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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3
  • 서(2)(書(2))
  • 기회일【우만】에게 보냄(與奇會一【宇萬】)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3 / 서(2)(書(2))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03.0001.TXT.0013
기회일주 35)【우만】에게 보냄
늦봄에 복중(服中)의 체후주 36)가 우위(友衛)하시다니 위로되고 그리운 마음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장례를 치른 뒤 우제(虞祭)주 37)와 부제(祔祭)주 38), 그리고 졸곡(卒哭)주 39)이 차례대로 지나갔습니다. 아, 우리 선생께서 세상에 계시지 않은 세월이 어느덧 지금에 이르렀습니까. 화창한 바람과 밝은 달주 40) 같은 모슷ㅂ은 하루하루 멀어지고 면봉산(面凰山)의 새 무덤에는 이미 풀빛이 푸르릅니다. 애처롭게 남아 있는 이 목숨은 어리석기만 하니 누구에게 의지하겠습니까. 아우는 정성이 깊지 못하고 형편에 구애받아 움막을 짓고 궤연을 모시지주 41) 못하고 급하게 되돌아와 내 집에서 편안히 지내고 있으니 이것이 한결같이 섬기는 도리주 42)이겠습니까. 아, 선생의 바람을 저버릴 수 없고, 선생의 도를 실추할 수 없습니다. 지금이 어찌 우리가 독실하게 힘을 다해야 하는 날이 아니겠습니까. 오직 노형(老兄)께서 더욱 스스로 힘을 쏟아 덕을 상고하려는 천하 학자들의 행렬이 선생의 뜨락에 끊이지 않게 하고 모두 선생께서 훌륭한 손자를 두셨다고 한다면 노형(老兄)께서 선생의 뜻과 공업을 이어 나가는 것이 지극할 뿐만 아니라 당일에 문하에 이르렀던 선비들 또한 흩어지지 않고 귀의하는 곳이 있게 될 것입니다. 주상이 내리는 치제(致祭)는 과연 이달 안에 거행하겠습니까? 유고(遺稿)를 간행하는 일은 성급하게 논의하기 어렵더라도 1년, 2년의 기한을 두고 사방에서 널리 구하여 수합하고 교감한 다음에 착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번 이미 완성되었을 때 거사(居士)라고 적은 것은 제 마음에 의혹이 없을 수 없었습니다. 다만 널리 듣고 예에 밝은 선비가 반드시 신중하게 살펴서 반드시 절충해야 하겠기에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물러나서 생각해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에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거사(居士)는 선생께서 평소에 자신을 낮추는 말이었으니 스승을 받드는 후학의 처지에서도 자신을 낮췄던 말로 스승을 일컫겠습니까. 유서(遺書)에 "노사 거사(蘆沙居士)로 충분하다."라고 하신 것은 주된 의미가 별도로 다른 데 있지 거사(居士)라는 두 자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 선생 같은 백세 종사(百世宗師)를 단지 거사라고 일컫는 것이 과연 온당하겠습니까. 또 명정(銘旌)주 43)에 이미 노사 선생이라고 일컬었으니 신주(神主)의 앞면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명정과 신주의 앞면이 달리 일컬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또 선유(先儒)의 논의가 있습니다. 다시 상의하여 확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주석 35)기회일
회일은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의 자이다. 기우만의 본관은 행주(幸州)이고 지금의 전라남도 화순군 출신으로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손자이며 호는 송사(松沙)이다. 저서로는 《송사집》이 있다.
주석 36)늦봄에 복중(服中)의 체후
조부인 기정진(奇正鎭)이 사망한 것이 1879년 12월이다. 여기서 말하는 늦봄은 1880년을 가리킨다.
주석 37)우제(虞祭)
체백(體魄)을 떠난 혼령을 안정시키기 위한다는 뜻에서 매장 당일부터 지내는 상제(喪祭)이다. 신분에 따라 9번, 7번, 5번, 3번 지낸다. 《의례 기석례(旣夕禮)》에 "세 번 우제(虞祭)를 지낸다.【三虞】"라고 한 것에 대해 정현(鄭玄)은 주(注)에서 "우(虞)는 상제(喪祭)의 이름이다. 우는 안정시킨다는 뜻이다. 뼈와 살은 흙으로 돌아갔으나 정기는 가지 않는 곳이 없으므로, 효자는 그 혼령이 방황하지 않도록 세 번 제사를 지내 안정시킨다. 아침에 장례를 치르고 해가 중천에 있을 때 우제를 지내는 것은 차마 하루라도 혼령이 돌아갈 곳이 없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虞, 喪祭名. 虞, 安也. 骨肉歸於土, 精氣無所不之, 孝子爲其彷徨, 三祭以安之. 朝葬, 日中而虞, 不忍一日離.】"라고 하였다.
