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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렬공삼도통어영록(忠烈公三道統禦營錄)
- 1638년 6월 25일 관문(關文)(崇德三年六月二十五日 關文)
충렬공삼도통어영록(忠烈公三道統禦營錄)
1638년 6월 25일 관문(關文)
070 호조가 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나덕헌에게 보낸 관문(關文)
: 영종만호(永宗萬戶) 유해(柳垓)가 경기수사(京畿水使)의 분부에 따라 군량(軍糧)을 사용하였다는 증거 문서가 있으면 첨부하여 보낼 것.
호조가 살펴서 시행할 일 때문에 보낸다.
"이번에 도착한 안악군수(安岳郡守)의 첩정(牒呈)을 첨부하여 보낸 황해감사의 관문에 이르기를,
'안악군수의 첩정에 이르기를,
「이번에 도착한 호조의 관문에 의거하여 보낸 황해감사의 관문에 이르기를,
〈영종만호(永宗萬戶) 유해(柳垓)가 군량(軍糧) 9섬 9말을 빌려다 사용한 뒤에 도로 납부하지 않았다. 적지 않은 국가의 곡식을 사사로이 빌려다 사용한 것은 너무나 해괴하니, 당사자는 추고(推考)하고, 담당자들을 대부분 가두어서 징수하여 회록(會錄)하라.〉
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경기감사의 관문에 이르기를,
〈해당 유해가 황해도 안악에 거주하니 거주하고 있는 곳에서 징수하여 실어다가 납부하더라도, 당사자는 영문(營門)에서 추고하고 담당자들을 대부분 가두어서 재촉하여 영종포(永宗浦)에 실어다가 납부한 뒤에 도착 확인증을 받아 대조하라.〉
라고 하였습니다. 앞서 유해에 대해서는 해당 빌려갔던 군량 9섬 9말을 기한을 정해놓고서 징수하려고 독촉하였는데, 이번에 바친 유해의 소지(所志)에 이르기를,
〈지난 병자년(1636, 인조 14) 6월에 경기의 영종만호에 제수되어 공무를 행하던 차에, 마침 전쟁이 일어났으므로 제가 병선(兵船)을 거느리고서 교동(喬桐)에서 종군(從軍)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정축년(1637, 인조 15) 3월 1일에 영종포로 돌아오자마자 바로, 비변사의 관문에 의거하여 수사(水使)가 보내온 전령(傳令)에 이르기를,
{영종만호를 청(淸)나라에 줄 각 진포(鎭浦)의 병선 5척을 거느리고 갈 차사원(差使員)으로 차정(差定)한다.주 122)}
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본포(本浦)의 병선은 높은 해안에 매어두어 운항하여 바다로 내려갈 수 없었기 때문에 교동의 개인 선박으로 서로 바꾸어서 가지고 갔습니다. 그 뒤 해안에 매어두었던 해당 병선을 운항하여 내려가서 개인 선박의 댓가로 지급하려고 교동으로 가지고 갈 때, 격군(格軍) 5명이 운항하는 동안 먹을 양식을 마련해낼 길이 없었습니다. 마지못해 본포에 남아있던 군량으로 3명에게는 1명당 5말씩, 2명에게는 1명당 3말씩 지급하고, 도합 1섬 6말을 종군하지 않은 사람에게서 징수하여 충당하고 영종만호가 먹을 식량 등은 상번(上番)할 차례가 된 군사에게서 추수하거든 충당하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남아있던 군량을 빌려주거나 종군하지 않은 사람에게서 추수하거든 징수하거나 간에 정해달라고 번갈아가며 첩정을 올려 보고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경기수사로부터 받은 서목(書目)에 이르기를,
{큰 난리가 일어난 때에 종군하지 않은 죄는 효시(梟示)해야 할 일이지만 추수하거든 가볍게 처벌하고, 영종만호가 먹을 군량은 편리에 따라 별도로 거두어서 충당하라.}
