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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3
  • 서(2)(書(2))
  • 정후윤에게 보냄(與鄭厚允)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3 / 서(2)(書(2))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03.0001.TXT.0009
정후윤에게 보냄
영남과 호남은 동떨어져 있어 인편이 없습니다. 더구나 시상(時象)은 헤아릴 수 없고 도로가 막혔습니다. 세간의 일이 쇠락하고 종유하는 사람들이 세상을 떠남이 이와 같단 말입니까. 문을 닫은 채 병으로 신음함에 다만 한없는 회포가 밀려오니, 마치 늙은 누에 뱃속의 실처럼 쌓이고 또 쌓여 답답할 따름입니다. 지난번에 함안(咸安) 박군(朴君) 편에 인편이 급하여 겨우 몇 글자를 적어 보냈는데 받아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논변한 전변(田辨)은 과연 너무나 소략합니다. 형이 분별한 것에 의지하여 대략 수정하여 조만간에 나아가 질정할 계획입니다. 삼가 형이 분별한 것을 보니, 인용한 것이 매우 넓고 헤아린 것이 매우 합당합니다. 그 말은 조리가 있고 뜻은 엄밀하여 사문(斯文)의 우익(羽翼)이 되고 후학의 사표가 될 수 있으니, 비단 한쪽 사람만 거울삼아야 할 뿐만이 아닙니다. 저는 쓸쓸히 홀로 지내는 나머지에 입으로는 강론하는 것이 없고 귀로는 경계하는 말을 듣지 못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하지만 크게 강론하거나 크게 경계하는 말을 집을 나가지 않고 여기에서 누릴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비록 자리를 함께하는 때라도 곡진하고 섬세함은 필시 이와 같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그 가운데 소소하게 흐릿한 곳이 없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대략 아뢰겠습니다. 대저 '심(心)' 자의 본래 면모는 영(靈)과 이(理)를 합하여 이름을 얻은 것입니다. 장자(張子 장재(張載)가 이른바 "성과 지각을 합해서 심이라는 명칭이 있게 되었다.[合性與知覺 有心之名]"라고 한 것이 바로 이 뜻입니다. 그러나 심(心)을 영(靈)이라고 하더라도 실로 불가하지 않고, 심을 이(理)라고 하더라도 불가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신령한 바는 이(理)에 있고 중요한 바도 이에 있으니, 형이 이른바 성정 밖에는 더 이상 달리 심이 없다는 것과 영이 도움이 된다는 등의 말은 모두 지나친 의론이 아니고, 제가 종전에 이것이 지나친 의론이라고 의심한 것이 바로 참으로 지나친 의론입니다. 그러나 '심(心)'과 '성(性)' 자를 가지고 대거(對擧)하여 말하면 또한 분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공자(孔子)가 이른바 "마음에 하고자 하는 바를 좇아도 저절로 법도를 넘지 않았다.[從心所欲 不踰矩]"라고 한 말, "안회는 그 마음이 인을 어기지 않았다.[回也 不違仁]"라고 한 말, "사람이 도를 크게 할 수 있다.[人能弘道]"라고 한 말과 장자(張子)가 이른바 "심은 성을 검속할 수 있지만 성은 심을 검속할 줄 모른다.[心能檢性 性不知檢其心]"라고 한 말과 주자가 이른바 "허령한 것이 심이고 성실한 것이 성이다.[靈底是心 實底是性]"라고 한 말은, 이는 대거하여 말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심(心)' 자는 오로지 이(理)로 간주해서는 안 될 듯하니, 허령한 뜻이 많은 듯합니다. 이미 법도를 넘지 않고 인을 어기지 않았다고 말하였으니, 넘지 않고 어기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반드시 물(物)이 있어야 합니다. 심과 이는 하나여서 혼연히 간격이 없으니, 여기에서 법도를 넘지 않는 것이 신묘함이 됨을 알 수 있고, 기가 그 법도를 따라 오래 하여도 잃어버리지 않으니, 여기에서 인을 어기지 않는 것이 공이 됨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넘지 않고 어기지 않는 것을 뭉뚱그려 이(理)라고 한다면 순치(馴致)하고 순숙(純熟)한 공을 볼 수 없고, 넘지 않고 어기지 않는 것은 굳이 성현이 된 뒤에 가능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넘지 않고 어기지 않는 것은 두 물건이 상대한 이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한 물건일 뿐이라면 어찌 어기지 않고 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형은 지(知)로써 시작하고 예(禮)로써 지키는 것을 가지고 이(理)로써 이(理)를 갖추고, 이로써 이를 오묘하게 한다는 증거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지로써 시작한다.[知以始之]"의 '이(以)'와 "예로써 지킨다.[禮以守之]"의 '이(以)'는 이것이 무슨 물건입니까. 게다가 "이로써 이를 갖춘다.[以理具理]"의 '이(以)'와 "이로써 이를 오묘하게 한다.[以理妙理]"의 '이(以)'는 또 무슨 물건입니까. 만약 이러한 '이(以)' 자를 뭉뚱그려 이(理)라고 한다면 이(理)에 대해서 허탄하다는 비난이 없겠습니까. "사람이 도를 넓힐 수 있다.[人能弘道]"의 '능(能)'과 "마음은 성을 단속할 수 있다.