주석 38)부제(祔祭)
졸곡제 다음날 지내는 제사의 명칭으로, 소목(昭穆)의 반차에 따라 제사 지내는 것이다. 진호(陳澔)는 《예기집설(禮記集說)》에서 "부(祔)라는 말은 덧붙인다는 뜻이다. 부제(祔祭)란 조부에게는 다른 묘(廟)로 옮겨야 함을 알리고, 이번에 죽은 이에게는 이 묘로 들어가야 함을 알리는 것이다.【祔之爲言附也. 祔祭者, 告其祖父, 以當遷他廟, 而告新死者, 以當入此廟也.】" 하였다.
주석 39)졸곡(卒哭)
우제(虞祭)를 모두 마친 다음 첫 번째 강일(剛日)에 지내는 상제(喪祭)이다. 슬픔이 줄어들어 이후로는 무시(無時)로 하던 곡을 그치고 조석곡(朝夕哭)만 하므로 졸곡제라고 한다. ≪의례 기석례(旣夕禮)≫의 "졸곡제(卒哭祭)를 지낸다.【卒哭.】"에 대해 정현(鄭玄)은 주(注)에서 "졸곡(卒哭)은 삼우제(三虞祭) 뒤에 지내는 제사 명칭이다. 처음에는 조석곡을 하는 사이라도 슬픔이 밀려오면 곡을 하지만, 이 제사를 지내고 난 후에는 그치고 조석곡만 할 뿐이다.【卒哭, 三虞之後祭名. 始朝夕之間, 哀至則哭, 至此祭, 止也, 朝夕哭而已.】"라고 하였다.
주석 40)화창한……밝은 달
황정견(黃庭堅)이 《산곡집(山谷集)》에서 주돈이(周敦頤)를 두고 "주무숙은 속이 시원스러워 비가 갠 뒤의 화창한 바람이나 밝은 달과 같다.【胸中灑落, 如光風霽月.】"라고 한 데서 나온 말로 인품의 뛰어남에 대한 비유이다.
주석 41)움막을……모시지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공자께서 돌아가시자 3년이 지난 다음 문인들이 짐을 챙겨 돌아갔지만, 자공(子貢)은 다시 돌아와 묘 마당에 집을 짓고서 홀로 3년을 거처한 다음에 돌아갔다."라고 하였다.
주석 42)한결같이 섬기는 도리
부모와 임금, 그리고 스승은 섬기기를 한결같이 한다는 말이다. 진(晉)나라 대부 난공자(欒共子)의 말 가운데 "백성은 부모, 임금, 스승 셋의 은혜로 살아가니 섬기기를 한결같이 한다.【民生於三, 事之如一.】"는 것에서 유래하였다. 《國語 晉語》
주석 43)명정(銘旌)
생전에 사용하던 깃발이나 따로 마련한 비단 또는 베에 죽은 사람의 관직, 성씨 등 호칭을 써서 표시한 상례(喪禮)의 기물이다. 명(銘) 또는 명정(明旌)이라고도 한다. 《가례 상례 입명정(立銘旌)》에 "강색(絳色) 비단으로 명정(銘旌)을 만든다. 너비는 온폭이고, 3품 이상은 9자, 5품 이하는 8자, 6품 이하는 7자이다. '모관모공지구(某官某公之柩)'라고 쓰고, 관직이 없으면 살아 있을 때의 호칭을 따른다. 대나무로 깃대를 만들되 명정의 길이만큼 하여 영좌의 오른쪽에 기대 놓는다.【以絳帛爲銘旌. 廣終幅, 三品以上九尺, 五品以下八尺, 六品以下七尺. 書曰某官某公之柩, 無官即隨其生時所稱. 以竹爲杠, 如其長, 倚於靈座之右.】"라고 하였다.
與奇會一【宇萬】
春暮服體友衛。慰慕無任。襄奉之餘。虞祔卒哭。次第經過。鳴乎。我先生不在世者。歲月已至此耶。光風霽月。日遠一日。而凰山新阡。草色已靑矣。哀此餘生。蠢蠢奚依。弟誠淺勢拘。未得築場侍几。而遽然退歸。燕處私室。此其事一之道耶。鳴乎先生之望。不可負也。先生之道。不可墜也。此豈非吾輩慥慥盡力之日耶。惟老兄益加自勵。使四方學者考德之行。不絶於先生之庭。而皆曰先生有孫。則非但老兄之所以繼述者。至矣。而當日及門之士。亦將不至渙散。而有所依歸者矣。自上致祭。果爲月內行之耶。遺稿登刊。雖難遽議。限以一年二年。廣求四方收聚校勘然後。可以下手矣向於旣成時。書以居士者。於愚意不能無疑。但博聞長禮之士。極其愼審。必有所折衷者。而不敢開喙。退而思之。終始未瑩。夫居士者。先生平日所自謙者。則後學宗師之地。亦以自謙者稱之乎。遺書有云蘆沙居士足矣者。其主意。別有所在。而不在居士二字矣。以我先生百世宗師。只稱居士者。果為穩當耶。且銘旌旣稱蘆沙先生。則粉面亦當如之。銘旌粉面。不可二稱者。又有先儒之論矣。更加商確。如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