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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3
  • 서(2)(書(2))
  • 유성존【기일】에게 보냄(與柳聖存【基一】)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3 / 서(2)(書(2))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03.0001.TXT.0019
유성존주 58)【기일】에게 보냄
북풍에 내리는 눈이 어찌 이리도 온 세상에 가득합니까. 곤궁하게 사방을 떠돌며 천신만고를 겪는다는 말이 귓전에 종종 들리지 않은 적이 없건만 서쪽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없어 좋은 말로 위로하려고 한 지 오래였으니 종이를 앞에 두고 생각이 치닫자니 애타는 심정을 어찌 가누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남극(南極)에 노인성(老人星)이 있어 장수를 누리고 강녕(康寧)하시며 기쁜 얼굴빛으로 정성스럽게 살피는 효성이 끊임없이 생겨나리니 비록 기수(氣數)가 뒤죽박죽 어수선한 날일지라도 길상(吉祥)에 감응하여 반드시 옥 술잔에 담긴 울창주(鬱鬯酒)를 누릴 것입니다. 의림(義林)은 부모를 잃고 형제도 없어 의지할 곳 없이 외로운 처지입니다. 작년 가을에는 또 외아들마저 잃었으니 늘그막에 곤궁하고 외롭기가 또 형용하기조차 매우 어렵습니다. 그저 어린 손자 둘이 눈앞에서 자라는 것이 그럭저럭 나를 지탱하는 바탕일 뿐입니다. 아, 오늘의 화란은 누가 그 발단이 되었습니까. 터럭만큼의 차이로부터 점점 참모습에서 벗어나 겉모습은 올바르지만 속이 그릇되었고 겉으로는 선량(善良)하지만 안으로는 사악(邪惡)하여 사사로운 탐욕을 채우는 자가 세상에 가득합니다. 그러나 이들을 물리치고자 한다면 반드시 갑자기 이기지도 못하고 화만 당하게 되며, 물리치지 않으면 정도(正道)가 매몰되어 사람이 장차 하나같이 악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지사(志士)와 인인(仁人)이 여기에 이르러 어찌하겠습니까. 《역(易)》에 이르기를, "거친 것을 포용해 주고, 황하(黃河)를 맨몸으로 건너는 용맹을 발휘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거친 것을 포용해 주는 도량이 아니라면 이른바 황하를 건너는 것은 거칠고 조급하게 화를 내는 사사로움일 뿐입니다. 어떻게 마음을 감동케 하여 정도로 돌아오기를 기대하겠습니까. 대체도 옛날부터 신민(新民)의 도리 가운데 백성이 감동하여 정도로 들어가게 하는 것은 그 효과가 깊지만, 두려워서 혁파하게 하는 것은 그 효과가 작습니다. 하물며 우리의 문정(門庭) 안과 종유(遊從)하는 곳에서 간혹 흠이 되는 말 한마디, 잘못된 일 하나가 있다면 더욱 용납하고 받아들이며 조용히 경계하여 함께 돌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지나치게 목소리를 높이고 성급하게 배척하여 문정(門庭)을 세우는 것은 결코 해서는 안 됩니다. 저 오늘날 동서남북으로 숨겨져 있는 화의 기미를 어찌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정맥(正脈)은 실로 벽계 선생(檗溪先生)주 59)에 의지하여 땅에 떨어지지 않았고 좌하(座下)께서는 또 애초에 벽계 선생의 적전(嫡傳)이시니 사문(斯文)과 세도(世道)에 대한 책임은 참으로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앞뒤로 수십 년 동안 음양(陰陽), 선악(善惡), 화이(華夷), 인수(人獸)에 관한 모든 분별에 대해서 눈을 부릅뜨고 담을 크게 펼쳐 큰 목소리로 외치지 않은 적이 없어 스스로 몸이 위기에 처하는 데 이르렀지만, 죽음을 무릅쓰고 그 역할을 담당하는 것을 조금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향배(向背)와 거취(去就)의 분별을 알아 급작스럽게 쇠락하지 않게 하는 것, 이것이 제가 집사(執事)에게 평소에 일면식(一面識)도 없으면서 간절하게 사모하는 마음이 변하지 않는 정분을 맺은 벗과 같을 뿐만이 아닌 이유입니다. 