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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7
  • 서(6)(書(6))
  • 강자명【진섭】에게 답함(答姜子明【晉燮】)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7 / 서(6)(書(6))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07.0001.TXT.0010
강자명【진섭】에게 답함
지난날 단란하게 모여 여러 날을 머물지 않음이 없다가, 돌아온 후에 그리워하며 다시 옛날처럼 돌아갈 것을 생각하니, 인정이 끝없음을 참으로 알겠습니다. 집안에 뜻밖의 소란이 일어났다고 들었는데, 근심을 끼친 것이 아마도 적지 않을 듯하니 멀리 바깥에서 걱정하는 마음을 어찌 가눌 수 있겠습니까? 주자가 말하기를, "사람이 환란을 당했을 때에는 단지 하나의 처리 방법이 있을 뿐이니,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극진히 한 다음에 태연히 대처하는 것이다. 만약 제대로 처리하지도 못하고 그 뒤에 놓아 버린다면, 그것은 즉 의(義)도 없고 명(命)도 없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꼭 염두에 두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예전에 경립(景立)이 심을 성정과 대비시키는 것에 대해 물었는데, 이에 대한 저의 답변이 끝내 편안치 못하였습니다. 마음은 성정을 거느리는 것인데, 만약 성정을 말하면서 마음이 그 안에 있다고 하면 마음은 빈 그릇이 되고, 성과 정은 뼈대가 없고 귀결도 없는 것입니다. 저의 실언을 돌이켜보니, 황공하여 불안함을 가누지 못하겠습니다. 복괘(復卦)를 운운했던 것은, 선유(先儒)는 모두 정(靜)에서 천지의 마음을 본다고 하였습니다. 주자에 이르러, "동(動)하는 단서가 곧 천지의 마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자 또한 복괘를 인용하여 발하지 않았을 때의 지각(知覺)이 어둡지 않다는 뜻을 증명하였습니다. 이는 마땅히 뜻을 따라 상호 참작해야 하니, 성급히 하나의 설만 고집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동정(動靜)은 사물의 차원에서 말한 것이고, 미발(未發)과 이발(已發)은 마음의 차원으로 말한 것입니다. 천지 다음에 '미발(未發)'이란 글자를 둔 것은 마땅치 않으니, 헤아려주심이 어떻겠습니까?

【질문】
복괘 하단의 한 획은 동처(動處)라, 사람의 마음에 있어서는 역시 이발(已發)로써 말한 것입니다. 주자(朱子)가 장흠부(張欽夫)에게 답한 글에 말하기를, "마음이 보존되어 있을 때는 사려(思慮)가 아직 싹트지 않았어도 지각(知覺)은 어둡지 않다. 이것은 정(靜) 가운데의 동(動)이니, 복괘를 통해 천지의 마음을 알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른바 복괘를 통해 천지의 마음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오로지 사람의 마음이 미발(未發)하였을 때를 말한 것입니까?
【대답】
음양(陰陽)이 소장(消長)하는 차례로 말하면, 복괘는 일양(一陽)이 처음으로 동(動)하는 것이니 정(靜)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음양이 서로 내재하는 체(體)로 말하자면, 복괘는 음 중에 양이 있는 것이요, 정 가운데 동이 있는 것이니, 사람의 마음에 있어서 사려(思慮)가 아직 싹트지 않았어도 지각(知覺)은 어둡지 않다는 시절이 되는 것입니다. 각각의 차원으로 나아가 그 말의 뜻이 있는 곳에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질문】
밝아서 통하고 공평하여 넓게 되니, 밝아짐은 인(仁)이요, 통함은 의(義)이며, 공평함은 예(禮)요, 넓어짐은 지(知)입니다. 그런데, "사랑함을 인이라 하고 마땅함을 의라 하고 다스림을 예라 하고 통함을 앎이라 한다."주 16)는 것으로 말하자면, 통함은 지(智)에 속하지 않고 의(義)에 속하는 것은 어째서인지요?