라고 회답을 보내왔습니다. 그래서 영종만호 및 종 1명, 군관(軍官) 1명, 진무(鎭撫) 1명, 도사공(都沙工) 1명, 군기지기[軍器直] 1명 등 총 6명에게 3, 4월부터 윤4월, 5월, 6월 보름 이전까지 6말씩 요미(料米)를 지급하였습니다.주 123) 그러다가 전(前) 수사도 임기가 만료되어 체차되었고 저도 작년 6월에 체차되었는데, 그때 전 수사의 서목에 의거하여 제가 거느리고 갔던 사람들이 빌려먹었던 해당 군량을주 124) 종군하지 않은 사람에게서 마련하는 것으로 정리한 책자 및 서목을 모두 중기(重記)와 함께 장부를 마련해두었습니다. 신임 수사가 종군하지 않은 사람을 어떻게 처리할지는 모르겠으나, 빌려먹은 군량 9섬 9말을 영종만호의 이름으로 징수하려고 계획한 것은 너무나 원통합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사정을 순영(巡營)에 대신 보고하여 순영에서 낱낱이 거론하고 원문서를 첨부하여 공문을 보낼 수 있게 해주소서.〉
라고 하였습니다.」
라고 유해의 소지를 첨부하여 보내왔습니다. 소지를 첨부하여 보내온 첩정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만, 해당 유해가 애당초 수사의 분부에 따라
「영종만호 이하의 매달 급료를 받아먹은 뒤에 종군하지 않은 토착 군병에게서 추수할 때가 되면 징수하도록 하라.」
라고 분부한 공문이 있었는지를 조사한 뒤에 원문서를 첨부하여 공문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원문서를 첨부하여, 황해관찰사 겸 순찰사가 살펴서 시행할 일 때문에 보냅니다.'
라고 안악군수의 첩정을 첨부해서 보내왔다. 관문의 내용대로 각별히 조사한 뒤, 원문서를 첨부하여 황해감사에게 공문을 보낼 수 있도록 2건의 첩정을 작성해서 보고하되, 이 관문을 베껴 적은 뒤에 원본 관문을 도로 위에 올리라."
숭덕(崇德) 3년(1638, 인조 16) 6월 25일.
▶ 어휘 해설 ◀
❶ 추고(推考) : 추고의 본래 의미는 '조사하다.' 또는 '심문하다.'이다. 중종 말기에 추고가 관원에 대한 징벌의 일종으로 성립된 뒤로는 추고의 본래 의미인 '조사 심문하다.'라는 의미보다 관원에 대한 징벌의 일종을 가리키는 의미로 더 많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추고가 징계의 일종으로 성립된 이후에도 추고에는 본래의 의미인 '조사 심문하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이처럼 두 가지 의미를 가진 추고는 조선 시대 사법제도 또는 형사제도의 일종으로, 조사하는 방식에 따라서 서면 조사 방식인 발함추고(發緘推考), 출두 조사 방식인 진래추고(進來推考), 구속 수사 방식인 수금추고(囚禁推考)로 나눌 수 있다. 그중 발함추고는 조선 후기에 상시추고(常時推考), 종중추고(從重推考), 함사추고(緘辭推考), 함사종중추고(緘辭從重推考)로 분화하였다. 본문에서의 추고는 상시추고를 가리킨다.
❷ 효시(梟示) : 죄인의 머리를 장대에 높이 걸어놓고서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는 처벌을 가리킨다. 효시는 효수시중(梟首示衆)의 줄임말로, 효수(梟首)라고도 하였다. 효수는 중국 고대부터 보이기 시작하여 『사기(史記)』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배인(裵駰)은 효수의 효(梟) 자를 '나무 끝에 머리를 내거는 것을 효라고 한다.[縣首於木上曰梟]'라고 풀이하였다. 죄인을 처형하여 그 머리를 나무에 내걸거나 시체를 저자에 늘어놓는 것은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중국의 유교 경전인 『주례(周禮)』와 『논어(論語)』 등에도 이러한 형벌이 보인다.
❸ 중기(重記) : 각 관사에서 관리하는 돈과 곡물 등의 명목과 수량을 기록한 장부를 가리킨다. 관원이 교대할 때 인수인계하는 물품의 근거 자료가 되었다.
