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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4
  • 서(3)(書(3))
  • 조경문【인석】에게 답함(答趙景文【寅錫】)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4 / 서(3)(書(3))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04.0001.TXT.0049
조경문【인석】에게 답함
칩거를 자신의 분수로 삼아 서신만이 오랜 벗들과 서로 얼굴을 마주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는 노쇠함이 더욱 심해져 이마저 종종 걸렀으니 사우(士友)들에게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좌하(座下)께서 특별히 잘못을 따지지 않는 의리주 52)를 진념하여 이렇게 먼저 은혜를 내리리라고 어찌 생각하였겠습니까. 감사한 마음을 뒤이어 곧바로 그런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서한을 통해서 명령(榠欞) 나무주 53)가 늙지 않듯 양친께서 모두 평안하시고 화기애애하며 공경이 넘쳐 길상(吉祥)이 한꺼번에 모여드는 것을 알았습니다. 명운이 순조롭고 신이 좋은 복을 내려 주었으니, 천도(天道)는 인자(仁者)를 돕지 않는다고 누가 생각하겠습니까. 창가에 놓인 책상이 고요하고 연구는 날로 깊어지며 광채가 은은히 드러나 명성이 성대하니 여풍(餘風)을 바라보면 사람이 마음을 기울이게 합니다. 의림(義林)의 천한 운명은 외롭고 고달프기만 하니 처지가 가련합니다. 이전부터 해왔던 보잘것없는 학업도 흩어지고 사라져버려 선천(先天)의 그림자가 있는 듯 없는 듯 아득한 것과 같을 뿐입니다. 지리멸렬한 결과가 참으로 합당합니다. 다만 벗들이 서신을 왕래하면서 이따금 저를 독서인(讀書人)으로 기대하시고 후생(後生)의 젊은이 한둘이 간혹 찾아와 가르침을 청하는 듯함을 보니, 이것이 어찌 꿈에서라도 저에게 견줄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삼가 스스로 물러나 자리를 피하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좌하(座下)의 성실하고 충직한 풍도는 이미 익히 탄복하는 바이건만, 도리어 오늘의 서한에서는 이렇게 실정에 맞지 않고 분에 넘치는 말씀을 하십니까. 부끄럽고 송구스러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 어지러운 세상은 대국이 끝나가는 바둑판 같아서 정세를 예측하기 어렵고, 평소의 옛 벗들에게만 의지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호남의 귀퉁이와 영남의 구석에서 보잘것없는 처지로 지내면서 눈앞의 시용(時用)에 절실한 모든 환락과 근심, 크고 작은 의리를 일체 내버려 두고 묻지 않는 채 제쳐 두고 도모하지 않고 있습니다. 궁벽하게 살면서 길게 탄식할 때마다 끝없는 비통함만 절실할 뿐입니다. 존당(尊堂)의 수진운(壽辰韻 회갑 축하시)은 과연 잊고 있었습니다. 머뭇거리는 사이에 저도 모르게 문득 이렇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벗 사이에 서로를 대하는 도리이겠습니까. 대체로 이 몸은 본래 자질이 아둔하고 근년에 이르러서는 기험(崎險)이 겹겹이 닥쳐 온갖 어지러운 일이 밖에서 공격하고 갖은 근심이 안에서 들끓고 있습니다. 일상을 겪으면서 열에서 여덟, 아홉을 잊고 있다가 먼 지방에 있는 어진 덕행을 지닌 친구의 소중한 부탁도 대수롭지 않게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부끄러워 죽을 지경입니다. 별지(別紙)는, 이같이 어리석은 식견으로 어찌 감히 입을 놀리겠습니까만 이택(麗澤)의 의리주 54)로 볼 때 강론과 연마의 방도가 없을 수 없기에 이에 감히 조목마다 채워 보냅니다. 회답을 주시기 바랍니다.
주석 52)잘못을……의리
《논어》 〈태백(泰伯)〉에서 "능하면서 능하지 못한 사람에게 묻고, 풍부하면서 풍부하지 않은 사람에게 물으며, 가졌는데도 없는 것처럼 여기고, 차 있는데도 빈 것처럼 여기며, 잘못을 범해도 따지지 않는 것을, 지난날 내 친구가 실천한 바 있었다.【以能問於不能, 以多問於寡, 有若無, 實若虛, 犯而不較, 昔者吾友嘗從事於斯矣.】"라고 한 증자의 말에서 유래하였다.
주석 53)명령(榠欞) 나무
명령(冥靈)이라고도 한다. 오래 산다는 남국(南國)의 나무 이름이다. 《장자》 〈소요유(逍遙遊)〉에 "초나라 남쪽에 명령이라는 나무가 있는데, 500년을 봄으로 삼고, 500년을 가을로 삼는다.【楚之南有冥靈者, 以五百歲爲春, 五百歲爲秋.】"라고 하였다.
주석 54)이택(麗澤)의 의리
벗끼리 서로 도와 학문을 닦고 힘쓰는 것이다. 《주역》 〈태괘(兌卦)〉에 "두 개의 연못이 나란히 붙어 있는 것이 태괘이니, 군자가 이 괘를 써서 붕우 간에 학문을 강습한다.【麗澤兌. 君子以, 朋友講習.】"라고 하였다.
答趙景文【寅錫】
自分貞蟄。惟是書墨一路。爲知舊相面。而年歲以來。衰索轉甚。亦不免種種廢闕。而得罪於士友者。多矣。豈謂座下特軫不較之義。而有此先施之惠哉。感感之餘。旋愧其不足承當也。因審春幃具慶。榠欞不老。怡愉洞屬吉祥湊臻。好氣數好福力。孰謂天道之不祐仁也。窓几涔寂。硏究日深。潛昭闇章。聲光藉藉。瞻言餘風。令人馳神。義林窮獨賤命。情景可憐。至於平昔之所謂區區爲業者。亦且渙散頹落。如先天影子之茫然有無耳。滅裂之報。固其所也。而但見知舊往復。種種以讀書人期待之。後生少年。或不無一二過從有若請敎者。然此豈夢寐可況者乎。竊欲引身避却而不可得也竊惟座下直諒忠慤之風。已所稔服。而乃於今日之書。亦爲此浮實過當之語乃爾耶。愧汗悚悚。不知攸答。嗚呼。缺界殘枰風色叵測。而所可聊賴者。惟是平素知舊人而已。然而零零落落於湖之隅嶺之角。凡百歡戚。大小義理。有切於目前時用者。一切置之而不問。捨之而不講。每窮居長吁。只切不盡之悲而已。尊堂壽辰韻。果忘之矣。因仍推待之頃。不知不覺。遽至於此。此豈友朋相向之道耶。大抵此身。素以鈍溯之質。至於近歲奇險層至。而百撓攻其外千慮盪其中。日用經過。十忘八九以。至遠外賢朋珍重之托。亦不免尋常遺却。愧死愧死。別紙以若謏見。何敢容喙。而麗澤之義。不容無講磨之方。玆以逐條塡去。幸回敎之爲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