억지로 더듬고 괴롭게 찾는다면 비록 혹 다행히 하나를 터득함이 있더라도 도리어 도에 이반되고 참을 어지럽히는데 귀결됨을 면치 못하는 것이 생각건대 적지 않을 것이네. 지금 이후로 더욱 존양(存養)에 힘써 서서히 궁리 격물의 공부를 더하여 날로 달로 매진한다면 환연(渙然)히 회합(會合)하는 날이 없지 않을 것이니, 어떻게 여기는가? 장재(張載)가 말한 "형이 있은 다음에 기질의 성이 있다.[形而後有氣質之性]"라는 것의 이 '형' 자는 '형생(形生)'의 형인가, '형현(形見)'의 형인가? 맹자가 말한 "뜻이 한결같으면 기를 움직이고, 기가 한결같으면 뜻을 움직인다.[志一則動氣 氣一則動志]"라는 것의 이 '동' 자는 단지 지기(志氣)의 경중이 서로 도움이 된다는 뜻을 말한 것이겠는가? 아니면 윗 문장에서 부동심(不動心)을 설명해 오면서 동심(動心)의 동을 위한 것이겠는가? 앞의 말대로 본다면 뜻이 기를 움직이는 것은 선이고 기가 뜻을 움직이는 것은 불선이며, 뒤의 말대로 본다면 뜻이 기를 움직이는 것과 기가 뜻을 움직이는 것은 모두 불선이니, 어느 설이 옳은지 모르겠네. 원컨대 그대는 이 상하의 두 조목에 대해 시험삼아 한 마디 해주기를 바라네.
지동(志動) 기동(氣動)의 설은 추후에 생각해 보니, 한주(寒洲)가 지동(志動)을 좋게 여긴 것은 실로 불가하고, 애산(艾山)이 말한 것은 과연 이치가 있는 듯하고, 지금 선사의 말을 보니 맹자의 본 뜻을 얻었다고 할 만하겠네.
주석 27)주자의 시
〈성리음(性理吟)〉가운데 마음을 읊은〈심(心)〉에 나오는 구절이다.
주석 28)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1846~1919)의 호이다. 자는 명원(鳴遠), 본관은 현풍(玄風)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학문을 계승한 스승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 1818~1886)의 학설을 이어받아 주리(主理)에 입각한 이기설(理氣說)을 주장하였다. 저서로는 《면우집》이 있다.
주석 29)예를……한다
공자의 제자 자유(子游)에게 사사분(司士賁)이 묻기를, "시신을 침상 위에 두고 습(襲)을 해야 될 듯합니다." 하니, 자유가 대답하기를, "그렇게 하라."라고 하였는데, 현자(縣子)가 그 말을 듣고 말하기를, "분에 넘치는 짓을 하도다, 자유여. 예를 제 마음대로 남에게 허여하도다.〔汰哉叔氏專以禮許人〕"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禮記 檀弓上》
주석 30)애장(艾丈)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 1843~1911)를 말한다. 자세한 내용은 앞의 주석 '애산(艾山)' 참조.
주석 31)일전어(一轉語)
선가(禪家)에서 유래한 말로, 깨달음의 계기를 제공해 주는 한마디 어구를 말한다.
주석 32)용계(龍溪)
류기일(柳基一, 1845~1904)의 호이다. 자는 성존(聖存), 또 다른 호는 용서(龍西),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경기도 포천 출신이다. 이항로(李恒老, 1792~1868)의 문인이다. 위정척사운동을 전개하였고, 일제 침략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향적산(香積山) 아래에 은거하면서 《척양록(斥洋錄)》 등의 저술활동과 문인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저서로는 《용서고(龍西稿)》가 있다.
答黃景涵
