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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렬공삼도통어영록(忠烈公三道統禦營錄)
- 1638년 9월 13일 관문(關文)(崇德三年九月十三日 關文)
충렬공삼도통어영록(忠烈公三道統禦營錄)
1638년 9월 13일 관문(關文)
086 병조가 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나덕헌에게 보낸 관문(關文)
: 병자호란(丙子胡亂) 기간에 공로를 세운 수군(水軍) 이득춘(李得春)을 충장위(忠壯衛)로 옮겨 소속시킨 것은 부득이한 조치이므로 그대로 시행할 것.
무인년 9월 17일 도착.
병조가 살펴서 시행할 일 때문에 보낸다.
"전에 보냈던 본조(本曹)의 관문에 의거하여 경기수사(京畿水使)가 올린 첩정(牒呈)에 이르기를,
'본영(本營) 소속 수군(水軍)의 원래 숫자가 1,076명인데, 그 안에서 난리를 겪으면서 사로잡혀가거나 살해된 숫자와 도망하여 떠돌아다는 숫자가 모두 185명이나 되고 남아있는 숫자는 891명뿐입니다. 이 숫자만으로는 수많은 전선(戰船)과 병선(兵船)의 격군(格軍)을 채우는 것조차도 절반 넘게 부족하여 한 영문의 수군이 모양새를 이루지 못하였으므로, 마지못한 상황에서 장계(狀啓)를 올려 허락을 받아 본부(本府)의 육군(陸軍)과 출무(出武) 등을 모두 현재 입방(入防)에 보태고 있습니다.주 146) 그런데도 나머지 각 처에 배정해야 할 숫자조차 여전히 부족할까 염려스럽습니다. 앞서 수군 이득춘(李得春)이 적병(賊兵)이 가득 차있는 가운데 길을 뚫고 가서 장계(狀啓)를 바친 공로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겸사복(兼司僕)에 차출하라는 첩문(帖文)을 받은 것만으로도 그 당시에 공로를 갚는 은전에 해당합니다.주 147) 그리고 대체로 수군은 육군과는 비교할 것이 아니라서, 마지못한 상황이더라도 본래의 군역(軍役)을 다른 사람으로 충원하기를 기다린 뒤에야 그의 군역을 면제해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득춘이 본조에 바친 문서에 이르기를,
「충장위(忠壯衛)로 상번(上番)할 차례를 옮겨 정하였으므로 4대조에 대한 책자를 올려보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비록 재가를 받고 윤허를 받은 문서에 의거하였더라도, 2차례의 상번만 감해주고 본래 수군의 군역을 그대로 유지할지는 본조가 참작하여 처리하는데 달려 있는 일입니다. 이러한 연유를 첩정으로 보고하니 각별히 다시 명령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첩정에 의거하여 살펴보았는데, 이 일은 예전에 교동(喬桐)의 겸사복 이득춘이 올린 정장(呈狀)에 따른 것으로, 이것은 남한산성(南漢山城)에 호종(扈從)하여 산성을 지킨 공로로 가설겸사복(加設兼司僕) 첩문을주 148) 무더기로 발급해준 것과는 비교할 일이 아니다. 애당초 원손(元孫)의 행차가 폐단 없이 나루를 건넜다고 보고하는 장계를 가지고서 적진 가운데를 뚫고 나와 전달한 공로로, 병방승지(兵房承旨)가 어전에서 아뢰어 특별히 겸사복에 제수하기까지 하였으니, 다른 많은 사람들이 세운 공로와는 차이가 있다. 따라서 이득춘이 원하는 대로주 149) 충장위로 옮겨 소속시킨 조치는 마지못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다. 전에 보냈던 공문을 모두 살펴서 시행하라."
숭덕(崇德) 3년(1638, 인조 16) 9월 13일.
▶ 어휘 해설 ◀
❶ 첩문(帖文) : 관아에서 자격의 인정, 사실이나 권리의 확인, 관직의 임명 등을 위해 발급하던 문서이다. 소과(小科)에 응시할 자격을 인정하는 조흘첩(照訖帖) 및 회시(會試)나 전시(殿試)에 직접 응시할 자격을 인정하는 직부첩(直赴帖) 등은 자격을 인정하던 첩문이다. 조운선(漕運船)이 서울로 올라오던 도중 원산(元山)과 안흥(安興)에서 점고한 뒤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발급하는 봉점첩문(逢點帖文) 등은 사실 확인을 위해 발급하던 첩문이다. 각 관사로부터 물품을 제공받을 권리 및 판상(板商)이 관재(棺材)를 매매할 권리나 삼상(蔘商)이 인삼(人蔘)을 매매할 권리 등을 증명하는 첩문은 권리를 확인해주던 첩문이다. 의금부(義禁府)의 참하 도사(參下都事), 왕자(王子)의 사부(師傅), 왕손(王孫)의 교부(敎傅), 교관(敎官), 감역관(監役官), 별검(別檢), 겸인의(兼引儀), 가인의(假引儀), 수직관(守直官), 수봉관(守奉官), 수위관(守衛官) 등의 구전관(口傳官)을 차정(差定)할 때 발급하던 첩문은 관직의 임명과 관련하여 발급하던 첩문이다.
