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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3
  • 서(2)(書(2))
  • 안여은【택환】에게 답함(答安汝恩【澤煥】)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3 / 서(2)(書(2))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03.0001.TXT.0032
안여은【택환】에게 답함
지난달 그믐날에 보내신 편지를 이번 달 20일 저녁에 받았으니 벗과 편지를 주고받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까이에 있는 사람도 이와 같으니 하물며 먼 곳에 있는 사람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펼쳐 읽어 본 이래 정감(情感)이 배로 더하였습니다. 아우는 사는 곳이 외지고 누추하여 이전에 종유(從遊)하던 이들과 까마득히 서로 소식을 주고받지 못하여 외롭고 쓸쓸한 회포가 매번 마음에 절실합니다. 오직 노형(老兄)만이 저를 비루하게 여기지 않고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매번 간절한 정의(情意)를 담아 권면과 일깨움을 아끼지 않으시니 제게 얼마나 다행이겠습니까. 그러나 달 전에 주고받은 편지에서는 충고와 책임에 관한 말이 이전과 달랐습니다. 보내주신 편지를 읽어보니 곧 감히 억지로 책문하지는 못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노형이 저를 사랑하는 것은 이처럼 지극하건만 말씀은 이처럼 지나치신지요. 우리 두 사람이 적막한 물가주 77)에서 상종(相從)하면서도 정을 다하지 못한다면 또 어떤 사람이 나의 실수를 책망하고 나의 잘못을 보완하여 새롭게 떨쳐 일어나는 단계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까. 대체로 교제는 얕으면서 말만 심오한 것은 군자에게 부끄러움입니다. 하물며 교제가 깊건만 말이 얄팍한 경우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노형께서 더욱 살펴주시기를 바랍니다. 보내주신 편지에서 "음양(陰陽)의 이치는 또한 사례를 가지고 본다."라고 하셨는데, 이것에 대해서는 말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음양의 동정(動靜)이 비록 체단(體段)과 유행(流行)은 다르더라도 그 이치가 어찌 일찍이 달랐겠습니까. '사(死)' 자를 '독(篤)' 자로 바꾸는 것이 참으로 당연합니다. '독(篤)' 자는 '사(死)' 자에 비해 진심 진력(盡心盡力)하여 죽음에 이르더라도 그만두지 않는다는 의미가 부족합니다. 또 주자(朱子)께서도 일찍이 '사공부(死功夫)' 3자를 가지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지난번 편지에서 언급한 착정(着靜)과 주정(主靜)에 관한 주장은 자연히 아주 상세하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주정(主靜)은 체용(體用)의 자연스러운 이치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고 착정(着靜)은 학자가 존심(存心)하는 방도를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알지 못하는 초학자(初學者)가 성급하게 착정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조장하고 공허한 것을 붙잡는 폐단이 있게 됩니다. 그래서 '정(靜)' 자를 가지고 말하는 것보다는 '경(敬)' 자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 정당하여 치우침이 없습니다. 주정(主靜)에 관한 주장은 초학자에게는 주경(主敬)만 못합니다. 이 때문에 주자(朱子)는 "주선생(周先生 주돈이(周敦頤))의 말씀은 물길이 사나워 배를 대기 어려운 것과 같으니 초학자에게는 주경(主敬)을 말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주자(周子 주돈이)는 주정(主靜)이라 했는데, 여기에서 '정(靜)' 자는 동정(動靜)을 다 포괄하여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물으셨습니다.
천지의 조화는 지정(至靜)하지 않으면 한곳으로 모일 수 없어 발생(發生)할 수 없고, 인심은 지정(至靜)하지 않으면 부착하는 곳이 없어 응용(應用 반응하여 작용)할 수 없습니다. 무릇 천하의 사물 가운데 어찌 체(體)가 없는 용(用)이 있으며 뿌리가 없는 가지가 있겠습니까. 체(體)가 수립된 다음에야 용(用)이 작용할 수 있으며 뿌리가 단단한 다음에야 가지가 뻗어나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이치입니다. 이 때문에 명도(明道 정호(程顥)), 연평(延平 이동(李侗)) 등 여러 선생께서 사람을 가르칠 때 정좌(靜坐)를 우선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주자도 역시 "모름지기 정좌를 해야 비로소 수렴(收斂)할 수 있다. 또 정(靜)이 주(主)이고 동(動)은 객(客)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염옹(濂翁 주돈이)이 말하는 주정(主靜)도 이런 뜻이건만, 도리어 동(動)과 대비시키셨습니다. '정(靜)'은 동정(動靜)을 포괄하는 정(靜)이 아닙니다. 만약 동정(動靜)을 포괄하는 정(靜)을 말한다면 정이후능정(定而後能靜)주 78)의 정(靜)과 무욕고정(無欲故靜)주 79)의 정(靜)이 그것입니다.