朱子詩。虛靈妙用由斯出。故主吾身統性情。斯字指心而言。其命題以心故也。虛靈妙用。只是一串說來。而能主吾身統性情者也。何嘗有虛靈故能妙用。妙用故能統性情。如賢者云云之意耶。不欲許靈以主統。故强排拶古文如此。而今曰不敢排拶云耶。冲漠無眹。愚意初亦以精一邊知之。今見南塘之言如此。朱子之言。亦有如此處。蓋冲漠無眹。統動靜而言理之面目。本來如此也。然程子於冲漠云云之下。以未應已應言之者。有之則亦恐不可槪謂之非靜一邊也。至於費隱。尤不可以動靜言。物之動者。固費。而靜者。獨非費耶。若動若靜。無非費也。而其不可見不可聞者。乃其隱也。南塘說。恐不可輕議之也。如何如何。俛宇論神字說。置之家篋。未得付呈。留待後便耳。姑夫稱姑夫。而自稱婦姪。尊姑夫稱尊姑夫。而自稱婦從孫如何耶。未見的據。更思之。未發云云。未得斷案久矣。然以賢之言。則惟聖人而後。有未發之中。以愚之言。則雖常人。亦不無未發之性。善觀之。則兩言。不害爲各有攸當而不可廢。如欲廢一而存一。則恐或不免爲一偏之歸。且來喩所謂濁駁者。將無時而不用事。此恐不然人之氣稟。雖有不同。而槪有偶然回淳時。有介然覺悟時。豈可槩謂無不濁駁耶。然則郊聖夜氣平明之氣之說。獨何謂耶。旣曰未發。則彼獨駁者。亦何以獨用其事耶。更詳之也。春秋讀之甚善。須併胡氏傳而讀之如何。愚於此書。晚始一番涉獵。而未能精熟。尋常竊恨之。今於疑義。亦未敢容易仰對。第當早晩入思。以質可否也。
心說每此提起。不惟其不得不措之意。極爲篤至。而悶人之昏蒙。思有以啓援之者。其義豈偶然哉。 前書固不無小小凌厲之端。而不以介慮。猶且云爾。其含洪長厚。實非常調人可算也。欽感萬萬。若復降心平氣。反復論辨。以至於怳然歸一。則其爲幸。又何如哉。今不必遠引他說。只以賢書中數條語。言之。朱子曰性之流行。心爲之主。此心字。果專以理言之耶。先師曰。在人則動作運用爲主。此主字。果專以理言之耶。旣不是專言其理。則不容無能。所之分。如朱子能覺所覺之云。又何妨也。君爲主宰。而非所賦之職。不得爲主宰。心爲主宰。而非所賦之性。不能爲主宰。如何如何。天無爲。故理爲之主。人有爲故。心爲之主。然心之爲主。卽理之所以爲主也。
孝巾此是俗制。而其制度不見於禮文。縫合之在前在後。未知其如何爲可也。然以吉冠向左。凶冠向右之說。推之。似當在後。有爲陰。後亦陰故也。且凡冠之縫在後。似得其冝。神返太元之說。鄙意亦如賢言。預書祠板。未知其可。雖甚雪寒。豈有不得書一行半行之理乎。如非甚故不可輒改古禮以就其便。不然。豈無以禮許人之誚乎。此於答人此等之問。不可不審愼也。庭憂復常。幸。或一顧否。
聞賢近來。頗能用功於草肄之藝。果然耶。此在他人固善。而在吾友所期望爲何如。而乃區區費日於此等伎倆耶。艾丈以所以二字。謂近於異端者。是一時偶然發之太快之語也。而賢以爲。若云有所以主宰。則是非異端耶云云。艾丈旣偶失之矣。而賢乃援以證之。曲就其說耶。何信之太過。折之太鋭乃爾也。賢者或不無此等氣象。此雖小疵。亦非全美之道。若不斷下則又安知不止爲小疵耶。吾輩相向。若不盡言相規。豈所謂謀忠之意哉。况賢之所以惓惓於我者。愈益勤至。而我之所以報答者。果何事耶。尋常斂愧之餘。謹貢此一轉語。以企賢者之或有取焉。如何如何。所示龍溪說第一條以爲。心固兼形氣神理。而至其所以能主宰者。則在於神理。此說固好。然此神字。賢其不認以理之自爲耶。第二條以爲。不可合君與臣爲主於一國。此其比擬。恐不精。心是合性與知覺之名。分性與知覺。不得爲心。合君與臣不可爲君。合理與氣。固不可謂主宰。合性與知覺。亦不可謂主宰乎。朱子猶以知覺而謂之主宰也。第三條以爲。物則之則。單指理言之。而其物兼指理言之。闕一不成物者。亦是。愚嘗曰。言理則不可混氣。言氣則不可離理者此也。賢旣知此。則獨不知靈之爲主。卽理之所以爲主。何耶。以心猶陰陽爲太極。而獨不以心之靈爲主宰耶。且以心猶陰陽。謂兼理氣則可。直以陰陽謂正指太極可乎。以靈爲主宰。則靈是理中事。理之爲主宰。固自若也。今以靈爲主宰。則恐理失主宰。以理謂主宰。則恐靈歸無用。故乃喚靈爲理。至於理自有一靈。氣自有一靈。理自有一神。氣自有一神。靈有能主宰者。有不能主宰者。神有能妙用者。有不能妙用者。此何義諦。以吾友之見。而不意穿鑿至此也。程子曰心與理一人不能會之爲一。心與理一。正是主宰處也。謂心與理一則可。謂心便是性則不可。謂靈便是理則不可。向所謂靈之爲主。卽理之所以爲主者。非心與理一之謂耶。且心與理一。正是主宰處。而今乃分而二之。以爲一心之內。有二神兩靈能主不能主之分。可乎不可乎。來喩譏我僅見其有是理。故有此靈。如世人之氣本於理。故理爲主之說。而其無眞體妙用。至神而不測者。自如也。夫理之爲主宰。以其原有是理故也。氣之爲僕役。以其根本於理故也。豈外此而別有所主宰。如行號令作氣勢之爲耶。然則理之有作用。決矣。賢所謂臣任其勞。君居其功者。果安在也。其敝不惟君任其勞。而使前日之輿衛。升爲今日之主宰。其名位之倒置。果何如耶。彼此俱無定見。但以區區之明。强探苦索。雖或幸有一得。而反不兔於畔道亂眞之歸。想不少矣。自今以往。益務存養。徐加窮格。日邁月征。不無渙然會合之日。如何如何。形而後有氣質之性。此形字是形生之形耶。是形見之形耶。孟子志一則動氣。氣一則動志。此動字。是特言志氣輕重互相資助之義耶。抑自上文不動心說下來。而爲動心之動耶。以前言。則志動氣是善。氣動志是不善。以後言。則志動氣。氣動志。皆是不善。未知何說爲得。願吾友於此上下二條。試下一言爲望。
志動氣動之說。追後思之。寒洲以志動爲好底。固不可而。艾山所言。果似有理。今見先師之言。可謂得孟子本意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