[心能檢性]"의 '능(能)'은 또한 전적으로 이(理)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이와 영을 합한 뒤에 바야흐로 일신의 주재가 되니 영이 아니면 주재할 수 없고 이가 아니면 주재할 대상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이 되는 소이와 심이 심이 되는 소이는, 이 이(理)때문이니, 심이 주재하고 이가 주재하는 소이입니다. 이처럼 주장한다면 저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또 이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될 듯합니다. 형께서는 "다만 이것은 한 이(理)인데 주재하여 항상 정해진 것은 심이고, 다양하게 드러나는 것은 성(性)이다."라고 말하였으니, 이는 그 뜻이 허령이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 아니지만 그 주장의 귀착점은 한쪽으로 치우침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한쪽 사람은 다만 심이 기가 되는 것만 알아서 심이 인을 어기지 않고 심이 성을 단속할 수 있다는 설을 인용하여 주기(主氣)의 증거로 삼으니, 실로 말할 것이 없습니다. 만약 전적으로 이(理)라고 인식할 수 없는 곳에서 또한 전적으로 이(理)라고 인식한다면 본문의 뜻을 잃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 게다가 신명(神明)은 전적으로 이라고 할 수 없으니, 주자 문인이 신명을 물로 삼은 것에 대해서 주자가 그렇지 않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대학(大學)》, 《맹자(孟子)》의 주(註)에 모두 허령과 신명으로 뭇 이치를 갖추고 온갖 일에 응한다고 하였으니,주 23) 여기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대저 정상(精爽), 허령(虛靈), 신명(神明)은 다만 한 가지 일일 뿐이고 신(神)은 다만 그 묘처(妙處)입니다. 일심(一心) 내에 어찌 정상이 있고 또 허령이 있으며, 또 신명이 있고, 또 신(神)이 있겠습니까. 형이 이른바 허령은 신명의 정상(情狀)이라고 한 것이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이 이러하니, 이렇게 한가하게 말해선 안 되지만 마음에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면 멈출 수 없으니, 형은 합당한 때가 아니라고 배척하지 말고 상세하게 가르쳐 주어 몽매함을 깨우쳐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실낱같은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지극의 의론을 듣는 것이 또한 저의 바람입니다.
주석 23)대학(大學)……하였으니
《대학장구》 경 1장의 '재명명덕(在明明德)'에 대한 집주에 "명덕이라는 것은 사람이 하늘로부터 받은 것으로서, 허령불매(虛靈不昧)하여 중리(衆理)를 갖추고 만사(萬事)에 응하는 것이다." 하였고, 《맹자》 〈진심 상(盡心上)〉 제1장의 집주에 "심(心)이라는 것은 사람의 신명(神明)이니, 중리를 갖추고 만사에 응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與鄭厚允
嶺湖厓角。便禠落落。況時衆區測。途路阻搪。人事之衰替。游從之零散。如此乎。杜門吟病。惟有無窮之懷。如老蠶腹中之絲。積之又積而已。向於咸安朴君便。便急僅付數字。未知人照耶。弟所辨田辨。果疎略甚矣。依倣兄辨略加修潤。爲早晩就正計耳。竊覵兄辨。其援引甚博。稱停甚當。其辭條暢。其義嚴密。足以爲斯文之羽翼。後學之準的。非但爲一邊之人所當鑑也。弟離索之餘。口絶講討。耳絶規警。久矣。誰知大講討大規警。不出戶而得之於此耶。雖有合席之日。其委曲纖悉。想必不能如是也。但於其中。不能無小小未瑩。請略陳之。大抵心字本來面目。合靈與理而得名者也。張子所謂合性與知覺。有心之名。卽此意也。然喚心爲靈。固無不可。喚心爲理。亦無不可。況所靈在理。所重在理。則兄所謂性情之外。更別無心及靈爲資助等說。皆非過論。而弟之從前疑其爲過論者。及眞過論也。然把心性字。對擧而言。則亦不容無分別。孔子所謂從心所欲不踰矩。及回也其心不遠仁。及人能弘道。張子所謂心能檢性。性不知檢其心。朱子所謂靈底是心。實底是性。此非對擧而言者耶。此等心字。似不當專作理看。而恐靈底意爲多也。旣曰不踰不違。則其能不踰不違者。必有其物。心與理一。渾然無間。此可以見不踰矩之爲妙也。氣循其軌久而不失。此可以見不違仁之爲功也。若倂其不踰不違者而謂之理。則無以見其馴致純熟之功。而不踰不違。不必聖賢而後可也。是知不踰不違。是兩物相待之名。若只一物而已。則安有不違不踰之可言哉。兄以知以始之禮以守之。爲以理具理。以理妙理之證。然其知以始之之以。禮以守之之以。是甚物耶。且以理具理之以以理妙理之以。又是甚物耶。若以此等以字。倂謂之理。則理其無懸空之嫌耶。人能弘道之能。心能檢性之能。亦不可專謂之理。必合理與靈而後。方爲此身之主宰。非靈不能主宰。非理無所主宰。然人之所以爲人。心之所以爲心。是理也。則心之主宰。及理之所以主宰也。如此立說。恐爲不偏於彼。又爲不偏於此矣。兄曰只此一理。而主宰常定者。心。發出不同者。性。此其意非不知靈之包在裏許。而其立言所歸。不其有偏乎。一邊之人。只知心之爲氣。而引心不違仁。心能檢性之說。以爲主氣之證案。固不足道。若於不可專認爲理處。亦且專認爲理。恐亦不能無失乎。本文之義也。且神明不可專謂之理。朱門人以神明爲物。朱子不以爲不然。而於大學孟子註。皆以虛靈與神明爲具衆理應萬事。此可見也。夫精爽也。虛靈也。神明也。只是一事。而神特其妙處也。一心之內。安有精爽。又有虛靈。又有神明。又有神哉。兄所謂虛靈是神明之情狀者。未知其何如也。世色如此。不宜有此等閒說話。而心有所疑。自住不得。願兄勿以非其時而斥之。詳細永及。以祛蒙蔽。如何。一縷未泯之前。得聞至論。亦區區之願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