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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8
  • 서(7)(書(7))
  • 황경함 【철원】에게 답함(答黃景涵【澈源】)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8 / 서(7)(書(7))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08.0001.TXT.0001
황경함주 1) 【철원】에게 답함
신여(新汝)주 2) 편에 갖가지 소식을 들었네. 삼가 묻건대 당상의 체후는 모두 평안하신가? 그대 아우는 관례와 혼례를 무사히 치렀다고 하니, 어떤 위안이 이만 하겠는가? 호설(湖說)의 삼층(三層)주 3)에 대한 변론은 옳지만, 나의 설에 삼층이 있다고 한 데 이르러서는 지나치네. 그대는 "사람은 사람과 같고 동물은 동물과 같다.[人與人同 物與物同]"라고 한 것은 본래 좋은 말이 아니라고 여기고, 나는 "사람은 사람과 같고 동물은 동물과 같다."라고 한 것은 본래 좋지 않은 말이 아니라고 여겼네. 다만 호설로 인하여 좋지 않게 여긴 것일 뿐이니, 사람은 사람과 같고 동물은 동물과 같다는 것은 이른바 "각각 성명(性命)을 바르게 한다."라는 곳이 아니겠으며, 이른바 "하나의 근본이 만 가지 다른 것이 된다."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만(萬)'과 '일(一)'의 동이(同異)는 비록 서로 포함한다고 하더라도 궁구하여 말하자면, '일본(一本)'을 말할 때는 인물(人物)의 성이 같지 않다고 하는 것이 불가하고, '만수(萬殊)'를 말할 때는 인물의 성이 다르지 않다고 하는 것이 불가하네. 또 만수는 이분(理分)에 속하고 기분(氣分)에 속하는 것이 있으니, 호설의 사람마다 같지 않고 동물마다 같지 않다는 것은 마땅히 기분이어서 성(性)을 말할 수 없네. 그렇다면 나의 설은 단지 "하나의 근본이 만 가지 다른 것이 된다."는 뜻인데, 어찌 일찍이 호설과 같은 삼층이 있었던가? 그대가 간장(澗丈)주 4)에게 보낸 편지에서 정통 편색(正通偏塞)을 성으로 여기면서 유독 인동 물동(人同物同)은 그렇지 않다고 여긴 것은 어째서인가? 간장이 인물의 구분을 무너뜨리는 것으로 누누이 말을 하였는데 인동 물동의 설을 하는 사람을 기롱한 것은 유독 인물의 구분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닌가? 정통 편색을 이(理)가 소유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가하지만, 참으로 정통 편색을 성(性)으로 여기는 것은 말이 되지 않네. 사람은 사람과 같고 동물은 동물과 같으니, 이것은 실로 인물이 한 번 정해진 분수이고 만수가 이분에 속하는 것이네. 단지 이 만수는 실로 이미 이일(理一)의 가운데에 포함되어 있지만 벌집이나 석류 알처럼 되는 것이 아니니, 같다고 해도 가하고 같지 않다고 해도 가하네. 더구나 '성(性)과 도(道)는 비록 같지만'이라는 '성도수동(性道雖同)'이 '사람과 사물이 각각 그 성의 자연을 따른다.'는 '각순기성(各循其性)'의 아래에 있으니, 사람은 사람과 같고 동물은 동물과 같다고 말함에 어떤 불가함이 있겠는가? 그대는 솔성지도(率性之道)를 만수로 여기면서 유독 사람은 사람과 같고 동물은 동물과 같다는 설을 취하지 않으니, 또한 무슨 곡절인가? 사람은 사람과 같고 동물은 동물과 같다는 바깥에 어떤 별도의 만수가 있는가? 이것은 비유하자면 자규(子規)를 귀하게 여기면서 두우(杜宇)를 천하게 여기고, 창경(倉庚 꾀꼬리)을 싫어하면서 황리(黃鸝 꾀꼬리)를 사랑하는 것과 같네. 《중용집주》에서 이른바 "기품이 혹 다르다."는 것 이것은 실로 사람마다 같지 않고 물물마다 같지 않아 만수가 기분에 속하는 것이네. 그대가 이른바 "관맹 강약(寬猛强弱)"이라 한 것은 옳네. 간장이 그대가 정통 편색을 이(理)로 여기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이(理)는 실로 이와 같다고 여긴다면, 어찌 본연의 이(理)에 교구(矯捄)하는 공을 더함이 있겠는가? 의심스러운 것이 정히 여기에 있다면 변론하여 해설할 때 마땅히 "만수에는 이분이 있고 기분이 있으니, 이분은 실로 교구할 수 없으나 교구할 수 있는 것은 기분이다."라고 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적막한 물가에 벗을 떠나 쓸쓸히 지내는 것이 매우 심하여 이러한 설로 서로 고쳐줄 사람이 한 명도 없는데, 오직 그대가 나를 멀리하지 않고 갖가지 보여주는 것이 이와 같이 곡진하니, 나의 위안됨과 감사함이 어떠하겠는가? 조금이라도 노년에 거둘 수 있는 희망은 오직 그대에게 의지하고 있으니, 바라건대 의론하는 사이에 소소한 위합(違合)을 혐의로 삼지 말고 더욱더 부지런히 제기하여 성취하는 것이 있기를 기약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주석 1)황경함(黃景涵)
황철원(黃澈源, 1878~1932)을 말한다. 자는 경함, 호는 은구재(隱求齋)·중헌(重軒), 본관은 장수(長水)이다.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기운동에서 태어났다. 정의림의 문인이다. 저서로는 《중헌집》이 있다.