끝에 덧붙인 종덕(種德)주 80)에 관한 견해는 매우 훌륭합니다. 농인(農人)은 전지(田地)를 소유한 다음에야 비로소 밭을 갈고 수확하는 공을 이루게 되고 학자는 심지(心地)가 안정된 다음에야 무한한 도리(道理)를 궁구하고 무한한 사업(事業)을 할 수 있습니다. 선유(先儒)가 말씀하신 주정(主靜)과 주경(主敬)의 학설은 사인(斯人)이 먼저 심지를 안정시키는 요체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다만 보내신 편지에서 "백세(百世) 뒤에 반드시 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말은 지나친 듯합니다. 실심(實心)으로 실천할 수 있다면 하루가 지나면 저절로 하루의 효과를 볼 수 있고 한 달이 지나면 저절로 한 달의 효과를 볼 수 있으며, 한 해가 지나면 저절로 한 해의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어찌하여 꼭 멀리 백세 이후를 기약하겠습니까. 사람들이 쉬운 것을 하고 어려운 것을 하지 않는 이유가 또한 어찌하여 단지 이 때문이겠습니까. 무릇 사도(斯道)는 평담 순실(平淡純實)하여 사람의 이목을 잘못되게 만드는 성색 취미(聲色臭味)가 없으며 사람의 심술(心術)을 움직이는 성리 위세(聲利勢威)가 없으며 사람의 의지를 미혹시키는 신기 괴려(新奇怪麗)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가 일깨우고 형이 면려하여 입과 귀에 익숙한 것은 단지 문사(文辭)와 공리(功利)에 관한 방도일 뿐입니다. 비록 징험할 수 있는 성현(聖賢)의 말이 있더라도 저들이 평소에 존숭(尊崇)하고 향모(向慕)하던 것을 갑작스럽게 버리고 마음을 고쳐먹어 머리를 숙여 적막하고 먼지 가득한 서책에 마음과 힘을 다하려고 하겠습니까. 재질(才質)이 아름다운 자가 많지 않은 것이 아니건만 평생토록 그럭저럭 한결같이 똑같은 길로 돌아가고 있으니 참으로 통한스럽습니다.
보낸 편지에서 말씀하신 "정(靜) 안에도 동(動)의 뜻이 있다."라는 말은 참으로 합당합니다. 드러나는 것으로 말하자면 음양(陰陽)은 자리가 같지 않고 동정(動靜)은 시기가 같지 않습니다. 감추어진 것으로 말하자면 동정과 음양의 이치가 이미 그 안에 두루 갖추어져 있습니다. 미발(未發)했을 때 환하고 어둡지 않아 지각이 모두 갖추어진 것은 음중(陰中)의 양(陽)이고 정중(靜中)의 동(動)이며, 이발(已發)했을 때 등급이 나뉘어 어긋나지 않고 각각 머무는 곳이 있는 것주 81)은 양중(陽中)의 음(陰)이고 동중(動中)의 정(靜)입니다.
주석 77)적막한 물가
은자의 거처를 말한다. 한유(韓愈)의 〈답최입지서(答崔立之書)〉에 "만약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넓고 한적한 들판에서 밭을 갈고, 적막한 물가에서 낚시질하면 된다.【若都不可得, 猶將耕於寬閒之野, 釣於寂寞之濱.】"라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주석 78)정이후능정(定而後能靜)
《대학장구(大學章句)》 경 1장에 "머물 곳을 안 뒤에야 안정을 취하게 되고, 안정을 취한 뒤에야 마음이 고요해지고, 마음이 고요해진 뒤에야 외물에 동요되지 않을 수 있다."라는 말이 보인다.
주석 79)무욕고정(無欲故靜)
주렴계(周濂溪)는 그의 《태극도설(太極圖說)》에서 "성인은 중정인의(中正仁義)로써 표준을 정(定)하고 정을 주로 하여 인극을 세운다.【主靜立人極.】"라고 하고, 정(靜) 자 밑에 "욕심이 없으니 정하다.【無欲故靜.】"라고 자주(自註)하였다.
