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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4
  • 서(3)(書(3))
  • 양해심【회일】에게 보냄(與梁海心【會一】)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4 / 서(3)(書(3))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04.0001.TXT.0035
양해심주 39)【회일】에게 보냄
옛날부터 위태로운 때를 만난 열사(烈士)가 어찌 한량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험난함과 괴로움을 두루 경험하기로야 누가 좌우(左右)와 같겠습니까. 소해문옥(蘇海文獄)도 이와 같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윽고 하늘이 도와서 속박에서 풀려 고향으로 돌아와 문간에 기대어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에 부합하였으니 소식을 듣고 감동하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거듭 고초를 겪은 나머지 건강이 크게 손상되지 않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위로되고 그리운 마음이 절절하여 매우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의림(義林)은 몇 년의 세월 사이에 재앙이 거듭 이르고 질병이 끊이지 않아 이에 얽매여 구차하게 지내면서 문밖을 나서지 못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이에 한 번 달려가서 문안을 여쭙는 도리를 갖추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인정과 예법이겠습니까. 부끄럽고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지금은 제집에 몸을 붙이고 있는데 숙질(宿疾)이 아직 물러나지 않아 추위를 무릅쓰고 길을 나서기에는 힘이 미치지 못합니다. 결국 한 통의 서찰로 대신하여 근래의 안부를 여쭙습니다. 바라건대 너그러이 용서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주석 39)양해심
해심(海心)은 양회일(梁會一, 1856∼1908)의 자(字)이다. 양회일의 호는 행사(杏史)이며 전라남도 화순 출신이다. 화순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키기로 하고 가산뿐만 아니라 친척의 토지까지 팔아 군자금을 조달해서 동지들을 불러 모았다. 그는 양열묵(梁烈默), 임노복 등과 더불어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고심하고 1906년 가을부터 창의를 준비하여 쌍산의소(雙山義所)를 결성해서 1907년 4월 능주(綾州), 화순(和順)을 차례로 공격하여 군아(郡衙)와 주재소(駐在所)를 점령하였다. 여세를 몰아 광주를 공격하려고 의병을 이끌고 행군하다가 판치(板峙, 현 너릿재) 전투에서 동지 5명과 함께 체포되어 지도(智島)에 유배되었고, 1907년 12월 특사로 석방되었다. 1908년에 다시 의거를 모색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장흥경찰서에 구금되어 단식 중에 절명하였다. 1990년에 건국공로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與梁海心【會一】
自古烈士遭罹危會者。何限。而其備經險苦。孰有如左右。未知蘇海文獄亦如此否。旣而自天佑之。解桎還鄕以副倚閭無窮之忘。足令聞之者動情。未審積苦之餘體度不至有大損否。切切慰戀。殊不勝堪。義林年歲之間。禍故荐仍。疾病連綿。坐此淟忍。不出戶外久矣。玆未能一者趨走。以有相省之道。此豈情禮耶。愧悚而已。今則寄身窮齋。宿疾尙不退聽。觸寒作行。力所不逮。竟不免替修一書。以問近節。幸可恕諒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