주석 2)신여(新汝)
황승현(黃承顯)의 자이다.
주석 3)호설(湖說)의 삼층(三層)
호론(湖論)의 좌장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이 주장한 학설로, 성삼층설(性三層說)이라고도 한다. 성을 인간과 사물이 같은 초형기(超形氣)의 성, 인간과 사물이 다른 인기질(因氣質)의 성, 인간과 인간이 서로 다른 잡기질(雜氣質)의 성으로 구분하여 파악한 것이다.
주석 4)간장(澗丈)
이기백(李琪白, 1854~1903)을 말한다. 자는 광빈(光彬), 호는 간재(澗齋),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자세한 행적은 《일신재집》권19〈간재 처사 이공 행장(澗齋處士李公行狀)〉에 보인다.
答黃景涵【澈源】
新汝便。承信種種。謹詢堂候萬安。令弟冠娶利行。何慰如之。湖說三層之辨得矣。而至以鄙說謂有三層則過矣。賢謂人與人同。物與物同。本非好語。愚謂人與人同物與物同。本非不好語。但因湖說而爲不好耳。人同物同。非所謂各正性命處乎。非所謂一本之所以萬殊者乎。萬一同異。雖曰相涵。而究而言之。言一本時。不可曰人物之性不同。言萬殊時。不可曰人物之性不異。且萬殊有屬理分底。有屬氣分底。湖說人人不同物物不同。當氣分。而不可以言性。然則鄙說只不過一本萬殊之義。而何嘗有三層如湖說乎。賢抵澗丈書。以正通偏塞爲性。而獨以人同物同爲不然。何也。以澗丈壞人物之分。縷縷爲言。而譏人同物同之說者。獨非壞人物之分耶。以正通偏塞爲理之所有則可。眞以正通偏塞爲性則不成說矣。人與人同。物與物同。此固人物一定之分。而萬殊之屬於理分者也。只此萬殊固已涵於理一之中。而非如蜂房榴核之爲。則謂之同可也。謂之不同亦可也。況性道雖同在於各循其性之下。則謂之人與人同。物與物同。有何不可乎。賢以率性之道爲萬殊。而獨不取人與人同物與物同之說。抑何曲折耶人與人同物與物同之外。有何別般萬殊乎。此比如貴子規而賤杜宇。惡倉庚而愛黃鸝者也。集註所謂氣稟或異。此固人人不同。物物不同。而萬殊之屬於氣分者也。賢所謂寬猛强弱者得矣。澗丈見賢以正通偏塞爲理。故以爲理固如此。則安有本然之理。而加矯捄之功乎。所疑正在於此。則其辨而解之之說。當曰萬殊有理分底。有氣分底。理分固不可以矯捄。而所可矯捄者。氣分云爾。則何如耶。寂寞之濱。離索殊甚。無一人以此等說相規。而惟吾友爲之不遐。種種示及。若是繾綣。區區慰感。謂何如耶。一分收棄之望。惟吾友是倚。幸勿以議論間小小違合爲嫌。益加勤提。期有所就。如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