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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8
  • 서(7)(書(7))
  • 황경함에게 답함(答黃景涵)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8 / 서(7)(書(7))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08.0001.TXT.0003
황경함에게 답함
일본만수(一本萬殊)는 이(理)로 말하면, 하늘의 이가 바로 땅의 이이고 사람의 이가 물의 이여서 실로 말할 만한 계위(界位)가 없으며, 분(分)으로 말하면, 만물은 하늘에 통솔 되고 만사는 마음에 통솔 되고 만민은 임금에게 통솔 되고 만지(萬枝)는 뿌리에 통솔 되고 만류(萬流)은 근원에 통솔 되니, 이것이 유독 일본만수의 의가 아닌가? 보내온 편지에서 "어찌 한 개의 일본만수인데 이(理)에 있고 심(心)에 있는 다름이 있겠는가?"라고 여겼으니, 어찌 그 설이 너무 명쾌하고 변론이 너무 심한 것인가? "천하의 악은 따로 근두(根頭)가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스스로 한 단락을 제기한 것이고 윗 문장의 뜻과 연루시킨 것이 아니네. 보내온 편지에서 '심(心)' 자를 바꾸어 '기(氣)'라 하여 기를 심에 해당 시킨 등의 말은 남의 뜻을 헤아리지 못했다고 할 만하네. 경(敬)은 인(仁)을 구하는 요체가 되니 이것은 인을 체득하는 공으로 말한 것이고, 서(恕)는 인을 구하는 방법이 되니 이것은 인을 행하는 공으로 말한 것이니, 《논어》에 '이것은 인의 근본이다[是仁]'와 '인을 행하는 근본이다[行仁]'라는 구별이 있는 것과 같네. 그러나 서(恕)는 자신이 서고자 하면 남을 세워주고 자기가 통달하려 하면 남을 통달하게 하는 뜻인즉, 경이 그 가운데 있지 않은 적이 없으니, 경을 말하면 서가 그 가운데 있다는 것과 같네. 영남으로 행차하였다가 간소(刊所)에서 재촉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나 자신의 사정은 실로 움직이기 어려우니 매우 불안하네. 사옥(士玉)과 근래 상대하고 있어 외롭고 쓸쓸한 처지가 매우 위로 되네. 순실(淳實)하고 근칙(謹飭)하여 한결같은 뜻으로 향학(向學)하는 것이 사옥과 우경(宇卿)주 7) 같은 이는 매우 쉽게 얻을 수 없으니, 그대의 말이 또한 나의 뜻이네. 책자는 가을과 겨울이래로 한결같이 어수선하여 펼쳐 볼 여가가 없었고, 근래 비로소 한 번 보았는데 종종 격언(格言)과 지론(至論)이 많아 나로 하여금 절로 심취하게 하였네. 가숙(家塾)이 새로 이루어졌으니, 그대의 공부하고 휴식하는 계획을 얻었을 것이네. 다만 마땅히 편액을 붙일 것을 생각하여 그대가 밤낮으로 면려하려는 뜻에 만 분의 일이라도 부응해야 할 것이니, 우선 기다려 주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명덕(明德)……"이라 한 것은 선유의 설이 아마 해롭지 않을 듯한데, 다만 "이것은 하늘의 인의예지에서 받았다."라고 하니, '성(性)' 자와 무슨 차이가 있는가? 이것이 흠결이 될 뿐이네.
