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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렬공삼도통어영록(忠烈公三道統禦營錄)
- 1637년 9월 22일 장계(狀啓)(崇德二年九月二十二日 狀啓)
충렬공삼도통어영록(忠烈公三道統禦營錄)
1637년 9월 22일 장계(狀啓)
023 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나덕헌이 인조에게 보낸 장계(狀啓)
: 철곶[鐵串]의 진보(鎭堡)를 설치하는 일이 지연되고 있으므로 비변사에서 대책을 마련하여 지시해줄 것.
〈피봉〉 승정원(承政院)이 개봉할 것.
"전에 도착한 비변사가 회계(回啓) 결과를 통지한 관문(關文) 내용을 요약하면,
'삼도통어사(三道統禦使)의 서장(書狀)에 아뢰기를,
「초지(草芝)와 제물(濟物) 두 곳의 옛 진보(鎭堡)는 철거하였으나 철곶[鐵串]의 새로운 진보는 설치되지 않아 철곶첨사[鐵串僉使]가 백성의 집에 들어가서 거처하고 있으니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는 방도가 너무나 아닙니다.」주 58)
라고 하였습니다. 경기수사(京畿水使)가 직접 순행하면서 진보를 설치할 곳의 형세를 살펴보고 상세히 주상께 보고하게 한 뒤 그에 의거하여 처리하도록 하소서.'주 59)
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비변사의 관문에 의거하여 즉시 순행하면서 살펴야 할 일이었으나, 부임한 즉시 본영(本營)의 전선(戰船),병선(兵船), 사후선(伺候船) 등을 제작하는 공사가 거창해서 이제야 일을 마쳤습니다. 더욱이 칙사(勅使)가 행차하는 시기와 겹쳐서 본부(本府)를 광주(廣州) 대신 부칙사(副勅使)를 접대할 곳으로 바꾸어 정하였으므로, 역참(驛站)의 각종 휘장(揮帳)과 기물(器物), 숙소 건물의 수리가 몹시 긴요하고 다급하여 다방면으로 애써 마련하고 밤낮없이 준비해서 연속 역참으로 실어 보내느라 거의 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해당 철곶진[鐵串鎭]을 살펴보는 일은 이달 20일에서야 신이 직접 철곶에 도착하여 철곶첨사를 데리고서 살펴보았는데, 철곶첨사가 진보를 설치할만 하다고 하였습니다. 장신(張紳)이 강화유수(江華留守)로 있을 때 전(前) 경기수사 신(臣) 신경진(申景珍)과 함께 만나 적간(擲奸)한 적이 있었는데, 주상의 결정을 받은 곳은 철곶첨사가 현재 백성의 집에 들어가서 거처하고 있는 곳이고, 이른바 진보를 설치하기에 합당하다고 한 곳은 모두 백성의 전답이었습니다.주 60) 따라서 국가에서 대가를 지급하고 매입한 뒤에야 진보를 설치할 수 있었으므로 그러한 연유를, 백성의 전답 숫자를 조목조목 열거한 책자와 함께 비변사로 올려보냈습니다. 애당초 초지와 제물 두 진포(鎭浦)를 합쳐서 하나의 진보로 설치하도록 한 사안에 대해 장신이 급히 보고한 것에 의거하여 병조가 복계(覆啓)한 문서를 살펴보았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이번에 두 옛 진포를 철거하고 새로운 진포를 설치하는 공사는 매우 중대하니 반드시 시기를 정해서 완료하도록 분부하여 재촉해서 거행한 뒤에야 추워지기 전에 공사를 완료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조정의 분부에 따라 신속히 철거하여 옮겨 설치하라고 시급히 통지하소서.'
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해당 제물과 초지 두 진포의 관아 건물을 즉시 철거하여 진보를 옮겨 설치할 철곶으로 옮겨 두었으나, 난리를 겪던 중에 해당 목재와 기와를 일부는 잃어버리고 나머지는 현재 백성의 전답에 방치해두고 있습니다. 애당초 두 진보를 철거하고 합쳐서 철곶을 만들고 호칭을 승격시켰던 일은 그럴만한 취지가 있는 것인데, 시일을 지연시키는 바람에 진보 설치할 곳을 여태까지 마무리하지 못해서 첨사가 현재 백성의 집을 빌려서 거처하고 있으니 타당치 못한 일입니다. 묘당(廟堂)에서 신속히 처리하도록 해주소서. 차례대로 잘 아뢰어 주시기 바랍니다."
숭덕(崇德) 2년(1637, 인조 15) 9월 22일.
▶ 어휘 해설 ◀
❶ 적간(擲奸) : 관원의 근무 상태나 특정 장소의 상황 등을 살펴서 문제점을 적발하는 것을 가리킨다.
- 주석 58)
- '007 나덕헌의 장계' 참조.
- 주석 59)
- '013 비변사의 관문' 참조.
- 주석 60)
- 장신(張紳)은 장유(張維)의 아우로, 인조 14년(1636, 인조 14) 3월 9일에 강화유수(江華留守)에 제수되었으나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강화를 지키지 못하고 함락당한 책임을 물어 이듬해 3월에 사사(賜死)되었다. 『승정원일기』를 비롯한 관찬사료에는 장신이 철곶[鐵串]의 설치와 관련하여 올린 장계와 비변사의 회계(回啓) 등은 보이지 않는다. 『승정원일기』 인조 6년 5월 16일, 14년 3월 9일, 15년 2월 22일, 3월 18·20일; 『인조실록』 15년 1월 22일(임술), 2월 22일(임진).
崇德二年九月二十二日 狀啓
承政院開拆.
"前矣到付備邊司回啓關內節該, '統禦使書狀內, 「草芝、濟物舊鎭旣撤, 新堡未設, 入接民家, 殊非可久之道.」 水使親爲巡歷, 審其設堡形勢, 詳細啓聞, 以憑處置向事.'回啓關是白有亦. 臣依備局移文, 卽爲看審事是白乎矣, 到任卽時, 本營戰、兵、伺候船等功役浩大, 今始畢役. 而又値勅使之行, 本府乙, 廣州代移定副天使支待是白乎等以, 站上各樣供帳·器俱、館宇修理, 萬分緊急, 多般拮据, 罔夜措置, 連續輸送站上乙仍于, 殆無暇日. 同鐵串鎭看審事乙, 今月二十日沙, 臣親到鐵串, 僉使率良遣看審, 可以爲設鎭是如. 張紳留守時, 與前水使臣申景珍眼同擲奸, 定奪處, 則僉使時方借入民家, 而所謂可合設鎭之處, 皆是民田. 自公家給價買得, 然後設鎭緣由乙, 備邊司以, 民田庫數條列成冊, 上送爲白在果. 考諸當初草芝、濟物兩浦以爲一鎭張紳馳報據該曹覆啓公事節該, '今此兩浦撤舊營新之役, 極爲重大, 必須刻日分付催促擧行, 然後未凍之前, 勢可完役. 依朝廷分付, 急速撤毁移設之意, 星火知委.'亦爲白有等以. 同濟物、草芝兩浦公廨乙, 卽時撤毁, 移置於鐵串移鎭處, 亂離中, 同材瓦乙, 除除良散失, 方爲棄置民田爲白有臥乎所. 當初撤破兩鎭合爲鐵串陞號, 其意有在, 而遷延時日, 設鎭處乙, 迄未究竟, 僉使時方借入民家, 事未妥當. 令廟堂急速處置爲白只爲. 詮次善啓云云."
崇德二年九月二十二日.