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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6
  • 서(5)(書(5))
  • 양처중【회락】에게 주다(與梁處中【會洛】)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6 / 서(5)(書(5))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06.0001.TXT.0001
양처중【회락】주 1)에게 주다
상단(上段)에 "사람이 나면서 품부받은 기질에는 이치상 선과 악이 있기 마련이다【人生氣稟, 理有善惡】"라고 한 구절은, 품부받은 기질에는 청탁(淸濁)과 순박(粹駁)의 구별이 있어서, 선하거나 악한 것이 이로부터 나뉜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단(下段)에 "악함도 또한 성이라고 이르지 않을 수 없다【惡亦不可不謂之性】"라고 한 구절은, 유행(流行)하는 측면에 있어서 과함과 모자람의 차이가 있는 것은 그 근본이 모두 성(性)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말한 것입니다. 주자(朱子)께서 풀이하신 "품부받은 기질에는 반드시 선과 악의 차별이 있는 까닭도 또한 성의 이이다【所稟之氣, 所以必有善惡之殊者, 亦性之理】"라는 말은, 바로 '이에도 성과 악이 있다【理有善惡】'는 한 구절을 해석한 것이니, 그렇기 때문에 '기질에는 청탁(淸濁)과 순박【粹駁】의 구별이 있어서 선과 악의 분별이 있게 되는 것도 또한 애초부터 이가 아님이 없다【以爲氣有淸濁粹駁, 而爲善惡之分者, 亦未始非理】'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칫 그 '이(理)'라는 글자가 '실리(實理)'의 '이'로 간주하는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에, 곧바로 다시 말하기를 "여기서 '이'는 실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니, '이치상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理當如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라고 한 것입니다. 위에서 또한 하단을 해석한 부분에서 바로 '유행(流行)' 및 '과함【過】과 모자람【不及】' 등의 용어에 대해 말한 것은 볼 만합니다. '미발(未發)'은 본시 마음【心】의 측면에서 이야기한 것이니, 품부받은 기질의 측면에서 논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아래 '미발(未發)'이라는 글자가 상단과 하단에 나뉘어서 '미발(未發)'과 '이발(已發)'로 되어 있는 것도, 또한 본래 나의 의견이 아닙니다. 청탁(淸濁)과 순박(粹駁)의 경우는, 본래 태어날 때부터 품부받은 기질의 재료(材料)이니, 때에 따라 있었다가 없었다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직 발현이 되지 않은 때【未發時】의 경우에는, 다만 전고의 인용을 사용하지 않았을 뿐만이 아닙니다. 더구나 내가 일찍이 '이치상 선과 악이 있다【理有善惡】'는 구절이 아직 발현이 되지 않은 시절이며, 다만 태어날 때부터 품부받은 기질의 재료만을 언급한 것이겠습니까. 아직 발현이 되지 않은 것【未發】보다 어질다고 하는 것은, 품부받은 기질에 선과 악이 없다고 한다면 옳습니다. 그러나 만약 청탁(淸濁)과 순박(粹駁)이 오로지 이 마음을 일으켜서 유행한 후의 사물을 보는 것은 아마도 옳지 않아 보이니,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논의한 여러 조목이 혹 나의 생각을 헤아리지 못한 부분이 없지 않았으니, 어느 곳에서는 "발현이 되지 않은 때에는 기질에 청탁(淸濁)이 마구 뒤섞여 있다"고 하였고, 또한 "기(氣)가 용사(用事)하지 않지만 악이 본디 있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말하기를 "선과 악이 상대적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말한 것이 과연 이와 같다고 한다면, 이는 정말 잘못 이해하신 것이니, 이것은 내가 말한 뜻이 아닙니다. 기질이 일에 쓰이지 않으면 담연하고 허정(虛靜)하여서, 진실로 청탁(淸濁)이 없다고 말할 만한데, 하물며 선악이 있다고 말할 만하겠습니까. 다만 그 품부받은 기질의 본질은 아주 잠깐의 미발(未發)로 갑자기 성인(聖人)과 같이 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다른 설을 멀리서 인용할 필요가 없어서, 다만 그대【高明】가 알려준 '맑고 깨끗한 기질【澄淸之氣】은 성인(聖人)이 항상 오래도록 잃지 않는 것이나, 뭇 사람들은 홀연히 그것을 잃는다'라고 한 말을 그대로 언급한 것입니다. 