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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렬공삼도통어영록(忠烈公三道統禦營錄)
  • 1638년 7월 20일 장계(狀啓)(崇德三年七月二十日 狀啓)

충렬공삼도통어영록(忠烈公三道統禦營錄)

자료ID HIKS_OB_F1047-01-220201.TXT.0076
1638년 7월 20일 장계(狀啓)
076 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나덕헌이 인조에게 보낸 장계(狀啓)
: 철곶첨사[鐵串僉使] 박한남(朴翰男)이 충청도 안면곶[安眠串]에 내려가서 전선(戰船)을 개삭(改槊)하고 개조할 수 있도록 비변사에서 충청수사(忠淸水使)에게 통지해줄 것.

〈피봉〉 승정원(承政院)이 개봉할 것.
"이번에 도착한 철곶첨사[鐵串僉使] 박한남(朴翰男)의 첩정(牒呈)에 이르기를,
'본진(本鎭)은 새로 설치된 곳으로 본래 전선(戰船)이 없기 때문에 전선을 제작하려고 하면 수많은 장인(匠人)에게 지급해야 할 요포(料布)와 역가(役價)를 갑자기 마련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지난 병자년(1636, 인조 14)에 처음 제작한 본진 방패선(防牌船)의 선체가 크기 때문에 충청도 안면곶[安眠串]에 내려가서 나무를 덧대 개삭(改槊)하고 전선으로 개조하여 장치해서 변란에 대비할 계획입니다. 전에도 본도(本道)의 변장(邊將)이 직접 가서 제작을 감독한 규정이 있으니, 전례대로 첨사가 직접 내려가서 제작해올 수 있도록 충청수사(忠淸水使)에게 선박의 장인(匠人)을 다수 정해주고 목재 베는 것을 금하지 말게 하라고, 비변사에 이 첩정을 첨부하여 공문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 첩정에 의거하여 위와 같은 연유를 비변사에 철곶첨사의 첩정을 첨부하여 공문을 보냈습니다. 방금 비변사의 회답 관문을 받아보니 이르기를,
'본영(本營)의 첩정에 첨부하여 올린 철곶첨사의 첩정에 이르기를,
「전선을 제작해오기 위해서 안면곶에 내려갈 계획이니 선박의 장인을 다수 정해주고 목재 베는 것을 금하지 말게 해주소서.」
라고 하였다. 그러나 첩정을 첨부해서 보내온 공문만으로는 시행할 수 없으므로 수사(水使)가 장계(狀啓)를 올려 시행하라.주 131)'
라고 하였습니다. 해당 전선을 새로 제작해야 할 일이나, 전쟁을 겪고 난 뒤로는 각 진포(鎭浦)에 입방(入防)하는 군병의 숫자가 줄어들어, 매달 입방하는 군병으로 책자에 등록된 숫자 중에서 각 차비군(差備軍)을 계산해서 빼고 나면 매달 입방하여 군역(軍役)을 수행해야 할 숫자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각각의 사람들에게서 규례대로 신포(身布)를 거두어 선박 장인 등의 요포로 계산해서 지급하는 수량이 겨우 6, 7동(同)이지만, 먼 도(道)에서 고용할 선박 장인의 요포 및 선박용 목재를 끌어내릴 군병의 역가까지 계산해보면, 전선 1척을 제작하고 장치하는데 들어가는 베와 무명이 10여 동이나 되고 공사 기간에 필요한 식량이 50여 섬입니다. 따라서 쇠잔한 진포의 재정과 인력으로는 전선을 새로 제작하고 장치할 길이 없는 상황이니, 몹시 난처한 일입니다. 철곶첨사 박한남이 보고한 내용은 어쩔 수 없는 다급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니, 묘당(廟堂)에서 모두 헤아려서 지시하게 해주소서. 차례대로 잘 아뢰어 주시기 바랍니다."
숭덕(崇德) 3년(1638, 인조 16) 7월 20일. 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신(臣) 나덕헌.
주석 131)
첩정(牒呈)은 하급 관사에서 상급 관사에게 올리는 문서로 관부 사이에 주고받는 공문서이고, 장계(狀啓)는 신하가 국왕에게 보고할 때 사용하는 상달문서(上達文書)이다. 따라서 비변사가 '첩정만으로는 시행할 수 없고 장계를 올려 시행하라.'라는 말은 비변사가 자체적으로 결정할 사안이 아니라 국왕의 재가를 받아야 할 사안이라는 의미가 된다.
崇德三年七月二十日 狀啓
承政院開拆.
"節到付鐵串僉使朴翰男牒呈內, '本鎭亦, 新設之地以, 本無戰船乙仍于, 欲造戰船, 則許多匠人供料償價, 卒備爲難. 故本鎭防牌船, 去丙子年初造體大是乎等以, 忠淸道安眠串下去, 添木改槊, 戰船以改修粧, 待變計料是乎旀. 前矣段置, 本道邊將親往監造之規, 依前例, 僉使親自下去造來次以, 忠淸水使處, 船匠多數定給, 材木勿禁事乙, 備邊司良中, 粘移爲只爲.'牒呈據, 右良緣由, 粘移備邊司爲白有如乎. 卽接備邊司回答關內, '本營牒呈粘連鐵串僉使呈內, 「戰船造來次以, 安眠串下往計料, 船匠乙, 多數定給, 材木勿禁.」事粘移叱分以, 施行不得, 狀啓施行向事.'關是白有亦. 同戰船乙, 所當新造事是白乎矣, 各浦入防之軍, 經亂之後, 其數減縮, 各朔入防軍斜付成冊之數, 各差備軍計除, 則每朔立防應役者, 其數零星是白去等. 各人等處, 依例收布, 船匠等料布計給之數, 僅至六七同, 而遠道良中雇立船匠料布及船材曳下軍役價支計, 則一戰船造作修粧容入布木, 至於十餘同, 役糧五十餘石是白去等. 殘浦物力以, 勢難新造戰船粧修之路, 事極難處是白乎所. 鐵串僉使朴翰男所報內辭緣, 迫不得已是白置, 請令廟堂竝只參商指揮爲白只爲. 詮次善啓云云."
崇德三年七月二十日. 云云, 兼統禦使臣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