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렉토리열람
  • 디렉토리열람
  • 유형분류
  • 1451년 이예(李芮) 연촌선생퇴휴시송별시서(烟村先生退休時送別詩序)

1451년 이예(李芮) 연촌선생퇴휴시송별시서(烟村先生退休時送別詩序)

기본정보
· 유형분류 고문서-시문류-서
· 내용분류 교육/문화-문학/저술-서
· 작성주체 발급자 : 이예(李芮)
· 작성시기 景泰二年辛未仲冬上澣 1451
· 작성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 형태사항 크기 : 32.2 X 52.6
· 소장처 현소장처 : 부안 연곡리 유절재 / 원소장처 :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정의

1451년(문종 1)에 향리로 물러나는 연촌 최덕지를 송별하며 이예가 작성한 시서.

해제
1451년(문종 1) 겨울에 향리로 물러나는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 1384~1455)를 송별하며 이예(李芮, 1419-1480)가 작성한 시서(詩序)이다. 최덕지1405년(태종 5)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관에 들어가 사관(史官), 교서관(校書館) 정자(正字), 김제군수(金堤郡守), 남원부사(南原府使) 등을 지냈다. 문종이 즉위한 후 예문관(藝文館) 직제학(直提學)에 기용했으나, 연로함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갔다. 당시 그의 나이 아직 70이 되지 않았을 때였다. 임금을 비롯하여 조정의 신료들이 그에게 머물러 있기를 바랐으나, 연촌은 전라도 영암에 존양(存養)이라고 이름 지어놓은 소당(小堂)이 있다면서 이제는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말하면서 귀향의 뜻을 분명히 하였다. 그가 귀향할 때 동료들이 시부(詩賦)를 지어 주었다. 그리고 그 송별시에 서문을 써달라고 부탁을 받고 이예가 쓴 것이 바로 이 글이다. 이예는 본관이 양성(陽城)으로, 1438년(세종 20) 진사시에 합격하고, 1441년(세종 23)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관에 들어가 군기시(軍器寺) 직장(直長), 종부시(宗簿寺) 직장(直長) 등을 거쳐 집현전(集賢殿)에 들어가 󰡔의방유취(醫方類聚)󰡕 등 의서(醫書)와 󰡔고려사(高麗史)󰡕 편찬에 참여하였다. 성종 때 외직으로 나가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이후 이조참판, 대사헌, 개성유수, 공조판서, 한성부 판윤 등을 지내고 형조판서로 있다가 죽었다. 박학(博學) 다문(多聞)으로 명망이 높았다. 시호는 문질(文質)이다. 이 글은 후대에 누군가가 원문에서 베껴 쓴 것으로 추정된다.
원문텍스트
烟村先生退休時送別詩序
▣▣▣嗣大寶之元年勵精思賢陞黜士大夫才否起今中直大夫藝文直提
▣(學)▣▣(兼春)秋館記注官
完山崔先生成均司藝又遷直藝文尋陞爲是官朝之
▣▣先生復出爲世用也越翌年冬先生上書乞退 上謂近臣曰曩於召對
見其爲人純實年未甚老予欲留之何如咸曰歸志已定必不留不如從之以
遂其志先生卽治任將歸凡朝之欲先生留者曰 聖上圖任老成今又不欲
其去先生年未滿七十願先生之留僚友之欲留先生者曰先生强且健 上
欲先生留今其去矣胡不爲留先生曰吾豈果於忘世者耶吾耄矣留則曠官
去吾分也吾弊廬在全羅靈巖郡有小堂名曰存養庶復歸臥以終吾餘齡吾
志決矣爲諸公別於是留先生不可得則咸與載酒送之江之滸且爲歌詩以
道其歸命僕爲之序僕後生也幸得陪杖屨以仰望先生之風可無一言以爲
贈昔疏廣受二子以年老辭位而去帝與太子皆賜黃金公卿故人祖送東都
門外道路觀者歎息皆曰賢豈惟當時爲然至今猶稱二子不置豈不以爵祿
爲難辭耶聖人以蹈白刃均天下幷言之則可知已今先生少年擢第選入翰
苑優遊臺府歷典州郡居官守道以古人自處待仕已無喜慍色嘗以南原府
使
高臥所謂存養堂者而若將終身大臣薦之 主上徵之先生起而應之庶
幾使巖穴之士聞而慕之願揚于王庭曾未二年引年而退視軒冕於倘來寄
功名於如浮富貴榮華皆無足動其心高風餘韻足以使貪夫廉而懦夫立噫
始焉翻然而來今也浩然而去一出一處大有關於名敎先生與古人豈異也
耶然則先生之去爲足惜而又安可止之哉 聖上之終不以留先生者亦豈
無▣▣(深意)也哉僕忝在史官敢不爲先生大書特書以爲易進難退者之戒而崇
▣▣▣扶植世敎之一助云景泰二年辛未仲冬上澣有日通德郞集賢校理
…▣▣(知製) 敎經筵檢討官兼春秋館記注官
陽城李芮可成謹叙 官刑判諡文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