그 항상 오래도록 잃지 않는 이유는 어디에 있으며, 홀연히 그것을 잃어버리는 이유는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 이유는 다른 곳에 있는 것도 아니요, 별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도 아니니, 바로 자기의 품부받은 기질이 같지 않은 것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같지 않은 구별이 본래부터 그러했던 것입니다. '발함에 임하여서 배정한 것인가【臨發而排定耶】'란 것에 대해서는, 만약 발함에 임하여서 배정한 것이면, 정자(程子)는 마땅히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품부받은 기질이 동요하여 선악이 있게 된다'라고 하지, '이(理)에 선악이 있다'고 절대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理)가 비록 선하거나 악하더라도 그 이는 아직 형질을 갖추지 않는다면, 청탁(淸濁)이 섞여 있다고 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선악(善惡)이 상대적이라고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물이 비록 더러운 그릇에 담겨 있어도 가만히 머물러서 동요하지 않으면, 그 더러움이 발동하지 않으나, 그 맑은 것이 깨끗한 그릇에 있는 것과는 다른 것이니, 이 설명에 어찌 조금의 의심스러운 것이 있겠습니까. 성인(聖人)이 되느냐, 광인(狂人)이 되느냐는, 극념(克念)과 망념(罔念), 공(公)과 사(私), 향(向)과 배(背)로써 구별하여 말한 것이니, 어찌 기질(氣質)의 선악으로 갑자기 성인이 되고, 갑자기 광인이 된다고 하겠습니까. 만약 안자(顔子)의 홍로지설(洪爐之雪)주 2)이나 시우지화(時雨之化)주 3)와 같다면, 한 번 맑아져서 곧바로 변화하여서 성인(聖人)의 기질과 다름이 없게 됩니다. 큰 근본도 또한 어찌 보면 기질을 떠나서 세운 것이니, 다만 기가 용사(用事)하지 않은 상태에서 늘 맑고 고요함은, 이 큰 근본이 서는 까닭입니다. '사람이 나면서 품부받은 기질에는 이치상 선과 악이 있기 마련이다.'라고 한 설은, 내가 일찍이 미발(未發)로 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하단에서 유행(流行)을 설명한 곳과 비교하여서 단락이 없을 수 없을 뿐입니다. 이와 같이 본다면, 올바르고 타당하다고 생각되나, 이에 "곧바로 말하지 않고 우회해서 말했다"고 하겠습니까. 다시 상세히 살펴봐주길 바랍니다. 변별한 것은 많으나, 구별한 것은 단지 한 곳밖에 없으니, 한 곳이 합당하면 합당하지 않음이 없는 것입니다. 대저 '기불용사(氣不用事)' 네 글자를 상세하게 보아서 알아차린다면, 마땅히 막히고 통하지 않던 많은 내용들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어떠하겠습니까. 다시 지극히 타당한 결론을 보여주십시오.
주석 1)양회락(梁會洛, 1862~1935)
자는 처중(處仲), 호는 동계(東溪)이다. 천성이 총명하고 행동거지가 심중하였으며, 10세에 경전을 통달하였다. 정의림(鄭義林)과 정재규(鄭載圭)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 기정진(奇正鎭)의 영향으로 주리론(主理論)을 주장하였다.
주석 2)홍로지설(洪爐之雪)
큰 불화로 속에 하나의 눈송이가 떨어진다는 뜻이다. 공자(孔子)의 제자 안연(顏淵)이 인을 지키다가 잠시 벗어나는 경우가 있지만, 이는 마치 큰 화로 속에 눈송이 하나가 떨어지는 것이어서 영향을 전혀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다.
주석 3)시우지화(時雨之化)
초목이 철 맞게 내린 비에 잘 자라듯이 교화가 미침을 말한 것이다.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군자의 가르침이 다섯 가지인데, 때맞게 감화하듯 한 것이 있다." 하였다.
與梁處中【會洛】
上段人生氣稟。理有善惡。是氣稟有淸濁粹駁。而爲善爲惡。於此分焉之謂也。下段惡亦不可不謂之性是就流行上有過不及之差者。其本皆出於性之謂也。朱子解之曰。所稟之氣。所以必有善惡之殊者。亦性之理。此是解理有善惡一句。以爲氣有淸濁粹駁。而爲善惡之分者。亦未始非理云爾。然怕人將此理字。作實理看。故旋又曰。此不是說實理。猶云理當如此。又於解下段處。卽以流行及過不及等語。言之此可見矣。未發。本是心上說。不當於氣稟上。下未發字。分上下段。作未發已發。亦本非愚意也。淸濁粹駁。此是氣稟之本色材料。不可以隨時有無。而於未發時。則但不用事焉耳。況愚未嘗以理有善惡爲未發時節。而特以氣稟上本色材料言之耶。賢於未發。謂無氣稟善惡則可矣。而若以淸濁粹駁。專作此心流行後物事看。恐不然矣。更詳之如何。
所論諸條。或不無不諒鄙意處。有曰。未發時。氣有淸濁駁混。又曰。氣不用事。而惡自在。又曰善惡相對云云。鄙說若果如此則誠誤矣。然此非愚之言也。氣不用事。澹然虛靜。固無淸濁之可言。況有善惡之可說乎。但其氣稟本質。有不可以霎刻未發。而遽變如聖人。今不必遠引他說。只以高明所諭澄淸之氣。聖人常久而不失。衆人忽然而失之之言。言之。其常久而不失。其故何在。忽然而失之。其故何在。其故不在別處。不在別人。而在於自己氣質所稟之不同。然則其不同之分。自來已然耶。至於臨發而排定耶。若臨發而排定。則程子當曰。人生氣稟。動有善惡。不當曰理有善惡。理雖善惡。而其理未形。則不可謂淸濁混。亦不可謂善惡對矣。水雖在濁器。而止而不動。則濁不用事。而其淸與在淨器者。無異。此說何須疑也。作聖作狂。以克念罔念。公私向背言之。何嘗以氣質善惡。忽然而聖。忽然而狂耶。如顔子洪爐之雪。時雨之化。則一澄淸便渾化。却與聖人氣質無異矣。大本亦何嘗離氣質而立。但氣不用事而湛一虛靜。此大本所以立也。人生氣質理有善惡之說。愚未嘗認作未發看。但比下段說流行處。不能無段落耳。如此看。恐爲正當。而乃曰迂回耶。更詳之爲望。所辨雖多。而所分只在一處。一處合則無不合矣。大抵氣不用事四字。詳細看取。宜無許多窒礙矣。如何如何。更示至當之歸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