❷ 병방승지(兵房承旨) : 승정원(承政院)의 육방(六房) 중 병방(兵房)을 담당하던 승지(承旨)를 가리킨다. 조선 시대 승정원에는 도승지(都承旨), 좌승지(左承旨), 우승지(右承旨), 좌부승지(左副承旨), 우부승지(右副承旨), 동부승지(同副承旨) 등 총 6명의 승지를 두었으며, 이들 6명의 승지가 육조(六曹) 또는 육전(六典)의 업무를 분담할 수 있도록 6개의 승지방(承旨房)을 두고 각 승지방마다 승지 1명씩을 배치하였다. 6개의 승지방이란 이방(吏房), 호방(戶房), 예방(禮房), 병방(兵房), 형방(刑房), 공방(工房)을 가리킨다. 승지를 6개의 승지방에 배정하는 방식은 먼저 승지방망단자(承旨房望單子)에 6명 승지의 직명을 열거하고 그 아래에 빈칸을 만들어서 국왕에게 올려 빈칸에 적어준 대로 배정하였다. 승지방의 배정은 순방(巡房)이 원칙이었지만, 업무의 특성이나 상피(相避)의 혐의 등이 있을 경우에는 환방(換房)하였다. 순방이란 승지의 서열에 따라 승지방을 배정하는 것으로, 도승지는 이방, 좌승지는 호방, 우승지는 예방, 좌부승지는 병방, 우부승지는 형방, 동부승지는 공방을 담당하도록 배정하는 것을 가리킨다. 환방이란 순방 등으로 배정된 승지방을 서로 바꾸어서 담당하도록 하는 것을 가리킨다.
- 주석 146)
- '021 나덕헌의 장계'와 '030 나덕헌의 첩정' 참조.
- 주석 147)
- 이득춘(李得春)의 상언(上言)과 그에 대한 처분은 '069 병조의 관문' 참조.
- 주석 148)
- 저본에는 원문 '加設' 2자가 '設加' 2자로 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
- 주석 149)
- 저본에는 원문 '願' 1자가 '頉' 1자로 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
崇德三年九月十三日 關文
戊寅九月十七日到付.
兵曹爲相考事.
"前矣行移曹關據使牒呈內, '本營所屬水軍元數一千七十六名內, 經亂擄殺、流亡, 幷多至一百八十五名, 餘存只八百九十一名叱分以. 許多戰、兵船格, 太半不足, 一營舟師, 不成模樣乙仍于, 勢不得已, 本府陸軍及出武等, 竝只狀啓, 時方添防爲乎矣. 其餘各處把定, 猶患不足爲去等. 向前水軍李得春亦, 雖有賊兵熾滿之中穿路狀啓進呈之功, 受兼司僕帖, 其時酬勞之典. 而大槪水軍段, 非如陸軍之比, 不得已待得本定之後, 可免其役是去乙. 得春呈本曹, 「忠壯衛移定番次, 四祖成冊上送.」亦爲臥乎所. 必于依啓下蒙允公事, 二當番叱分減番爲遣, 仍存本役爲乎喩, 事係本曹參酌處置是乎等以. 緣由牒報爲去乎, 各別更良行下爲只爲.'牒呈是置有亦. 相考爲乎矣, 曾因喬桐兼司僕李得春呈狀據, 此非扈從守堞加設司僕帖文混同成給之比. 當初元孫行次無弊渡津狀啓陪持, 穿由賊中得達之功, 至於兵房承旨榻前啓達, 別爲兼司僕除授, 則其與衆類有異. 依願移屬忠壯衛之擧, 勢所不已是置. 前行移, 幷以相考施行向事."
崇德三年九月十三日.
❶ 加設 : 저본에는 원문이 '設加'로 되어 있으나, 다수의 용례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
❷ 願 : 저본에는 원문이 '頉'로 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