그러나 사우(士友)들이 오가는 때 삼가 1, 2가지 일을 듣고서 계책이 지나치다는 염려를 이기지 못하여 감히 이렇게 언급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동기(同氣)가 담장 안에서 싸우면 업신여김을 막아내기가 어렵고, 두 사람이 한마음이 되면 쇠붙이를 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또한 척사위정(斥邪衛正)의 급선무입니다. 평소에 의아스럽게 여겨 우러러 여쭈어야 하는 일이 어찌 한도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심부름꾼을 번갈아 보내더라도 끝낼 수 있는 일이 아니고 한 자 길이 서찰로 다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두루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주석 58)유성존(柳聖存)
성존은 유기일(柳基一, 1845~1904)의 자이다. 본관은 문화(文化), 호는 용계(龍溪)ㆍ용서(龍西)이다. 경기도 포천 출신이며, 조선 말기 학자이자 위정척사 운동가이다. 부친은 동지돈녕부사 문녕군(文寧君) 유병철(柳秉喆)이며,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주석 59)벽계 선생(檗溪先生)
벽계는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에 있는 마을로, 벽계 선생은 이곳에서 태어난 이항로(李恒老, 1792~1868)를 가리킨다. 이항로의 초명은 광로(光老)이고, 자는 이술(而述)이며, 호는 화서(華西)이다. 본관은 벽진(碧珍)이다. 1808년(순조8) 한성부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이후로는 과거를 포기한 채 향리에서 강학하여 최익현, 김평묵(金平默), 유중교(柳重敎) 등을 길렀다. 동부승지, 공조 참판 등을 지냈다. 호남의 기정진(奇正鎭), 영남의 이진상(李震相)과 함께 조선 말기 주리철학의 3대가로 꼽힌다. 존왕양이(尊王壤夷)의 춘추대의(春秋大義)를 강조함으로써, 위정척사론의 사상적 기초를 제공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저서로는 《화서집》, 《주자대전차의집보(朱子大全箚疑輯補)》 등이 있다.
與柳聖存【基一】
北風雨雪。此何漫漫。顚沛流離。千辛萬苦。未嘗不種種於耳畔。而無人西歸。懷之以音久矣。臨紙馳想。曷任耿耿。伏惟南極有星。壽祿康寧。怡愉洞屬。生生烏已者。雖在氣數顚倒之日。而所以感召休祥。必有瑟瓚黃流之享。義林孤露終鮮。煢煢靡賴。至於昨秋。又折獨子。晩暮窮獨。又極難狀。只有稚孫二兒。藐藐在眼前。聊作支吾地耳。鳴乎。今日之禍。其作俑者誰也。毫釐之差。駸駸離眞。外是而內非。陽善而陰邪。以隮其貪欲之私者滔滔焉。然苟欲闢之則未必遽勝。而適以取禍。不之闢焉。則正道沈晦。而人將胥溺。志士仁人。至此奈何。易曰包荒。用憑河。夫非包荒之量。則所謂憑河者。不過爲暴戾狷忿之私而已。尙何望感其心而反於正哉。大抵自古新民之道。使之感而入者。其功深。使之畏而革者。其功淺。况在我門庭之內。遊從之地。而或有一言之疵。一事之失。尤宜含容包納從容規戒。使之爛熳同歸。切不可太露聲氣。遽加排擯。以立門庭也。彼東西南北爲今日伏線之禍者。豈不可戒乎。今日程朱正脈實賴檗溪先生。有不墜於地。而惟座下。又未始非其嫡傳。則斯文世道之責。固不可委之他人也。是以前後數十年間。凡於陰陽淑慝華夷人獸之分。無不明目張膽大聲長號。至於身觸危機。而所以抵死擔當者。不少已焉。使人人知有向背去就之分。而不至遽爾淪胥。此愚於執事無一面之雅。而區區慕悅。不啻爲金石之契也。但於士友之往還。竊聞有一二事。而不自勝其過計之慮。敢此及之。未知以爲何如。同氣鬩墻。難以禦侮。二人同心。可以斷金。此亦斥邪衛正之先務也。平日疑菀所可仰質者。何限。而非更僕可旣。非盈尺可罄。統惟照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