【대답】
통함은 밝음의 성대함이니, 예에 속하는 것이 맞을 것인데, 이를 일러 의에 속한다고 한 것입니까? 예는 불과 짝하고, 불이 뻗쳐서 환히 드러나는 것은 통함의 의미가 있습니다. 지(智)가 물과 짝하는 것은 물이 두루 흘러가기에, 또한 통함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질문】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서명(西銘)」에서 그 경지가 이미 높아졌다 하였는데, 이러한 경지에 이르면 절로 따로 보이는 곳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고,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동명(東銘)」과 같은 글은 의미에 다함이 있다. 어찌 「서명」에 담긴 상하로 통하는 도【徹上徹下】와 모든 이치가 하나로 관통되는【一以貫之】 뜻과 더불어 같이 두고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주자의 말을 통해 본다면, 하학(下學)의 공부에 있어서 보완함이 없을 수 없고, 정자의 뜻을 통해 보면, 이러한 위치에 도달한 연후에 절로 보완하는 바가 있을 것이니, 어떻습니까.
【대답】
초학은 초학에서 터득하는 것이 있고, 현인(賢人)은 현인이 터득하는 바가 있으며, 성인은 성인으로서 터득하는 바가 있으니, 공부된 바가 더욱 깊고, 소견이 더욱 다릅니다.
【질문】
「정성서(定性書)」에서, "분노의 감정이 일어날 때에도, 사리의 옳고 그름을 살필 수 있어야 한다."라고 하였는데, 대개 분노가 치솟을 때를 당하여, 어찌 사리의 옳고 그름을 살필 수 있겠습니까? 옳고 그름을 살피는 것을 생각하여서 능히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까?
【대답】
분노를 잊었기 때문에 능히 옳고 그름을 살필 수 있으니, 만약 분노가 치밀어 급박하게 한다면 어떻게 사리를 살필 수 있겠습니까? 분노를 잊고 사리의 옳고 그름을 살피는 것은 두 가지 마음이 있어야 하니, 다만 존양(存養)을 익숙하게 하고 밝은 지혜로 비추는 바가 있다면 자연스럽게 말하지 않아도 깨닫게 될 겁니다. 또한, 사리의 옳고 그름을 살피고 깊이 생각한 끝에 결론을 얻는 것도 함께 이루어져야 합니다.
주석 16)사랑함을 인이라 …… 앎이라 한다
《근사록》 권1의 성무위장(誠無爲章)에 나오는 내용이다.
答姜子明【晉燮】
疇曩圑聚。非不累日。而歸來戀戀。旋復如故。儘覺人情無窮已。聞門內方有橫來之撓。其貽憂虞。想亦不細。遠外曷勝貢悶。朱子曰。人於患難。只有一䓢處置。盡人謀之後。却須泰然處之。若不會處置了放下。便是無義無命。此言當留心也。如何。昔者。鄙答景立以心對性情之問。果爲未安。心是統性情者也。若曰。言性情而心在其中。則心爲虛器。而性與情。爲無骨子沒着落矣。追念失言。不勝悚仄。復卦云云。先儒皆以靜爲見天地之心。至朱子以爲動之端。乃天地之心。然朱子亦引復卦。以證未發時知覺不昧之義。此當隨意互看。不可遽執一說也。動靜是物上說。未發已發是心上說。不當於天地。下未發字。諒之如何。
復卦下面一晝。是動處。則在人心。亦以已發言。而朱子答張欽夫書曰。方其存也。思慮未萌。而知覺不昧。是則靜中之動。復之所以見天地之心也。然則。所謂復見天地之心。專以人心未發之時言之耶。
以陰陽消長之序言。則復是一陽初動。不可謂靜也。以陰陽互藏之體言。則復是陰中之陽。靜中之動。在人心。爲思慮未萌。知覺不昧時節也。各就地頭。而觀其旨意之所在可也。
明通公溥。明仁也。通義也。公禮也。溥知也。而以愛曰仁。宜曰義。理曰禮。通曰智言之。則通不屬於智。而屬於義何也。
通是明之盛。則屬於禮可也。而謂之屬於義耶。禮配於火。火之宣著者。有通之意。智配於水。水之周流者。亦有通之意。
程子曰。西銘其地位已高。到此地位。自別有見處。朱子曰若東銘。則意味有窮。安得與西銘徹上徹下。一以貫之之意同日而語哉以朱子之說則於下學功夫不能無補而以程子之意則到此地位然後自有所補如何
初學有初學見處。賢人有賢人見處。聖人有聖人見處。所造愈深。所見愈別。
定性書。第能於怒時。觀理之是非。蓋當怒急遽之時。何以觀理之是非耶。觀是非是慮而能得之意否
忘怒故能觀是非。若當怒急遽。則何以觀理也。忘怒觀理非是。有兩樣心。但存養所熟。明睿所照。自然不言而喩。且觀理是非。與慮而能得。是一般時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