- 주석 122)
-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끝난 뒤에 청(淸)나라 장수들이 강화(江華)에 머물러둔 우리나라 선박들을 가지고 가겠다고 억지를 부리자, 각 도의 병선(兵船) 30척 및 황해도의 전선(戰船)과 병선 각 15척씩 총 60척을 주도록 하였다가 추후에 50척으로 줄였다. 이때 유해(柳垓)도 선박을 거느리고 가서 넘겨줄 차사원(差使員)으로 차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승정원일기』 인조 15년 2월 7·8·19·29일, 3월 5일.
- 주석 123)
- 저본에는 원문 '料' 1자 뒤에 '段' 1자가 더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삭제하였다.
- 주석 124)
- 저본에는 원문 '糧' 1자가 누락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崇德三年六月二十五日 關文
戶曹爲相考事.
"節到付黃海監司關粘連安岳郡守牒呈內, '「節到付戶曹關據使關內, 〈永宗萬戶柳垓, 軍糧九石九斗貸用後, 不爲還納. 不小國穀, 私自貸用, 極爲駭愕, 當身推考, 多囚次知, 生徵會錄.〉事行移爲有如乎. 京畿監司關內, 〈同柳垓亦, 黃海道安岳居生爲去乎, 所在處以, 生徵輸納事是置, 當身乙良, 營門推考, 多囚次知, 催促輸納永宗浦後, 受到付考淮向事.〉關是置有亦. 向前柳垓當爲, 同貸下軍糧九石九斗, 刻期督捧爲如乎, 節呈柳垓所志內, 〈去丙子六月分, 京畿永宗浦萬戶除授, 行公次, 適値兵亂, 矣身領兵船, 喬桐從軍爲如可. 丁丑三月初一日, 還浦卽時, 備邊司關據水使傳令內, {萬戶乙, 淸國所給各浦兵船五隻領去差使員差定.}爲有乎矣. 本浦兵船段, 高岸掛置, 不得下海乙仍于, 喬桐私船以相換持去爲旀. 其後同掛置兵船運下, 私船代給次以, 喬桐持去時, 格軍五名行糧, 出處無路. 不得已本浦遺在軍糧以, 三名段, 每五斗式, 二名段, 三斗式上下, 都合一石六斗乙, 未從軍人以徵捧充上事, 及萬戶所食等事乙, 當番軍士以待秋成充上次以, 餘在軍糧乙, 貸下爲去乃, 未從軍人以待秋成徵捧爲去乃, 岐等如牒報. 受書目內, {大亂時, 未從軍之罪, 所當梟示事是在果, 待秋成末減, 萬戶所食軍糧, 隨便別乎收捧充上.}亦回送是乎等以. 萬戶及奴子一名、軍官一、鎭撫一、都沙工一、軍器直一等六名良中, 自三、四月, 閏四月、五月、六月望前至, 每六斗式給料. 前水使段置, 瓜滿遞代, 矣身, 上年六月分, 亦爲遞任時, 前水使書目據, 同所率貸食軍糧, 未從軍人處磨鍊成冊、書目, 幷以重記置簿爲有去乙. 新水使, 未從軍人乙, 何以爲之爲喩, 貸下軍糧九石九斗乙, 萬戶名字以抄徵設計, 極爲寃悶爲良旀. 如此情由, 轉報巡營, 枚擧粘移爲只爲.〉」粘移是置有亦. 粘移內辭緣相考, 同柳垓, 當初水使分付, 萬戶以下朔料受食後, 未從軍土兵處, 待秋徵上事, 有公文爲有臥乎喩, 査覈粘移向事. 粘連, 兼巡察使爲相考事.'粘連關是置有亦. 關內辭緣, 各別査覈, 粘移次以, 兩件牒報爲乎矣, 傳書後, 元關還上使向事."
崇德三年六月二十五日.
❶ 料 : 저본에는 이 뒤에 원문 '段' 1자가 더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삭제하였다.
❷ 糧 : 저본에는 원문이 누락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