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화콘텐츠
  • 특화콘텐츠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6
  • 서(5)(書(5))
  • 양 처중에게 답함(答梁處中)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6 / 서(5)(書(5))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06.0001.TXT.0009
양 처중에게 답함
앞에 보낸 편지와 뒤에 보낸 편지가 동시에 도착을 하여 열어 읽어보고는, 마음이 활짝 트여서 긴 여름날에 우울했던 마음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모두 사그러졌습니다. 이로 인해 경전을 읽으며 지내시는 생활이 평안한 것을 알고서, 간절히 바라는 바에 더욱 들어맞아 흐뭇하였습니다. 저는 어지럽고 못난 채로 시간만을 허비하고 있으니, 볼 만한 것이 하나도 없어서, 괴로울 뿐입니다. 심설(心說)에 대한 흥미진진한 내용이었는데, 이끌어 깨우쳐준 그 가르침이 지극하여서, 모두 그 학문의 경지가 깊고 남을 위한 충직한 마음이 지극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탄복하게 하였습니다. 주재자(主宰者)와 주재저(主宰底)는 분명히 구별이 되는데, 그렇다면 주재자는 무엇입니까. 바로 심(心)의 영묘함을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재저는 무엇입니까. 바로 심(心)의 덕성을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性)은 무엇입니까. 이(理)가 심(心)에 가춰진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성(性)은 곧 이(理)이니, 성과 이를 어찌 구별한단 말입니까. 심의 영묘함이 진실로 이(理)라고 할 수도 없고, 또한 이가 행하는 바가 아니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기(氣)가 아니면 영묘함을 발휘할 수 없고, 이(理)가 아니면 영묘한 바가 없으니, 영묘하기 때문에 주재하는 것입니다. 영묘함을 버리고서는 아마도 별도로 주재처(主宰處)를 구할 수 없으니, 어찌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은 것이 목석과 같고서 능히 주재할 수 있는 자가 있겠습니까. 삼가 그대와 경함(景涵)의 생각을 살펴보건대, 영묘함은 전적으로 기(氣)에 속해 있고, 주재함은 전적으로 이(理)에 속해 있다는 것은 각기 일정한 근거가 있고 각기 알맞은 때가 있는 듯하지만, 마음의 영묘함이 바로 신묘한 주재처라는 것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말을 많이 할수록 더욱 합치되지 않는 것입니다.
무릇 영묘함과 주재함에 대해 평탄하게 설명하면, 정밀하고 거친 차이가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깊이 파고들어 말하면, 실로 피차의 구분이 없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일심(一心)의 사이에 어찌 영묘함이 있고 또 신묘함이 따로 있어서 대치하고 병립한단 말입니까. 그대가 '주재자(主宰者)'를 '이(理)'자라고 간주하였기 때문에 이(理)가 심(心)에 상대함이 있고, 이 위에 이가 있다는 등의 말들을 여러 번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대는 '주재저리(主宰底理)'를 '주재성정(主宰性情)'이라고 간주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의리(義理) 상에 흠이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문법(文法) 상에서도 부당함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주재자(主宰者)는 진실로 마음의 영묘함이니, 이를 주재(主宰)의 성정(性情)이라고 한다면, 이(理)가 주재(主宰)라고 하는 뜻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만약 그대의 생각과 같다면, 주자(朱子)께서 마땅히 "주재하는 것은 마음이요, 주재하는 바는 성정이다"라고 했을 것이니, 마땅히 이렇게 하면 안 될 것입니다. 소(所)와 소이(所以)에도 또한 그 차이를 두지 않았으니, 주자께서 이른바 '소이연(所以然)은 이(理)이고, 소당연(所當然)은 의(義)이다'라 한 것을 또한 볼 수 있습니다. '저(底)'자는 또한 '소(所)'자나 '소이(所以)'자와는 그 뜻에 다름이 없었는데, 옛사람들의 글자를 배치한 뜻이 이와 같은 경우가 진실로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答梁處中
前書後書。一時倂至。開玩豁然。長夏紆鬱。不覺消釋。因審經體衛安。益協懇祝。義林憒劣捱遣。見無一狀可煩耳。心說娓娓提諭。極其緘悉。其造詣之深。謀忠之至。令人歎服夫主宰者。主宰底。煞有分別。主宰者何物。非指心之靈而言耶。主宰底何物。非指心之德而言耶。性是何物。非指理之具於心者而言耶。然則性卽理也。性與理有何分別乎。心之靈。固不可遽謂之理。而亦不可謂非理之所爲。非氣不能靈。非理無所靈。靈故主宰。舍靈則恐無別求主宰處。曷嘗見冥頑如木石而能主宰者乎。竊覵賢與景涵之意。以靈專屬之氣。以主宰專屬之理。似涉乎各有占據。各有時節。而殊不知心之靈。乃是神妙主宰處也。宜乎多言而愈不合也。夫靈與主宰。以平坦說去。則若有精粗之可言。而究而言之。則實無彼此之可見。一心之間。豈有靈又有神。對峙而倂立乎。賢以主宰者。作理字看。故有以理對心。理上有理等。多少說話也。且賢以主宰底理。看作主宰性情云爾。則非惟於義理有欠。亦恐文法不當如是也。主宰者。固是心之靈。而曰主宰性情云。則理爲主宰之義。顧安在耶。若如賢意。則朱子當曰。主宰者心。所主宰者性情云云。固不當如是而止也。所與所以。亦未見其有異。朱子所謂所以然理也。所當然義也。此亦可見矣。底字亦與所字所以字。其義無異。古人下字之義如此處。固非一二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