주석 80)종덕(種德)
사람들에게 널리 은덕을 베푸는 것을 뜻한다. 《서경》 〈대우모(大禹謨)〉에 순(舜) 임금이 우(禹)에게 왕위를 선위하려고 하자, 우가 말하기를 "저의 덕은 임무를 감당하지 못하여 백성들이 귀의하지 않거니와, 고요는 힘써 행하여 덕을 펴서 덕이 마침내 아래로 백성들에게 내려져 백성들이 그리워하니, 황제께서는 생각하소서."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온 말이다.
주석 81)미발(未發)했을 …… 것
《대학장구》 제1장의 소주에 있는 것으로 "허령하고 어둡지 않은 것은 '명'이고, 뭇 이치를 갖추고 있고 만사에 응하는 것은 '덕'이다. 뭇 이치를 갖추고 있음은 덕의 전체로 발하지 않은 상태이고, 만사에 응함은 덕의 대용으로 이미 발한 상태이니, 만사에 응함은 바로 뭇 이치를 갖추고 있는 것의 작용 행위이다. 발하지 않으면 밝아서 어둡지 않고, 이미 발하였으면 품절하여 어긋나지 않는 것이 이른바 '명덕'이다.【虛靈不昧, 明也; 具衆理應萬事, 德也. 具衆理者, 德之全體未發者也; 應萬事者, 德之大用已發者也. 所以應萬事者, 卽其具衆理者之所爲也. 未發則炯然不昧, 已發則品節不差, 所謂明德也.】"라고 하였다.
答安汝恩【澤煥】
今二十日夕。獲拜前月晦日書。可知朋友往復。亦非容易事。近者如是。況遠者乎。披閱以還。情感倍增。弟所居僻陋。前日從遊之人。寥然不相問聞。孤索之懷。每切于中。惟老兄不以爲鄙。每致慇懃於書墨往復之間。勸勉引讓。無所不至。爲幸顧何如哉。然月前往復。規責之語。異於前日。及讀來示。乃有不敢强責之敎。豈老兄愛我如是其至。而其言如是其過乎。吾兩人相從於寂寞之濱。而猶不盡其情。則更有何人。責吾失補吾過。使之納之於作新之地哉。夫交淺言深。君子恥之。況交深而言淺乎。願老兄加察焉。來喩以爲陰陽之理。亦以例看。此無可言。陰陽動靜。雖有體段流行之殊。其理則何嘗有異。死字改以篤字。固當然。篤字比死字。少盡心盡力抵死不已之意。且朱子嘗以此死功夫三字爲言矣。但前書着靜主靜之說。自有所未能消詳者。主靜以體用自然之理言。着靜以學者存心之方言。然若使初學不知者。遽欲着靜。則必有助長捉空之獘。故說靜字。不如說敬字之爲正當而無偏也。主靜之說。在初學。不如主敬。是以朱子曰。周先生語。急難湊泊。初學不如說主敬。未知如何
周子曰主靜。此靜字非兼包動靜而言歟。
天地之化。非至靜。則不能翕聚。而發生不得。人之心非至靜。則無所湊泊。而應用不得。凡天下之物。豈有無體之用。無根之枝哉。體立而後。用有以行。根固而後。枝有以達。此自然之理也。是故明道延平諸先生敎人。未嘗不以靜坐爲先。而朱子亦曰。須是靜坐。方能收斂又靜爲主。動爲客。然則濂翁所謂主靜。亦是此意。而乃與動對之。靜非包動靜之靜。若言包動靜之靜。則定而後能靜之靜。及無欲故靜之靜。是也
尾附種德之說。甚佳。農人得田地然後。方有耕耘收獲之功。學者定心地然後。窮得無限道理。做得無限事業。先儒所謂主靜主敬之說。莫非爲斯人先定心地之要也。但來喩所謂。百世之下。必期其效。此語似涉過當。若能實心行之。則一日自可見一日之效。一月自可見一月之效。一歲自可見一歲之效。何必遠期百歲之下哉。人之爲其易而不爲其難者。亦豈但此故也。夫斯道也。平淡純實。無聲色臭味之可以誤人耳目。無聲利勢威之可以動人心術。無新奇怪麗之可以惑人志意。則父詔兄勉。熟口慣耳者。只是文辭功利之術也。雖有聖賢言語可以證嚮者。彼肯遽然捨其平生之所尊尙向慕者。而革心屈首。以從事於寥寥塵編之間哉。才良質美非不多矣。而悠悠百年。同歸一轍誠可痛恨。
來喩靜中亦有動之意者。固當。自其著者而言。則陰陽不同位。動靜不同時自其微者而言。則動靜陰陽之理。已悉具於其中。方其未發。而瑩然不昧知覺都具者。陰中之陽靜中之動也。方其已發。而品節不差各有攸止者。陽中之陰動中之靜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