무릇 합일분수(合一分殊)는 성(性)으로 말하면 마땅히 성에서 보아야 하고, 심(心)으로 말하면 마땅히 심에서 보아야 하네. 다만 합일분수를 심과 성에 분속시켜 보는 것은 불가하네. 합일분수도 오히려 분속시키는 것이 불가한데, 더구나 편전(偏全)을 심과 성에 분속시킬 수 있겠는가? 그대가 인용하여 비유한 것은 지극히 그 단서가 많지만 단지 긴 행랑의 기둥을 다시 세는 것주 8)에 불과하네. '신명(神明)' 두 글자는 절로 '심(心)' 자의 본 뜻이니, 신명을 놓아두고 심을 말하면 공적에 가깝지 않겠는가? 이로부터 이후로는 마땅히 성을 말해야 하고 심을 말해서는 부당하네. 애산(艾山)주 9)이 말한 "심은 성정(性情)의 통명(統名)이다."라고 한 것을 그대는 어떻게 여기는가? 나는 심이 성정을 통솔한다고 하는 것은 가하다고 여기고, 심이 성정의 통명이라는 것은 불가하다고 여기네. 왜 그런가? 성정의 바깥에 심이 없기 때문이네. 신명은 심의 본 뜻이고 신명하게 하는 것은 이(理)가 아닌가? 이와 같은 설은 이가 주재가 되지 못할까 근심이 없을 것이네. 그대는 심 자를 보는 것이 애산의 설과 같아 종종 이런 갈등을 이루게 되니, 다시 상세히 살피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주석 7)우경(宇卿)
임태주(任泰柱, 1881~1944)의 자이다. 호는 성재(誠齋), 본관은 장흥(長興)이다. 정의림의 문인이다. 저서로는《성재집》이 있다.
주석 8)긴……것
공연히 의심하여 다시 문제 삼는 것을 말한다. 《근사록》〈존양(存養)〉에 "정명도(程明道)가 예전에 장안의 창고 안에 한가로이 앉아서 긴 행랑의 기둥을 보고 마음속으로 세었다. 이미 의심이 없었으나 다시 세어 보니 부합하지 않자 사람으로 하여금 일일이 소리 내어 세어 보게 하였는데, 결국 처음 세었던 것과 차이가 없었다.[伯淳昔在長安倉中閑坐, 見長廊柱, 以意數之. 已尙不疑, 再數之不合, 不免令人一一聲言數之, 乃與初數者無差. ]"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주석 9)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 1843~1911)의 호이다. 자는 영오(英五)ㆍ후윤(厚允), 또 다른 호는 노백헌(老柏軒)ㆍ물계(勿溪),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경상남도 합천군 쌍백면 묵동에서 살았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6)의 문인이다. 저서로는 《노백헌집》이 있다.
答黃景涵
一本萬殊。以理言之。天之理卽地之理。人之理卽物之理。固無界位之可言。以分言之。萬物統於天。萬事統於心。萬民統於君。萬枝統於根。萬流統於源。此獨非一本萬殊之義乎。來喩以爲豈一箇一本萬殊。而有在理在心之異。何其說之太快。而辨之太深也。天下之惡。非別有根頭云云。此是自起一段。非所以連累上文之意。來喩換心爲氣。以氣當心等語。可謂不諒人意矣。敬爲求仁之要。此以體仁之功言。恕爲求仁之方。此以行仁之功言。如論語有是仁行仁之別。然恕是己立立人己達達人之義。則敬未嘗不在其中。如言敬而恕在其中。嶺行。自刊所催促。非一非再。而身故姑難動作。不安不安士玉近與相對。頗慰孤索。淳實謹飭。一意向學如士玉宇卿。甚不易得。賢言亦吾意也。冊子秋冬來。一向紛汨。未暇披看。近始一覽。往往多格言至論。令人不覺心醉。家塾新就。吾友修息之計得矣。第當思其所以扁揭者。以副吾友日夕警勉萬一之意。姑俟之如何。明德云云。先儒說恐無害。而但曰是所受於天之仁義禮智云。則與性字何別。此爲所欠耳。大抵合一分殊。以性言之。則當於性上看之。以心言之。則當於心上看之。但不可以合一分殊。分屬心性看也。合一分殊。猶不當分屬。況以偏全分屬心性乎。賢所引喩。極其多端。而只不過再數長廊桂也。神明二字。自是心字本旨。舍神明而言心。則其不近於空寂乎。過此以往。則當言性。不當言心。艾山所言心是性情之統名者。賢以爲何如耶。愚以爲心統性情則可。以爲心是性情之統名則未可也。何者。以性情之外。無心故也。神明是心之本旨。而所以神明者。非理乎。如此說。不患理不爲主宰矣。賢看心字如艾山說。種種致此葛藤。更詳之如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